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80 >
“기어이 스리백을 쓰려고 하시는 것 같네.”
베르마엘렌이 성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내 눈치는 왜 봐.”
그런 베르마엘렌의 시선을 성배도 느끼고 있었다.
“3-5-2로 전환하면 너랑 어비 중 한 명은 선발로 못 뛰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지.”
어비 엠마누엘슨과 주성배.
두 선수 모두 레프트 풀백과 윙백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스리백으로 전환이 되고 3-5-2 포메이션을 활용하게 된다면 왼쪽 측면 자리는 윙백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거야 뭐. 경쟁에서 이기면 되지.”
솔직히 자신은 있었다.
엠마누엘슨은 분명히 좋은 선수이지만, 아직 성배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능만 따지자면 성배보다 위이겠지만, 경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성배는 재능 이상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음... 어비가 팬들한테 인기가 꽤 많은데 괜찮으려나.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네덜란드계 벨기에 대표 선수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친분을 다지기 시작했고, 코펜하겐 전에서 지옥에서 건져 준 이후, 성배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 베르마엘렌이었다.
엠마누엘슨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성배가 밀려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어비도 벤치에 두기엔 아까운 선수지. 다만, 나를 벤치에 두기도 쉽지 않을 거다.”
성배는 케이테 감독이 직접 요청해 영입한 선수였다.
게다가 270만 유로의 이적료는 이번 시즌 아약스가 영입한 선수 중 가장 높았다.
스탐이 250만 유로, 오가라루가 210만 유로였고, 가브리와 로저는 자유계약.
케이테 감독이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영입한 선수가 성배라는 뜻이었다.
“하긴. 270만 유로가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스리백으로 전환하면 둘 중 한 명은 왼쪽이 아닌 곳에서 뛰거나 벤치에 앉아야 했다.
아약스가 자랑하는 두 명의 유망주.
두 선수를 어떻게 공존시킬지 케이테 감독의 의중이 궁금해지는 상황이었다.
***
훈련 때는 집중적으로 스리백을 갈고 닦았지만, 정작 경기에서는 한 번도 활용하지 않은 아약스였다.
브레다와 비테세를 상대로 에레디비지에 3라운드 경기까지 치르면서 아약스는 4-4-2 포메이션을 활용했고, 성배와 엠마누엘슨은 함께 왼쪽 측면을 맡았다.
“아약스와 벤피카, 벤피카와 아약스의 챔피언스리그 F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벤피카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첫 경기.
케이테 감독은 드디어 스리백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약스는 지난 코펜하겐과의 예선 2차전에 잠깐 보여주었던 스리백 카드를 들고 나왔네요.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인데, 수비적인 전술로 나선 건 조금 의외에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8강까지 올랐던 벤피카지만, 아약스와 비교해서 확실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클럽은 아니었다.
벤피카도 저력이 있는 클럽이지만, 아약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홈에서 수비적인 전술을 펼칠 필요는 없었다.
“스리백은 이렇게 쓰는구나. 내가 너랑 어비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어.”
베르마엘렌이 투덜거렸다.
결과적으로 베르마엘렌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스리백으로 전환하면서 주전 라인업에서 빠진 선수는 성배도, 엠마누엘슨도 아닌 베르마엘렌이었다.
“나는 좀 예상했는데 말이지. 네가 너무 진지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성배의 장점 중 한 가지는 왼쪽과 오른쪽, 어느 쪽에 서더라도 기복이 없는 플레이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헤이팅아를 원래 포지션인 센터백으로 돌려 스탐, 그리게라와 함께 서게 하고, 성배를 오른쪽에, 엠마누엘슨을 왼쪽에 세울 수 있었다.
그 결과 스리백이 되면서 선발로 출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베르마엘렌은 여전히 백업 1순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진작 말해주던가. 기대했는데, 참...”
베르마엘렌이 실망하든 말든 아약스에게 오늘 경기는 굉장히 중요했다.
빅리그의 빅클럽도 아니고 유럽에서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벤피카와의 경기에 스리백을 꺼내 들었다는 것은 팬들의 상당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홈경기였다.
오늘 패배하면 케이테 감독은 부임 직후부터 상당한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양 팀 모두 베스트 멤버를 기용했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무조건 잡아야 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F조는 2위 싸움이 치열하니까요. 시드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외하면 벤피카와 아약스, 셀틱 세 팀 중 어느 팀이 2위를 차지해 16강에 진출하든 이상할 게 없어요.”
아약스와 벤피카. 그리고 셀틱.
세 클럽 중 어떤 클럽이 2위를 차지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조가 바로 F조였다.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클럽들이 한 조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죽음의 조라고 할 수 있었다.
“최근 분위기만 보자면 벤피카가 가장 2위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약스는 코펜하겐과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경기에서 기대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셀틱은 사실 앞의 두 팀과 비교하면 반수 정도 처지는 느낌이죠?”
“하지만 벤피카의 기세도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리그 개막전에서 한 수 아래의 보아비스타를 상대로 0-3, 대패를 당했습니다.”
치열한 2위 싸움이 기대되는 조이지만, 지금까지는 뭔가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약스는 개막전을 화끈한 승리로 시작했지만, 코펜하겐을 상대로 졸전을 펼치고 브레다와의 경기에서도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고, 벤피카는 개막전에서 한 수 아래의 보아비스타에게 0-3의 대패를 당했다.
F조 최약체라 불렸던 셀틱이 오히려 변함없는 스코틀랜드 최강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두 팀 모두 반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경기가 반전의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아약스가 스리백을 들고나온 거겠죠. 경기 막판에 스리백으로 전환한 적은 있지만, 시작부터 스리백으로 나선 건 오늘이 처음인데요, 과연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경기를 봐야 알겠네요.”
