< 낭만필드 - 083 >
‘어릴 때도 굉장했구나.’
열아홉 살의 수아레즈도 만만치 않았다.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굉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직 좀 투박한 면은 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세련된 느낌과 정제된 느낌은 덜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유연한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안 되지.’
확실히 완성은 되지 않았다.
위협적이지만, 성배가 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몇 년 뒤라면 몰라도.’
향후 2년에서 3년 안에 수아레즈는 세계 수준의 공격수로 성장할 것이었다.
성배도 예전처럼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닫아놓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아레즈를 막아낼 수 있을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한 번 막아봐야지.’
1.5선에서 세컨 스트라이커로 움직이는 수아레즈는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도 측면에서 중앙으로 움직이며 동료의 패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나도 좀 자유롭다고.’
성배도 중앙으로 따라 움직였다.
측면 자원으로 경기에 나선 상황이지만, 오늘은 수비수가 아닌 미드필더였다.
수비수와 비교하면 움직임의 자유가 조금 더 있는 편이었고, 수아레즈를 따라 움직여도 무리는 없었다.
‘너는 막기 힘들지. 그렇다고 못 막는 건 아냐.’
수아레즈의 움직임은 절묘했다.
자신을 마크하던 마두로의 수비를 간단히 떨쳐내고 비어있는 공간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그런 수아레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너 혼자서 축구하는 건 아니거든.’
성배가 수아레즈의 움직임과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이유는 딱 한 가지.
볼을 잡고 있던, 수아레즈에게 패스를 넣어주는 역할을 맡은 그로닝겐 미드필더의 움직임이었다.
“아악!”
볼이 수아레즈의 발밑에 도착함과 동시에 성배의 태클이 들어갔다.
볼과 동시에 도달한 태클을 피할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수아레즈는 그라운드를 굴렀다.
구르면서 주심을 바라보았지만, 누가 봐도 정당한 태클이었다.
당연히 주심의 휘슬은 불리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동료들과 뛰어야 하는 거야.’
수아레즈로부터 볼을 빼낸 성배는 바로 역습을 시작했다.
공격적인 3-5-2 전술을 들고 나온 아약스와는 반대로 그로닝겐은 수비적인 3-5-2 전술을 들고 나왔고, 거의 5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비라인 전까지는 측면이 헐거웠다.
[와아아아!!!]
팀에 합류한 지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약스 팬들은 성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을 실망하게 했던 코펜하겐과의 2차전에서 유일하게 시원한 돌파를 선보인 선수가 바로 성배였다.
이후에도 포지션에 상관없이 나올 때마다 안정적인 수비와 쏠쏠한 공격력을 선보였으니 팬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볼은 사람보다 빠르지.’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도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헐거워도 볼은 사람보다 빨랐다.
드리블 돌파보다 패스를 활용한 돌파가 빠른 것은 당연했다.
‘중앙이다.’
측면은 분명 헐거웠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한 그로닝겐 선수들이 측면으로 빠지고 있었다.
중앙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역시 중앙이 좋았다.
‘베슬리, 리턴!’
중앙으로 움직일 때, 볼을 가지고 가는 것은 위험했다.
우선 패스한 뒤에 공간을 확보한 뒤 다시 이어받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었다.
마침 바로 옆에 스네이더가 있었고, 바로 볼을 넘겼다.
‘아차!’
다시 이야기하지만, 성배는 급박한 상황에서의 짧은 패스가 약간은 부정확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뛰어난 편이지만, 살짝 아쉬웠고, 지금도 패스가 조금 길었다.
‘부탁한다, 베슬리.’
그래도 일단 뛰었다.
스네이더라면 어떻게든 볼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비켜!’
성배가 갑작스럽게 중앙으로 방향을 틀면서 발이 꼬인 그로닝겐 선수들이 몸을 부딪쳐왔다.
발이 꼬였는데 제대로 힘을 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베슬리!’
달려든 그로닝겐 선수들을 모두 떨쳐내고 공간을 확보한 성배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스네이더가 볼을 넘겨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친.’
