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79 >
‘제발...’
세상이 거꾸로 보였던 그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은 성배에게만 슬로우로 지나갔다.
‘닿았다!’
그리고 발이 볼에 닿기 전,
성배는 걷어냈음을 확신했다.
“아! 주!! 막아내지만, 다시 베르글룬트에게!”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던 볼을 성배가 오버헤드킥으로 걷어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볼이 코펜하겐의 공격수, 베르글룬트의 발밑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시 슈팅!”
중심을 잡고 때릴 시간도 없었다.
자신의 발밑에 볼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베르글룬트도 급했다.
중심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디딤발도 짚지 못했지만 그래도 때렸다.
베르글룬트는 몸을 뒤로 던져 볼과의 거리를 만들고 넘어지면서 오른발을 휘둘러 슈팅을 시도했다.
‘내가 어떻게 막았는데!’
오버헤드킥 이후 그라운드에 떨어져 통증은 있었지만, 아니, 있을 것이었지만, 누워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라운드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상체를 일으켜 상황을 살폈고, 베르글룬트가 넘어지며 다리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한 번만 더!’
말도 안 되는 것 한 번 막아냈다.
그런데 여기서 실점하게 되면 자신의 플레이가 빛이 바랜다.
무조건 막아내야 했다.
‘제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성배가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핸들링 파울이 불리지 않게 몸을 180도 돌려 등이 보이게 한 뒤 일직선으로 쭉 날아갔다.
“다시 한 번 주성배!”
성배는 이번에도 성공했다.
몸을 날린 자신의 등에 볼의 감촉이 느껴진 순간, 짜릿한 전류가 온몸을 관통했다.
‘됐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멀리 튕겨 나가지 않은 느낌이었다.
동료들이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스탐이 멀리 걷어냅니다!! 코펜하겐, 절호의 찬스를 놓칩니다!!”
예상대로 스탐이 볼을 걷어내 주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코펜하겐의 공격은 결국 여기까지였다.
“이 자식! 네가 살렸다! 아주 좋았어! 잘했다!”
볼을 관중석 2층까지 날려 보낸 스탐이 가장 먼저 다가와 성배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뒤이어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씩 성배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꽤 하네. 어비가 밀릴 만도 해.”
그리게라도 와서 한마디를 거들었고,
“와, 꼼짝없이 여기서 짐 싸겠구나, 싶었는데. 고맙다.”
역동작에 걸려 볼을 바라만 봐야 했던 스테켈렌부르크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딱!
“자식! 훌륭해! 네가 우릴 살렸다!”
헤이팅아도 성배의 뒤통수를 찰지게 후리며 멋진 플레이를 치하했다.
“아, 고맙다. 진짜로. 나 때문에 난리 나겠구나, 살면서 먹을 욕 다 먹겠구나, 싶었는데. 고맙다.”
마지막으로 베르마엘렌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을 표시했다.
위기를 맞게 된 계기도 베르마엘렌의 패스 미스였고, 나중에는 베르마엘렌의 다리에 맞고 굴절되어 실점할 뻔한 상황이었다.
두 번째 상황은 베르마엘렌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패스 미스가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대로 실점하고 패배했다면 베르마엘렌에게 엄청난 비난이 가해졌을 것이었다.
“뭘, 이 정도로. 나도 챔피언스리그 본선 가고 싶어서 막은 것뿐이니까 고마워할 건 없다.”
당연히 베르마엘렌을 살리기 위해 막은 건 아니었다.
실점과 패배를 막기 위해 열심히 뛰다 보니 어떻게 막아낸 것일 뿐.
‘물론 뭔가 해주고 싶다면 막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베르마엘렌이 고마워하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고마우면 고마워하면 되는 거고, 고마워서 뭔가 해주고 싶다면 이쪽도 고맙게 받을 것이었다.
“주의 결정적인 슈퍼 세이브가 나왔습니다! 코펜하겐, 정말 절호의 찬스를 놓쳤습니다!”
“경기 종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조금만 더 집중해서 플레이해주었으면 좋겠네요. 확실히 기량에서는 아약스가 한 수 위거든요? 방심하면 안 돼요!”
지금의 위기는 결국 아약스 선수들의 방심이 초래한 것이었다.
수세에 몰린 것처럼 수비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내준 적도 없고, 무난하게 수비해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약스 선수들을 방심하게 만들었고, 베르마엘렌의 패스 미스와 이어지는 위기를 초래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오늘 경기 지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야! 지키기로 했으면 끝까지 정신 차려! 종료 휘슬 울릴 때까지!”
스탐이 나서서 선수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당연히 분위기가 점점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었다.
이럴 때, 스탐의 존재는 아약스의 어린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고, 선수들의 눈빛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이런 건 안 통해.’
크비스트가 성배의 앞에서 드리블을 치며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크비스트 정도의 선수가 시간에 쫓겨 억지로 시도하는 돌파에 뚫릴 성배는 아니었다.
“크비스트의 돌파가 주에게 가로막힙니다! 간단한 태클로 돌파를 저지하는 주성배! 길게 걷어냅니다!”
-삑! 삐--익!
크비스트의 돌파를 저지하고 볼을 뺏어내 걷어낸 순간,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길게 울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아약스, FC 코펜하겐의 실버바우어에게 실점하며 0-1로 패배했지만, 원정 골 다득점 원칙에 따라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합류합니다!”
