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81화 (56/356)

< 낭만필드 - 081 >

“시망, 늦었고! 중앙 돌파!”

시망과 신체 접촉이 있기는 했지만, 성배는 넘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파울 콜을 받아내기에는 애매하기도 했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충분히 상황 나오겠다.’

벤피카의 레프트백, 레오가 성배를 막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성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바깥으로 접어놓고, 슈팅!!”

레오의 움직임은 볼이 있는 성배의 오른쪽 방향을 향했다.

하지만 성배는 원래 왼발잡이였고, 두 발 모두 잘 사용하기는 해도 아주 약간이지만 왼발이 더 편하긴 했다.

게다가 지금은 왼발 슈팅이 더 편한 위치였다.

“골키퍼 정면! 아, 아쉽습니다. 좋은 슈팅이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고 맙니다.”

페널티박스 오른쪽 구석에서 좋은 슈팅을 날리긴 했지만, 각도의 한계가 있어 구석을 향해 때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감아서 때린 성배의 슈팅은 의도했던 것보다 살짝 더 감겨서 골키퍼가 살짝 움직여 잡아낼 수 있는 위치로 향했다.

“막히기는 했지만, 좋은 슈팅이었어요. 돌파도 좋았고, 슈팅도 좋네요. 풀백으로서는 공수의 밸런스가 이상적으로 잡혀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윙백으로서는 어떨지 궁금했는데 윙백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네요.”

스리백에서 윙백은 측면을 홀로 담당해야 했고, 수비보다 공격에서 더 큰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풀백은 수비수로 분류되고 윙백은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풀백과 윙백. 일반 팬들은 이름의 차이 말고는 딱히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그렇죠. 공격력과 수비력이 모두 뛰어난 선수라고 하더라도 윙백으로 뛰느냐, 풀백으로 뛰느냐에 따라 경기력에 차이를 보이는 선수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개인 기량 문제를 떠나서 풀백과 윙백의 역할이 다르기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 경기력이 달라지는 선수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배가 보여주는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이 선수를 가만히 보면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영리한 선수라는 느낌이 들어요. 일반적으로 저 정도 나이의 선수들은 피지컬이나 번뜩이는 감각을 앞세워 떠오르는데, 이 선수를 생각하면 플레이의 밸런스나 타이밍,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거든요?”

측면 수비수가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최고 수준의 풀백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카를로스나 카푸, 미래의 이야기지만 에브라나 마르셀루 등도 선수 생활 초창기에는 지나친 공격성으로 ‘돌아오지 않는 풀백’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수비가 필요한 타이밍에는 수비 위치에서 열심히 수비하고, 또 필요하다 싶을 때는 어느새 측면을 통해 올라와 있거든요? 이런 플레이가 쉬운 건 아니죠.”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이지 않겠습니까? 왼쪽과 오른쪽, 풀백과 윙백을 가리지 않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니 말입니다.”

“수비형 미드필더도 가능하죠. 좋은 선수예요.”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과 다재다능함.

갖지 못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배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조금씩 유럽 무대의 중심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가고 있었다.

***

‘이제 슬슬 골이 급할 시간이 되었는데...’

성배는 벤치의 케이테 감독을 흘긋 쳐다보았다.

경기가 막판으로 접어든 후반 30분 즈음.

여전히 스코어는 0-0,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2위로 16강에 올라가려면 벤피카는 무조건 잡아야지.’

이제는 승부수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16강 진출의 가장 큰 경쟁자는 벤피카였고, 벤피카와의 홈경기에서는 무조건 3점을 따내야만 했다.

‘수비적인 걸 싫어하진 않지만, 타이밍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좀 별로인데.’

물론, 케이테 감독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바르셀로나에서 수석코치도 하고 아약스 감독으로 선임된 만큼, 경기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경기 분위기를 읽었어도 뭔가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너무 조심스러워도 안 돼. 감독이라면 과감한 선택을 할 줄 알아야지.’

초보 감독의 약점은 경기 흐름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소극적이라는 것이었다.

지지부진한 경기이기도 하지만, 아약스가 딱히 밀리고 있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 정도라면 과감하게 공격적인 수를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체력 안배 차원의 교체가 두 번 이루어진 이후 벤치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명장과 범장의 차이는 이런 거지.’

헹크 텐 케이테.

과거에 성배가 들어본 적 없는 감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어본 적은 있었다.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었지만.

‘벨기에-네덜란드 지역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감독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성배의 생각대로 케이테 감독은 아약스 이후 첼시 코치와 파나티나이코스 감독을 마지막으로 유럽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었다.

이후 중동과 중국을 건너 스파르타 로테르담의 전술 고문으로 커리어를 끝낸 것이었다.

“아약스, 조금 더 과감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 경기를 비기면 웃는 쪽은 벤피카거든요?”

중계진의 의견도 성배와 같았다.

아약스가 16강을 노린다면 오늘 경기를 무조건 잡는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따로 액션이 없다면... 지금 구성으로 어떻게 해보는 수밖에.’

감독에게 불만을 표시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감독의 액션이 없다면 그라운드 위에 있는 선수들끼리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게라가 볼 끊어냅니다. 오른쪽 측면의 주에게 연결.”

벤피카는 무승부에 만족하려는 듯 천천히 경기를 운영했다.

반대로 아약스는 벤치에서 따로 주문이 없었음에도 조금 더 공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세 명이라.’

성배의 뒤쪽에서 시망이, 옆에서 카추라니스가, 앞에서 레오가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될 것 같은데?’