두 팀 모두에게 중요한 경기.
아약스에서는 라이트백으로 경기에 나선 것이 처음인 성배에게도 중요한 경기였다.
***
“오늘은 주가 라이트백으로 출전했습니다. 포백 전술에서는 레프트백으로 출전했던 선수이지 않습니까?”
“원래 이 선수의 포지션이 레프트백이기는 한데, 안더레흐트 시절부터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출전했었죠. 중요한 건 오른쪽과 왼쪽이 아니라 풀백과 윙백의 차이에 잘 적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오늘 경기, 오른쪽 윙백으로 경기에 나선 성배는 벤피카의 레프트 윙어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벤피카의 레프트 윙.
포르투갈의 주전 윙어, 시망 사브로자였다.
‘시망. 어감이 좋지는 않지만.’
어감이 좋지 않고, 한국에서는 별로 높지 않은 인지도 때문에 우스운 취급을 받았었지만, 직접 마주한 성배로서는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선수였다.
‘포르투갈 골든 제너레이션... 쉽게 볼 수 없지.’
성배는 자세를 조금 더 낮추었다.
유로 2004 준우승과 2006 월드컵 4강의 주역.
시망을 막기 위해서는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시망과 주의 맞대결. 시망, 조금씩 전진합니다.”
성배의 수비를 뚫어볼 생각인지 시망이 볼을 툭툭 건드리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일대일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망 정도라면.’
드리블과 슈팅, 크로스, 패스와 양발 사용능력까지.
다재다능한 윙어인 시망이지만,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피지컬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성배가 일대일 마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은 피지컬 문제 때문이었기에 시망과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시망, 치고 들어갑니다!”
천천히 움직이던 시망이 빠르게 가속하며 돌파를 시도했다.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던 성배도 빠르게 반응해 따라붙었다.
‘비시즌 동안 토하면서 고기만 먹었다고!’
시즌을 준비하면서 처절하게 준비한 것을 보여줄 타이밍이었다.
몸싸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성배는 팔을 시망의 몸 앞쪽으로 쑤셔 넣으며 적극적인 몸싸움을 시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볼 빼냈습니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왼발로 볼 빼내고 앞으로 전개! 주, 훌륭한 수비입니다!”
예상치 못한 성배의 적극적인 수비에 시망은 무기력하게 볼을 빼앗기고 말았다.
성배의 팔이 자신의 몸을 건드린 순간 느껴진 단단한 느낌은 경기를 준비하며 성배의 플레이를 찾아본 시망을 당황하게 했다.
‘지난 시즌의 내가 아니라고.’
표정을 숨기려 했겠지만, 경험 많은 성배는 시망이 당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배를 만족스럽게 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보완한 부분에서 상대를 당황하게 했다는 것은 마약과도 같은 쾌감을 주었다.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발전해야 살아남는 거지.’
물론, 발전하지 않아도 탑클래스에서의 경쟁력이 충분한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호나우두의 후계자로 불렸던 아드리아누로 대표되는 것처럼 재능만 믿고 자기 발전에 게으른 선수들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재능이 부족해도. 충분히 올라설 수 있어.’
과거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성배가 설정해놓았던 자신의 한계도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특히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였던 피지컬에서 상당한 성장을 이루면서 직접 세운 벽에 균열이 늘어갔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위로 갈 수도 있겠어.’
전생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으로 높이 올라갔던 시망.
한창 전성기로 물이 올라있는 시망을 한 번이지만 간단히 막아내면서 성배는 또 한 번 확신했다.
***
“스네이더가 마두로에게 패스하며 숨을 고릅니다.”
수비적인 전술인 3-5-2를 들고나오긴 했지만, 아약스의 재능있는 공격자원들은 괜찮은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네이더와 훈텔라르, 바벨로 이루어진 영건 3인방은 벤피카 수비수들을 시종일관 괴롭혔다.
“마두로, 측면의 주에게. 주, 전방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측면의 성배와 엠마누엘슨도 힘을 보태고 있었다.
두 선수의 꾸준한 측면 공략은 벤피카와 균형을 맞추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라이언!’
볼을 잡은 성배의 눈에 뒷공간을 파고들어 공간을 만들어낸 바벨의 모습이 보였다.
“뒷공간을 바라봤습니다! 측면입니다!”
“아, 좋은데요?”
성배의 장점. 정확한 공간 패스가 바벨에게 투입되었다.
아주 살짝 길었지만, 덕분에 수비의 방해를 받지 않은 바벨이 다시 중앙으로 살짝 꺾어 훈텔라르에게 투입했다.
“루이장이 가까스로 걷어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자세를 잡지 못하고 시도한 패스는 생각보다 약했고, 벤피카 수비의 핵심이자 브라질 국가대표 수비수인 루이장에게 막히고 말았다.
‘살리자.’
루이장이 가까스로 걷어낸 볼은 성배가 있는 오른쪽 측면으로 날아왔다.
가만히 놔두어도 좋은 위치에서의 스로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라운드를 훑어본 성배는 살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 볼 살아있습니다! 주입니다!”
성배가 뻗은 왼발에 볼이 와서 붙었다.
볼을 살린 성배는 빠르게 속도를 붙여 중앙으로 꺾어 들어갔다.
‘건들지 마.’
볼이 중앙으로 투입되었다가 빠르게 나오면서 벤피카 수비진이 아직 측면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른쪽 측면이 뻥 뚫려 있었고, 그것을 본 시망이 급하게 달려와 성배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빠져나간 성배의 등을 건드리는 것에 그쳤다.
< 낭만필드 - 08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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