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82 >
“어때? 네덜란드 생활은 할 만해?”
“그걸 말이라고. 별로야. 집도 좁고 물가도 비싸고 차는 막히고.”
유로 2008 예선 3차전과 4차전을 위해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성배는 경기를 마치고 다시 한 번 선수들과 만남을 가졌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계 선수들과 네덜란드계 선수들 모임에 번갈아 참여했고, 지금은 네덜란드계 선수들과 함께 있었다.
“하하,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그리고 반 바이텐은 이번에도 함께 있었다.
프랑스계 선수들 모임에도, 네덜란드계 선수들 모임에도 성배와 반 바이텐은 함께 참석했다.
“말했잖아. 주거 환경이 별로라고.”
네덜란드의 주거 환경은 여전히 성배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초반에는 정말이지 최대한 빨리 네덜란드를 떠나고 싶을 정도였다.
“매달 월세 내는 날이면 ‘빨리 성공해서 빅리그로 떠나야지.’하고 다짐한다고.”
그나마 적응한 지금도 도저히 그 살인적인 월세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수백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월세.
살인적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쯧쯧. 역시 네덜란드는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국토 면적은 네덜란드의 아홉 배에 달하지만, 인구수는 다섯 배에 불과한 독일에서 거주하는 반 바이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어지간한 대도시도 한적한 편인 독일이었기에 네덜란드보다는 분명 쾌적할 것이었다.
“그래도 거긴 너무 한적해. 난 도시가 좋다.”
그래도 독일 생활은 너무 심심할 것 같았다.
대도시라고 해도 인구 100만을 넘어가는 도시가 거의 없는 독일이었다.
'역시... 적당한 잉글랜드가 좋겠지.'
빨리 EPL로 가야겠다.
잉글랜드에도 단점은 물론 있겠지만, 날씨고 나발이고 상관없고, 그저 잉글랜드에 진출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그건 알아서 하고.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아약스 생활 어떠냐고.”
아약스 생활이라...
“좋지 않아. 미묘하지.”
최근 아약스의 분위기는 좋다고 하기에도, 나쁘다고 하기에도 미묘한 느낌이었다.
좋은 부분도, 나쁜 부분도 있었다.
“왜? 대충 보니까 성적도 나쁘지 않던데.”
분명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리그 6라운드까지 5승 1패를 거두며 1위에 올라 있었고, 리그컵인 KNVB Beker 1라운드에서도 가볍게 승리를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해 있었다.
반 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던 셀틱과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2차전에서 패배한 것은 아쉬웠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성적이야 뭐.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성적이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성적은 기본이고 다른 것들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이번 시즌, 초반이지만 리그 3위까지 밀리면서 성적의 압박이 심한 반 바이텐은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라. 많지. 팬들도 문제, 선수도 문제, 감독도 문제. 다 문제야.”
성적은 나오지만, 다른 부분들에서 삐걱거리고 있는 아약스였다.
“아약스에 어울리지 않는 수비적인 전술 때문에 팬들은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스리백으로 대표되는 케이테 감독의 수비적인 전술 운용.
이것은 아약스 팬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감독의 장악력이 형편없어서 선수들은 겉돌고 있고,”
케이테 감독은 딱 코치에 어울리는 그릇이었다.
선수들을 다독이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만한 역량이 그에게는 없었다.
“팬이나 전문가가 비난하면 감독은 선수 탓, 팀 탓이나 하고 있고,”
이게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수비적인 전술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력 등에 관한 비판을 받으면 케이테 감독은 그 탓을 선수와 팀에게 돌리고 있었다.
특히, 지난 로다 JC전에서 극에 달했는데, 한 수 아래의 로다 JC에 역시나 수비적인 경기 운영 끝에 0-2로 완패하면서 비난이 폭주하자, 선수들 탓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 이후,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관계가 어색해졌다.
“여하튼. 만약에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큰일 날지도 몰라.”
그나마 성적이라도 좋아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최후의 보루인 성적마저 떨어진다면 팬들의 분노, 선수와 코칭스태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이었다.
“뭐, 성적이 좋아도 우리랑 크게 다르지는 않구나.”
바이에른 뮌헨도 3승 1무 2패로 리그 3위까지 떨어진 상황이라 최근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바이에른은 챔피언스리그에서라도 잘 나가지.”
“아약스는 리그에서 잘 나가잖아.”
남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투정들이겠지만, 사실 두 팀 관계자들에게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야, 야. 어디서 자랑질이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시즌 망치고 우리한테 우승컵 넘기든가. 아직 한 개밖에 없어.”
두 선수의 대화를 들은 무사 뎀벨레가 다가오며 투덜거렸다.
80년대 영광의 시기를 보낸 이후 급격하게 몰락했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떠오르고 있는 AZ 알크마르 소속으로 뛰고 있는 선수였다.
“알아서 가져가라. 이 분위기면 진짜 너희한테 빼앗길지도 모르니까.”
4승 2무를 기록, 아약스를 승점 1점 차이로 바짝 뒤쫓고 있는 AZ였다.
아약스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조금만 늦으면 진짜로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뭘 가져가. 네 맘대로 그렇게 함부로 뿌리고 다니는 거 아니다.”
“그러게 말이야. 아니, 줄 게 따로 있지.”
아약스 동료인 베르마엘렌과 톰 데 뮬이 다가오면서 반박했다.
네 선수가 한곳에 모이자, 다른 선수들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제 우린 신경도 안 쓰는 거냐? 이거 섭섭한데?”
필립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페예노르트 선수들 세 명도 참전했다.