사실 플레이를 이어나가긴 했지만 크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준 패스가 뒤로 빠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네이더는 뒤로 빠지는 볼을 오른발로 잡아놓은 뒤, 빠르게 몸을 돌리면서 거의 지체하지 않고 리턴 패스를 넣어주었다.
‘미쳤군. 이건 무조건 넣어준다.’
스네이더가 이렇게까지 해주었으니 무조건 성공한다.
날아온 패스를 가슴으로 받으며 든 생각이었다.
‘나이스.’
그에 맞춰 훈텔라르와 바벨의 침투가 이루어졌다.
두 선수가 양방향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자 그로닝겐 수비수들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어떻게 하지?’
그리고 성배는 고민을 시작했다.
두 선수가 수비수들을 데리고 움직여준 덕분에 슈팅 코스가 열린 것이었다.
‘패스? 슈팅?’
패스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지만, 슈팅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왼발 슈팅 각도이기도 했다.
‘때리자.’
그 순간, 그로닝겐의 수비수가 훈텔라르에게로 향하는 패스 코스를 막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슈팅 코스가 넓어졌다.
그 모습을 본 성배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뻥!
‘들어가라!’
반대편 골문을 보면서 슈팅을 날렸다.
먼 거리에서 강하게 때리는 슈팅이 주특기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발등에 제대로 얹힌 느낌이었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잠시 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볼은 그로닝겐의 골문 안에서 구르고 있었다.
“좋았어! 나이스 슈팅!”
“그런 패스 받았으면 무조건 넣어야지! 잘했어!”
성배는 살짝 상기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향해 달려갔다.
등 뒤에 마두로를 달고 관중석 앞에 도착한 성배는 검지로 관중들을 가리키며 환호를 유도했고, 관중들은 뜨거운 환호로 성배의 세리모니에 반응해주었다.
“잘했어.”
“패스 멋있었다.”
스네이더에게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후반 80분.
성배는 스네이더의 도움으로 오늘 경기의 영웅이 되었다.
“라인 유지하고 수비에 집중하자!”
스탐이 소리쳤다.
역전 골이 터진 이후 그로닝겐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되었고, 아약스는 역시나 한 골을 지키는 운영으로 돌아섰다.
‘원래 이러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감독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고.’
꼭 수비적인 전술을 좋아하는 감독이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당연한 전술 변화였다.
반대로 그로닝겐은 공격적으로 변화를 주었다.
‘베슬리를 빼고 오가라루라. 완전히 잠그겠다는 거네.’
케이테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스네이더를 빼고 라이트백 오가라루를 투입했다.
그리고 성배는 레프트백 자리로 돌아갔다.
‘5백이라. 본격적이네.’
스탐과 베르마엘렌, 헤이팅아의 스리백에 오가라루와 성배가 윙백이 아닌 풀백으로 양 측면에 위치했다.
극단적으로 수비적인 포메이션이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 다행인가.’
지금은 이래도 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에 있겠지만.
사실 오늘 경기는 졸전에 가까웠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후반 막판까지 끌려가는 경기라니.
‘좀 화끈하게 이기고 팬들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는데.’
오늘이 그날은 아니었다.
“다 내려와! 측면 철저히 잠그고!”
스탐이 내지른 고함에 성배도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로닝겐 진영에는 아약스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양 팀의 선수들이 대부분 아약스 진영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는 좀 치사했지? 제대로 붙어보자.’
그리고 성배는 수아레즈의 앞을 막아섰다.
수아레즈의 볼을 빼앗은 적이 한 번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일대일이 아니었다.
지금, 성배는 수아레즈와 제대로 한 번 붙어보기로 했다.
‘급한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자리를 잡은 성배는 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진득하니 기다리며 수아레즈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시간은 성배의 편이었다.
한 골 뒤지고 있는 그로닝겐이 급하지, 아약스는 급할 것 없었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너무 서두르네. 그 정도로 보내줄 수는 없지.’
수아레즈가 갑작스럽게 가속하며 성배의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성배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순식간에 따라붙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수아레즈의 표정에서 초조함이 드러나고 있었고, 그럴수록 성배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세상에 완벽하게 공평한 게임이 가위바위보 말고 또 있을까.’
