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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75화 (50/356)

< 낭만필드 - 075 (3권) >

‘이거 많이 안 좋은데...’

카자흐스탄과의 유로 2008 예선 A조 1차전, 벨기에 대표로 경기에 나선 성배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굳어갔다.

‘카자흐스탄은 무조건 잡아야지. 뭐하는 거야, 이게.’

폴란드, 포르투갈, 세르비아와 한 조에 속한 벨기에였기에 카자흐스탄은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벨기에 대표팀은 위의 세 팀과 비교하면 한 수 아래였고, 이변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하위권 팀들, 핀란드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카자흐스탄을 상대로는 승점 3점을 얻어내야 했다.

“더 올라가!! 수비라인 올리라고!!”

벤치에서 감독도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을 알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중이었다.

분위기는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라인까지 바짝 올려서 득점을 노리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뱅상! 나 올라간다!”

“오케이!”

콤파니에게 백업을 부탁한 성배도 공격진영으로 움직였다.

오른쪽 풀백인 호프킨스는 본래 중앙 수비수 출신으로 공격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공격력이 괜찮은 성배가 뭔가 해줘야 했다.

“반더레이켄 감독이 포백라인을 하프라인 부근까지 올렸습니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득점을 노리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죠! 센터백을 빼고 스트라이커까지 투입하면서 공격적인 판단을 내렸는데, 수비라인은 너무 늦게 올렸어요. 어떤 선택을 했으면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어야죠.”

벌써 경기 종료까지는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로 예선 첫 경기, 그리고 브뤼셀에서 펼쳐지는 홈경기였기에 해설진이나 팬들이나 초조해 하고 있었다.

‘유로 2008에 큰 욕심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 경기는 지면 안 되지.’

성배가 선발로 출전한 첫 A매치였다.

출발이 중요한데, 첫 선발 출전 경기에서 한 수 아래의 팀과 무승부를 거두고 싶지는 않았다.

‘공간은 일단 생겼다. 볼이 연결만 되면 되는데.’

측면 공격수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센터백 베르마엘렌을 빼고 스트라이커인 피에로니를 투입하며 중앙 공격 자원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공격은 주로 중앙에서 이루어졌고, 카자흐스탄의 측면 수비가 헐거워졌다.

‘타이밍 싸움이다.’‘

풀백이 오버래핑에 있어서 타이밍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무시할 정도의 스피드나 피지컬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성배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고, 성배의 오버래핑은 항상 타이밍과 공간 활용이 핵심이었다.

‘좋아, 뭔가 설계는 된다.’

볼이 오른쪽으로 흘러갔다가 점점 중앙으로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수비라인이 오른쪽으로 한 번 크게 움직였고, 성배의 왼쪽 라인에 공간이 생겼다.

‘지금이다!!’

뒤쪽에 빠져있었던 성배는 타이밍이라 판단하고 스피드를 끌어올려 침투하기 시작했다.

데푸르가 볼을 받았다가 살짝 중앙 쪽으로 이동해있던 구어에게 볼을 넘기는 시점이었다.

“주!! 빠르게 침투, 측면으로 파고듭니다!!”

뒤에서 숨어있다가 순간적인 침투로 상대 풀백을 따돌리는 것이 성배의 주 무기였고, 이번에도 통했다.

상대 수비수를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지만, 어깨를 먼저 집어넣을 순 있었다.

‘박스 안쪽이 비었다!’

페널티박스 측면의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빈공간이 있다면 무조건 중앙으로 이동하는 게 좋았고, 곧바로 급제동을 걸면서 박스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구어가 찔러줍니다!!”

박스 안쪽으로 들어온 성배에게 구어가 패스를 시도했다.

시간 관계상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였다.

‘마크가 꽤 타이트한데...’

하지만 박스 안쪽까지는 어떻게 침투했다고 하더라도 볼을 넘겨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수비 숫자가 너무 많아.’

수비에 집중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이었기에 모든 공격수가 한두 명 정도의 수비수들을 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볼은 성배의 발밑으로 이어졌고, 볼을 받기 전까지도 다음 플레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일단 찔러보자.’

확실한 루트는 없었다.

방법은 그저 가장 확률이 높을 것 같은 위치로 볼을 찔러주는 것뿐일 것 같았다.

‘좋아, 이걸 기다렸다고!’

그때, 성배는 유니폼 등 부분이 늘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침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기다려왔던 느낌이었다.

‘잡아당길 생각은 없다, 이거지?’

유니폼이 늘어나는 느낌은 있었지만, 몸이 뒤로 당겨지는 느낌은 없었다.

당황해서 손을 쓰기는 했지만, 페널티킥을 내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수비수 입장에서 어떤 기분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다!’

성배는 그대로 몸의 중심을 뒤로 옮기며 그라운드 위에 드러누웠다.

“심판!! 파울!!”

그리고 넘어지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두 팔을 벌려 주심을 향해 파울임을 어필했다.

-삐-익!!

그리고 휘슬이 울렸다.

아직 주심이 판정을 내리진 않았지만, 성배는 페널티킥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제대로였어.’

넘어지는 순간, 흘깃 바라본 상대 수비수의 손은 가슴께에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널티킥!! 페널티킥이 선언됩니다!!”

“잡아당겼죠! 이건 페널티킥이에요!”

성배의 예상대로 주심은 페널티스팟을 손으로 가리켰다.

페널티킥이었다.

“이게 어떻게 페널티킥입니까! 시뮬레이션 액션입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어요!! 그냥 손만 닿은 거라고요!!”

당연히 카자흐스탄 선수들이 일제히 주심에게 몰려들어 항의하기 시작했다.

경기 막판이었고, 이미 주도권은 벨기에 쪽으로 넘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점은 곧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거의 다 잡았던 승점 1점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주심의 결정은 내려졌다.