최근 PSV의 기세가 무섭다고 해도 아약스의 가장 큰 라이벌은 역시 페예노르트였기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페예노르트으? 여기서 왜 페예노르트? 그쪽은 일단 유럽대항전 출전 가능 순위로 올라오고 말씀하시죠?”
에인트호벤 소속의 티미 시몬스가 깐족거렸다.
페예노르트의 현재 순위는 8위였다.
“에휴, 우리는 그냥 조용히 있을까?”
지난 시즌 성배와 함께 안더레흐트에서 뛰었던 빌렘의 트리스탄 피어스만, 헤렌벤의 브라이언 반더부스, 비테세의 길 스워츠, 로다 JC의 케빈 반 드쉘 등.
어쩌다 보니 에레디비지에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모두 참가한 애들 싸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좋군.’
대표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귀화한 선수였기에 아직 성배와 나머지 선수들 사이는 조금 어색했다.
프랑스계에는 안더레흐트 동료들이 많아서 다행히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을 수 있었지만, 네덜란드계가 문제였다.
오늘, 에레디비지에 순위를 주제로 신나게 떠들면서 네덜란드계 선수들과도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
‘제길. 이러려고 날 벤치에 앉혔나?’
A매치 주간이 끝나고 아약스로 복귀한 성배는 그로닝겐과의 리그 7라운드 경기에서 벤치에 앉았다.
선발 명단에서 빠진 것이었다.
‘날 빼고 이기기나 하면 말을 안 하지.’
그리게라가 가벼운 부상을 당하면서 베르마엘렌과 헤이팅아, 스탐이 선발로 나섰다.
베르마엘렌이 그리게라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노련미나 다른 선수들과의 호흡 부분에서는 살짝 미흡했고, 수비력에 전혀 타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센터백 라인도 약해졌는데, 나까지 빼다니.’
아약스의 풀백 중 센터백이 원래 포지션인 헤이팅아나 베르마엘렌을 제외하면 성배의 수비력이 가장 좋았다.
성배를 빼고 다른 선수를 넣으면 당연히 수비력에 손실이 생기는 것이었다.
‘게다가 윙백을 아예 없애버렸으니...’
스리백은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윙백이 없는 전술이었다. 두 명의 측면 미드필더가 윙으로 출전한 것이었다.
엠마누엘슨은 몰라도 톰 데 뮬이 출전한 오른쪽 측면은 수비를 기대할 수 없었고, 역시나였다.
‘수아레즈를 너무 몰랐지.’
그리고 그로닝겐에는 그가 있었다.
루이스 수아레즈.
성배와 동갑으로 열아홉의 어린 선수인 그를 케이테 감독은 너무 무시했고, 1.5선 정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에게 아약스의 수비진이 흔들렸다.
‘팬들의 비난을 너무 신경 썼어.’
수비적이라는 팬들의 비난에 흔들린 결과물이었다.
자신만의 철학이 수비적이고 안정적인 전술이었다면, 끝까지 밀어붙였어야 했다.
그 철학으로 성적을 내는 것이 최선의 수였다.
공격적인 전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제 와서 수비를 강화할 수도 없겠지.’
수아레즈에게 두 골을 허용하면서 1-2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경기 종료까지는 30분 정도 남았고, 수비를 강화하기보다 공격을 강화해야 할 시간이었다.
“주, 일단 몸을 풀어놔.”
코치가 케이테 감독과 대화한 후, 성배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몸을 풀기 시작한 성배였지만, 출전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어, 어어!! 골!! 골!! 골이다!!”
하지만 5분 뒤, 상황이 변했다.
공격진영까지 과감하게 올라간 헤이팅아의 패스를 받아 바벨이 오늘 경기 두 번째 골을 터뜨린 것이었다.
‘네덜란드 NO.1 유망주’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날뛰더니 결국 멀티 골을 기록한 바벨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2-2.
오늘 경기는 공격적이고자 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꽤 위급한 상황이었고, 이럴 때는 본성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톰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이거 잘 하면 나갈 수 있겠어.’
공격적인 플레이를 위해 투입한 톰 데 뮬이지만,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수비는 기대할 수 없고, 공격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속 뛰게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공격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돌파력을 제외하면 공격력에서도 성배가 위였다.
비록 파괴력은 부족하지만, 정확한 킥과 침투 타이밍, 그리고 위협적인 세트피스 키커인 성배이기에 경기 후반으로 접어든 지금 시점에서는 공격 옵션으로도 더 위협적일 수 있었다.
“주! 준비해!”
그리고 다급히 성배의 출전 준비를 독촉하는 코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로닝겐과의 리그 7라운드 홈경기.
2-2 동점 상황인 후반전 30분.
성배가 출전을 준비했다.
***
[IN - 13. 주성배 / OUT - 16. 톰 데 뮬]
“허억, 허억. 부탁한다.”
“얼마든지. 수고했다.”
성배는 톰 데 뮬과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
다만, 포지션까지도 그와 같았다.
‘윙어로 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데...’
2선은 아니고 3선의 측면 미드필더 역할이었지만, 어쨌든 윙백처럼 수비수에 가까운 미드필더가 아니라 진짜 미드필더였다.
‘공격적인 역할을 원하면 그렇게 해야겠지.’
아무래도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지 10년이 넘었다.
몸에 밴 습관이 있기에 수비적인 윙어 역할을 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저 친구도 좀 막아주고.’
수아레즈.
케이테 감독의 의중에는 그를 막아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성배 역시 아직은 유망주에 불과한 그를 틀어 막아보고 싶었다.
< 낭만필드 - 082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