평소였다면 일단 볼을 다른 선수에게 돌린 뒤에 자리를 다시 잡고 리턴을 노리겠지만, 왠지 돌파가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일단 믿어보자.’

가능하기만 하다면 좋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성배는 평소와 다른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저리 비켜!’

볼을 받아 사이드라인 쪽으로 가까이 붙도록 차 놓은 뒤에 빠르게 가속했다.

그리고 측면에서 달려든 카추라니스에게서 볼을 지켜내기 위해 온몸으로 막아섰다.

‘좋아, 버틸만해.’

카추라니스의 돌진을 막아내면서 성배는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수비 축구의 핵심이자 포르투갈 리그의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인 카추라니스와의 경합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 성배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전 같았으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일이었다.

‘일단 기뻐하는 건 나중에.’

다음 플레이를 위해 흥분은 억눌렀지만, 확실히 성배의 텐션은 올라갔다.

올라간 텐션은 성배에게 자신감을 선물해주었다.

“버텨내고 사이드라인 돌파! 카추라니스와 레오가 수비합니다!”

이것만으로 벌써 약 20미터를 전진했고,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압박을 가하고 있는 카추라니스와 자리를 잡고 있는 레오의 사이에 끼인 성배는 두 선수 사이로 볼을 옮기며 중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카추라니스가 성배의 소매를 잡아왔다.

‘저리 비키라고!’

“야아! 멋진 방향전환이네요!”

하지만 이미 자신감이 충만한 성배를 멈춰 세우기에는 무리였다.

자신의 소매를 잡아챈 카추라니스의 몸을 왼손으로 강하게 밀어내며 수비를 떨쳐낸 성배는 다시 측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으로 방향을 튼 것은 페이크였다.

그 동작에 속은 레오가 중앙으로 이동하며 생긴 공간을 이용해 다시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며 측면 돌파를 이어갔다.

“일당백의 엄청난 돌파! 뺏기지 않습니다!”

“오오오오!!”

벌써 거의 혼자 60미터가 넘는 거리를 돌파한 상황이었다.

성배가 세 명의 선수들 사이에서 드리블하는 동안 훈텔라르와 바벨, 스네이더를 비롯한 아약스 동료들도 박스 근처에서 모두 자리를 잡았다.

‘급하긴 급한가 보네.’

지금 성배의 돌파는 벤피카 선수들에게 분명 위협이 되고 있었다.

특히, 60여 미터를 홀로 달리면서 보여준 파괴력은 레오가 긴장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들키면 안 되지.’

하지만 아무리 긴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들키면 안 되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였다.

“주, 페이크! 반대 방향으로 접고 왼발로 크로스!”

성배의 간단한 페이크에 레오가 몸을 날렸다.

가볍게 레오의 수비를 벗겨낸 성배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마음 놓고 크로스를 올렸다.

“크로스, 휘어지고! 훈텔라르!!”

성배의 왼발은 이제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었다.

게다가 수비의 방해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의 크로스였기 때문에 멋지게 감겨 올라갔고, 대기하고 있는 훈텔라르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이어졌다.

“훈텔라르, 헤더! 아!! 벗어났습니다! 크로스바 위를 스쳐 지나가는 훈텔라르의 헤더!”

하지만 아쉽게도 성배의 슈퍼 플레이가 득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훈텔라르가 헤더로 골문을 노리려고 할 때 루이장의 방해를 받았고, 루이장의 방해에 밸런스가 흔들린 훈텔라르의 헤더는 크로스바를 넘어가고 말았다.

“아아. 아쉽네요. 이번 플레이가 득점으로 이어졌어야 하는데요! 주성배 선수의 화려한 돌파는 충분히 득점으로 이어질 자격이 있었어요!”

“주의 돌파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홀로 세 명의 선수들 사이에서 빠른 방향 전환과 간결한 드리블만으로 화려한 돌파를 보여주었습니다.”

성배가 보여준 플레이들은 하나하나만 따지면 전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어져 만들어진 돌파 장면은 굉장히 화려했다.

“화려한 테크닉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화려한 플레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주성배 선수가 보여주었네요. 기본기만 잘 익혀도 충분히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거든요?”

성배의 돌파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는지 해설자는 계속해서 그 플레이를 극찬했다.

확실히 멋진 플레이였던 것은 분명했다.

‘아쉽네. 언제 또 이런 플레이를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어지간하면 들어가길 바랐는데.’

다만, 이번 플레이는 운이 따라주었기에 가능했던 플레이였다.

대부분의 멋진 플레이도 어느 정도의 운이 따라주어야 가능한 경우가 많았고, 성배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플레이를 다시 한 번 해보라고 하면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확실히 힘이 많이 늘었어.’

이번 플레이의 가치는 성배가 몸싸움에서 카추라니스를 상대로 완벽하게 승리해냈다는 부분에 있었다.

‘카추라니스면 피지컬이 괜찮은 선수인데. 많이 좋아졌어.’

성배의 피지컬은 분명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

여전히 정면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고 여전히 몸싸움을 피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와 있었다.

자리를 먼저 잡으면 쉽게 밀리지 않을 정도, 몸싸움이 필요할 때는 주저하지 않을 정도는 된 것이었다.

‘이거... 점점 나이가 들면서 몸이 완성되면... 꽤 괜찮겠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수확 한 가지.

성배가 피지컬에 가지고 있던 열등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 낭만필드 - 08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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