“보시면 스마코프 선수가 주성배 선수의 유니폼을 잡아당긴 것이 보이거든요? 유니폼 등 부분이 늘어난 것이 보이죠?”

슬로우 모션으로 확인하는 중계진들도 수비수가 잡아당겼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들이 벨기에 쪽 중계진이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만큼 육안으로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타이밍이 완벽했다고. 당사자가 아닌 이상 구별하기 어려울걸.’

일반적으로 수비수들은 상대 선수나 유니폼을 잡았을 때, 진짜로 힘을 가했든, 가하지 않았든 자신이 파울하지 않았음을 어필하기 위해 손을 뒤로 빠르게 빼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성배는 그렇게 손을 빼는 타이밍에 맞춰서 뒤로 누웠다. 유니폼을 살짝 잡았다가 손을 빼는 동작이 잡아당기는 동작으로 보이게 된 것이었다.

‘당신도 혼란스럽겠지. 진짜로 잡아당긴 것 같아서.’

성배의 유니폼을 잡았던 상대 수비수도 성배의 액션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이 유니폼을 잡았던 것도 사실이었고, 손을 뒤로 당기는 그 순간에 성배가 뒤로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다.’

성배도 당해본 플레이였다. 당했을 때는 기분이 더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경험을 해봤던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훌륭해! 멋진 침투였어, 주.”

“키야, 공격수들보다 낫네! 이런 플레이라니!!”

지난 시즌 왼쪽에서 호흡을 맞췄던 구어와 짧았던 U-19 대표팀 시절 함께 뛰었던 데푸르가 달려와 성배에게 애정어린 손길을 나눠주었다.

답답했던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준 플레이였기 때문에 두 선수는 물론이고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달려왔다.

“키커 누구야?”

“나. 훗, 그래서 더 고맙다.”

딱히 슈팅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벨기에에서는 가장 페널티킥을 잘 차는 선수 중 한 명인 구어가 페널티킥을 차게 되었다.

주전 스트라이커인 뎀벨레가 아직 열아홉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중요한 상황에서는 서른세 살의 노장, 구어에게 페널티킥을 맡긴 것이었다.

“꼭 넣어. 못 넣으면 진짜 멀리 보내버린다.”

“이거 무서워서 페널티킥 차겠나... 슬프다!”

카자흐스탄 선수들의 항의도 수그러들었고, 슬슬 경기가 재개되는 분위기였다.

“잘 차! 꼭 넣어야 된다? 알지? 부담은 갖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지냐!!”

수비형 미드필더 시몬스가 볼을 가져다 주면서 또 한 마디를 보탰다.

구어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차라. 너도 페널티킥 잘 차잖아?”

“하하, 나는 경기 시간이 80분을 넘어가면 발끝이 세모로 변하는 병이 있어서. 미안!”

시몬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스 바깥으로 나갔다.

“저기, 주?”

“난 슛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성배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구어가 볼을 들고 페널티킥을 준비합니다. 아, 크게 한숨을 쉬는 모습입니다.”

시몬스와 성배에게 정신 공격을 당하고 한숨을 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거예요. 정말 중요한 페널티킥이거든요?”

페널티스팟에 볼을 가져다 놓은 구어는 다시 천천히 볼에서 멀어졌다.

뒷걸음질 치던 구어가 곧 멈춰 섰고,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물었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은 물론이고 이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까지도 조용히 구어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삐-익!

“구어, 도움닫기! 슈팅! 골!! 골입니다!!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벨기에가 드디어 선취골을 득점합니다!! 벨기에 1! 카자흐스탄 0! 벨기에가 리드를 잡아나갑니다!!”

앓는 소리를 하며 약한 모습을 보였던 구어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완벽하게 상대 골키퍼를 속이며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득점이자 리드를 잡아나가는 득점, 그리고 승기를 잡아오는 득점이었다.

“페널티킥을 얻어낸 주성배 선수의 침투가 정말 좋았어요. 이 선수, 분명 크게 될 것 같네요. 중요한 순간에 활약할 줄 아는 선수는 클 수밖에 없죠?”

페널티킥을 얻어낸 성배에 대한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중요한 상황에 멋진 침투를 통해 승리를 가져온 성배의 플레이는 분명 작지 않은 임팩트를 안겨주었다.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종료 직전에 주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구어가 득점으로 연결하며 가까스로 승점 3점을 챙기는 데 성공한 벨기에입니다.”

“경기 내용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고 승점 3점을 얻어낸 건 똑같아요. 일단 예선 첫 경기에서 승리를 챙겼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네요.”

구어의 골을 마지막까지 지켜낸 벨기에는 1-0으로 카자흐스탄에 승리를 거두었다.

정말 가까스로 승리했고, 나중에 따지게 될지도 모르는 골 득실을 생각하면 아쉬운 결과였지만, 승점 3점을 얻어냈다는 것으로 일단 만족할 수 있었다.

특히나 경기 내용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무승부로 끝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그렇습니다. 일단 좋은 시작입니다. 이대로 탄력을 받아서 다음 달에 있을 아르메니아 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으면 좋겠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6년 만에 메이저 대회 본선 진출을 노리는 벨기에 대표팀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과연 내가 합류했다는 것만으로 결과가 바뀔까?’

다만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성배는 담담했다.

팀 게임이고, 한 명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는 크다고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가.

그 부분에서는 조금 부정적이었다.

‘열심히 뛰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유로 2008에 진출하면 좋지만, 진출하지 못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원래 진출하지 못하는 대회였기에 기대가 크지 않기도 했다.

성배의 목표는 여전히 같았다.

국가대표보다는 자신의 커리어가 더 중요했다.

< 낭만필드 - 075 (3권)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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