아약스는 코펜하겐에게 홈에서 0-1로 패배했지만, 1, 2차전 합계도 2-2로 동률이지만, 원정 골 다득점 원칙에 따라 가까스로 본선행에 성공했다.
“예상한 것보다 힘들게 본선에 진출했지만, 그래도 본선에 참가하는 건 똑같거든요? 일단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 참가하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아약스가 챔피언스리그 본선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정말 힘들게, 가까스로 본선 진출에 성공하며 케이테 감독은 감독 부임 직후부터 경질설에 시달릴 필요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경기력이면 더 이상은 힘들어요. 한 수 아래의 코펜하겐을 상대로 너무 고전했거든요? 사실 주성배 선수의 슈퍼 세이브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바로 짐 싸서 돌아갈 뻔했어요.”
확실히 코펜하겐과의 3차 예선에서 보여준 아약스의 경기력은 문제가 있었다.
경기력의 문제인지 감독 전술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두 번째 골을 실점하고 탈락하기 직전에 성배의 말도 안 되는 플레이로 기사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케이테 감독은 조별리그가 시작될 때까지 팀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도 아직 조별리그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3주 정도 되는 그 시간 동안 아약스에게 주어진 숙제는 적지 않은 듯했다.
***
- 코펜하겐한테 쓰리백?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홈에서 패배하고 조별리그 진출이라니. 쪽팔린다, 진짜.
- 아무리 실점만 안 하면 다음 라운드 진출이라고 해도 그렇지, 코펜하겐한테 텐 백을 쓰냐? 도대체 케이테 감독은 아약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체적으로 코펜하겐 전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약스의 자긍심인 공격 축구를 버려가면서까지 조별리그 진출에 목을 걸어놓고도 패배했고, 슈퍼 세이브가 나와서 다행일 뿐, 실질적으로는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상황.
팬들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남는 장사 했네.’
다만, 성배에게는 나쁘지 않은 경기였다.
괜찮은 활약을 펼쳤고, 후반전에는 답답한 아약스의 수비 축구 속에서 눈에 띄는 돌파도 한 번 보여주었고, 결정적으로 탈락의 위기를 막아내는 슈퍼 세이브도 보여주었다.
아약스 팬들에게 확실히 자신을 인식시키는 것에 성공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았다.
- 진짜... 이번에 새로 영입한 주성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 주성배 아니었으면 여기서 탈락할 뻔했어. 아약스가 챔피언스리그 예선 탈락이라니... 그 꼴은 안 봐서 다행이네.
- 솔직히 난 어비를 뺐을 때, 주를 빼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어비를 오래 봐서 그런지, 어비에게 더 마음이 가더라고. 그런데 주가 슈팅을 막아냈을 때, 어비는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더라.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
‘확실히 그 플레이는 멋있었지.’
생각보다 빨리 팬들의 뇌리에 확실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의 예상으로는 팬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으려면 최소한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운이 좋고 상황이 만들어져 리그 개막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시작은 괜찮네. 결국, 조별리그에 진출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결국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번 코펜하겐과의 경기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 시즌을 치르는 중에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좀 지나치게 수비적이야.’
감독의 성향 때문이었다.
솔직히 코펜하겐 정도의 클럽을 상대할 때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아약스의 전력으로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아약스가 한 골을 넣어 훨씬 더 편하게 경기를 운영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우리 쪽에서 너무 기회를 줬어. 볼을 계속 넘겨줬는데, 공격 기회를 내주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
수비적으로 운영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6:4 정도로 점유율에서 앞섰던 아약스였다.
수비적으로 운영한 이후 반대로 4:6 정도가 되었고, 그전까지는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위기를 두 차례 정도 더 겪어야 했다.
‘엄밀히 말해서 감독의 전술 변화는 실패였어. 내가 막은 것도 운이 좋았던 거지, 실점이나 마찬가지야.’
코펜하겐과의 1차전은 자신이 직접 뛰지 않아 모르겠지만, 2차전은 확실한 실패였고, 졸전이었다.
베르마엘렌의 실책까지 감독이 예상할 수는 없었겠지만, 베르마엘렌의 실수가 나온 이유는 감독 때문이었다.
홈팬들에게까지 야유를 받는 전술적 변화가 선수들을 흔들었던 것이었다.
‘책상 앞에서 전술만 잘 짜는 감독은 필요 없어. 선수들의 성향과 팀의 성향, 팬들의 성향까지 파악해서 유연하게 운용해야지. 초보 감독에게 이런 것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인가?’
최강팀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에서 수석 코치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초보인 케이테 감독이었다.
기타 요소들을 감안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책상 앞에서 만들어낸 전술만을 고집한다면 앞으로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었다.
‘제발 같이 성장합시다. 감독님.’
지금까지 본인과 관계된 것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성배였다.
하지만 선수의 성장 등에 있어서 감독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쓰리백으로 전환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만약 케이테 감독이 쓰리백에 꽂혀서 전환하기라도 하면 최악이었다.
최악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엠마누엘슨과 치열하게 또 경쟁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풀백이 아닌 윙백으로 뛰어야 했다.
앞으로 쓰리백은 거의 10년간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좋을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쓰리백을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쓰리백을 선택한 코펜하겐전.
그리고 훈련에서 가끔 진행하는 쓰리백 훈련.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낭만필드 - 07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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