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73 >
이놈의 집.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암스테르담의 집을 나서며 성배가 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차도 있고, 땅덩이가 넓은 나라도 아니니 교외의 한적한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돈이 있어도 집을 못 구해. 젠장.”
사람이 워낙 많아서 집을 급하게 구하면 도저히 원하는 집을 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결국, 평소보다 조금 떠 빨리 집을 나섰고, 1등으로 훈련장에 도착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금부터라도 눈도장 찍어야지.’
성배가 합류하기 전에 아약스 선수단은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1차전을 치르기 위해 덴마크로 떠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늘이 아약스 선수단과의 첫 만남이었다.
집이 불편한 이유도 있지만, 이것 역시 일찍 출발한 이유였다.
“오랜만이네.”
가장 먼저 훈련장에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성배를 향해 한 선수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 거의 석 달 만인가?”
토마스 베르마엘렌.
성배와 같은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였다.
겨우 얼굴 두 번 본 사이라 그다지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안면이 있는 선수를 만난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있었다.
“이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
토마스 베르마엘렌, 얀 베르통헨, 토비 알더베이럴트, 톰 데 뮬.
아약스의 벨기에 선수 목록이었다.
이 중 톰 데 뮬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벨기에 황금세대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톰 데 뮬은 금방 사라지긴 해도 벨기에 국가대표를 경험하는 선수였다.
“그러게. 반갑다. 잘 지냈지?”
“잘 지냈지. 너야말로 장난 아니었던데? 베스트 일레븐 뽑혔더라. 축하해.”
주필러 리그에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성배도 성배지만, 전력이 강한 아약스에서 열아홉 살이었던 지난 시즌부터 주전급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한 베르마엘렌도 빠르게 이름을 알리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이름값만 놓고 보았을 때, 베르마엘렌이 반 수 정도 위에 있었다.
“어때? 자신은 있어?”
“자신 있지. 단장한테 들으니까 엠마누엘슨은 윙으로 올라간다며. 그럼 레프트백 자리는 내 거지, 뭐.”
지난 시즌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엠마누엘슨이 윙으로 올라간다는 건 확실한 정보였다.
단장이 직접 확인해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백업 레프트백이었던 베르마엘렌은 이번 시즌부터 센터백에 집중한다고 하니, 성배의 무혈입성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어? 나는? 나도 있다고, 하하.”
성배의 말에 베르마엘렌이 자신을 잊지 말라며 웃었다.
“너는 센터백에나 집중해. 거기가 네 자리니까.”
베르마엘렌의 스피드는 느린 건 아니지만, 풀백을 보기엔 애매했고, 크로스를 비롯한 킥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180cm대 초반의 신장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해도 점프력이 워낙에 좋았기 때문에 센터백이 훨씬 더 어울리는 선수였다.
“아아, 내 자리가 있을까? 즈데넥도 아직 건재하고, 욘도 있고, 심지어 이번에는 야콥까지 영입되었다고.”
지난 시즌 주전급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고, 지난 시즌 주전 센터백이었던 헤이팅아와 그리게라 중 한 명이 라이트백으로 옮겨가겠지만, 그 자리는 베르마엘렌의 것이 아니었다.
“하긴. 이번 시즌에도 로테이션으로 뛰어야겠네.”
성배도 그것을 인정했다.
라이트백으로 한 명이 옮겨가면서 생긴 센터백 자리는 베르마엘렌의 것이 아니었다.
“아아, 야프 스탐이라니... 그 대단한 분이 하필이면 왜 이번에 아약스에 오셨을까.”
야콥 ‘야프’ 스탐.
세계 최고의 수비수. 이 한 단어로 그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말네스카’ 라인에서 ‘스’를 담당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트레블의 핵심 공로자였던 그 선수가 은퇴를 앞두고 고국의 아약스로 합류한 것이었다.
“네 자리는 아마 그가 가지고 가겠지.”
그렇게 되면 베르마엘렌은 이번 시즌에도 주전 ‘급’ 로테이션 선수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거 이래저래 많이 배우는 수밖에.”
주전 도약의 시기는 늦어졌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와 함께 뛸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스탐 정도의 선수와 함께 뛸 수 있다면 1년 정도 늦는 것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너는 로테이션으로 열심히 뛰어라. 나 먼저 올라갈 테니.”
아약스에서 적당히 좋은 활약만 보여준다면 빅리그행 급행열차를 탈 수 있었다.