경기 흐름 상 두 선수의 맞대결이 완전한 일대일 대결이라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팀 스포츠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한 번, 열어줘 볼까?’
그라운드를 살펴본 성배는 살짝 측면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역시나, 초조한 수아레즈는 열어준 공간을 통해 돌파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두 번째 함정.’
측면 돌파를 시작한 수아레즈를 따라가면서 성배는 일부러 살짝 오버했다.
속도를 필요한 것보다 더 높이까지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수아레즈는 순식간에 드리블을 멈추고 방향을 전환했다.
‘바로 그거야.’
처음부터 성배의 함정이었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하면 튕겨 나갈 것으로 보였지만, 성배는 안정적으로 수아레즈를 따라갔다.
그리고 수아레즈의 옆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나이스!”
아약스의 수비형 미드필더. 마두로였다.
성배가 쳐놓은 함정에서 치명타를 담당한 것이었다.
마두로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성배가 수아레즈를 유인했고, 수아레즈는 성배의 뜻대로 움직이면서 마두로의 태클에 볼의 소유권을 잃어버렸다.
-뻥!
“다시 정비해!”
볼을 따낸 뒤, 최전방의 훈텔라르를 보고 길게 질러 시간을 번 성배는 동료 수비수들에게 소리쳤다.
다시 볼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 전에 아약스의 수비가 정비될 것이었다.
‘억울하면 다음 기회를 노려보든지.’
그라운드를 강하게 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아레즈가 성배를 노려보았다.
성배는 눈썹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삑! 삐-익!!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역전 골을 허용한 이후, 그로닝겐은 파상공세를 펼쳤지만, 아약스의 수비진을 뚫어낼 수 없었다.
톰 데 뮬을 대신해 그라운드를 밟은 성배는 90분 동안 뛰어다닐 체력을 남은 시간에 모두 쏟아부으며 단단한 수비를 보여주었다.
[주! 주! 주!]
당연히 경기 종료 후에는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성배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오늘 경기의 영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배였다.
“오오, 기분 좋겠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르마엘렌이 뒤에서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성배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팔을 치웠다.
‘중독되겠네.’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치열한 경쟁에 중독.
경기 끝나고 울려 퍼지는 자신의 이름에 중독.
안 그래도 축구에 미쳐있었던 성배지만, 자신의 성공과 발전을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큰 무대의 맛을 알아가고 열광적인 관중들과 함께할수록 결핍되어 있었던 즐거움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그로닝겐과의 리그 7라운드 경기 3일 뒤, 아약스는 또 한 번의 경기를 가지게 되어 있었다.
유럽 대항전에 참가한 이상 빡빡한 일정은 어쩔 수 없었다.
“아, 피곤해... 비행기라니. 왜 잉글랜드는 섬나라인 건지.”
베르마엘렌이 투덜거렸다.
“시끄러워.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잠이라도 자라. 그게 남는 거니까.”
수면 안대를 착용한 성배도 그 옆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로닝겐전 다음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모인 아약스 선수단은 잉글랜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너 자신 있어? 요즘 호날두 장난 아니던데.”
아약스의 상대는 다름 아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클럽이자,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클럽 중 하나이며, 챔피언스리그의 유력한 우승후보이기까지 한 클럽이었다.
“호날두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성배가 이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성배가 데뷔할 무렵에 이미 세계 최고의 유망주였다.
윙어로 전향하기 전에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다.
“엄청난 선수지.”
말 그대로 엄청난 선수였다.
리오넬 메시와의 경쟁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때 난 뭘 하고 있었는지.’
전생에서 성배의 데뷔는 2006/07시즌.
출전 경기 수는 세 경기였다.
그리고 호날두는 2007/08시즌 이후 발롱도르를 거머쥐었다.
“그래서 막을 자신은?”
베르마엘렌이 재차 물었다.
“당연히... 있지. 호날두? 작년에 막았던 호아킨이랑 로번보다 아직은 한 수 아래니까.”
성배는 호날두를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 낭만필드 - 08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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