아약스가 워낙 유명한 유망주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한 시즌이고 두 시즌이고 상관없이 좋은 활약만 보여주면 오케이였다.
데뷔가 빨랐던 베르마엘렌보다 성배가 먼저 빅리그에 진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든지. 나는 무조건 높이 올라갈 거다. 늦어도 높이.”
“그래. 야콥, 욘, 즈데넥한테 최대한 많이 뽑아먹고 높이 가라.”
말이 필요 없는 레전드, 야프 스탐.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100경기 가까이 출전하게 될, 네덜란드의 한 시대를 풍미한 만능 수비수, 욘 헤이팅아.
얼마 후 유벤투스에서도 활약하는 체코 대표팀 수비수, 센터백과 라이트백을 소화하는 즈데넥 그리게라.
베르마엘렌뿐만 아니라 성배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너도 많이 뽑아먹어야지.”
이런 선수들과 함께 뛸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선수들에게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기회였고, 잘만 활용하면 순식간에 레벨업이 가능했다.
“뽑아먹으러 왔는데 당연히 뽑아먹어야지.”
성배가 아약스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이들과 함께 뛰기 위해서였는데, 당연히 최대한으로 뽑아먹을 생각이었다.
“누가 누굴 뽑아먹는다고?”
그때, 뒤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190cm가 넘는 거구가 위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누굴 뽑아먹는다고 한 거지, 지금?”
스탐이었다.
알아주는 파이터이자 성격 있기로 유명한 스탐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린 두 선수를 위협하기 충분해 보였다.
“야콥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겠단 뜻이죠. 저희가.”
다만, 성배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아온 선수였다.
겨우 덩치와 표정에 겁먹지 않았고, 할 말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어린 유망주들이 뛰어난 베테랑 선수에게 이것저것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흠... 깡은 있군. 그건 참 중요하지.”
다행히 스탐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어린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아약스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친구는... 나보다 욘을 빼먹는 게 더 낫겠군. 나는 작아 본 적이 없어서.”
베르마엘렌을 한 번 훑어보더니 스탐은 바로 헤이팅아에게 공을 넘겼다.
180cm에 불과한 베르마엘렌에게 자신의 플레이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이! 욘!”
스탐은 바로 헤이팅아에게 손짓했다.
“왜요?”
스탐의 부름에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달려온 헤이팅아였다.
“여기 이 꼬맹이가 자기 좀 제대로 가르쳐달란다.”
베르마엘렌의 표정은 어떻게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행히 헤이팅아와는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격의 없는 사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음? 안 그래도 지난 시즌부터 계속 옆에 두고 있는데요? 알아서 배워가라고.”
180cm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센터백을 주 포지션으로 하는 두 선수는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베르마엘렌이 RKC 발베이크에 임대를 갔다가 복귀한 지난 시즌부터 헤이팅아는 베르마엘렌과 붙어다니며 많은 노하우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마음에 안 드나 본데? 나한테 배우겠다고 벼르고 있어.”
아니, 자기한테 배우고 싶다는 게 어떻게 헤이팅아의 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삼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구경이라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막 합류해서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
“아이고, 야콥. 그건 당연한 거죠. 당장 저도 야콥한테 뭐 얻어먹을 거 없나, 하고 보는 중인데요. 난 또 무슨 중요한 일 있나 했네.”
“에이, 애들 좀 놀려보려고 했더니 이렇게 손발이 안 맞나. 눈치 없긴.”
다행히 헤이팅아의 눈치가 둔했던 덕분에 스탐의 장난은 여기서 끝이 났다.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던 표정도 여전히 무표정하기는 하지만 위압감은 없고 친근함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 너희가 요즘 유망하다는 벨기에산 수비수 유망주들이냐?”
“예. 맞습니다.”
베르마엘렌이 스탐의 표정에 잠깐 움찔한 이후, 어느새 성배가 두 사람을 대표해 말하고 있었다.
베르마엘렌은 아약스 유스 출신이고 성배는 이제 막 영입된 선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겨우 스무 살짜리와 함께 있는데 대화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전생이 억울하다고 뛰쳐나올 것이었다.
“왜 유망한 수비수들이 다 벨기에 애들이야? 네덜란드 애들은 없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치열한 라이벌로 유명했다.
역사적으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고, 두 국가 모두에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는 축구에서 항상 앞서나갔다는 것은 네덜란드인들의 자랑거리였다.
장난이었지만 스탐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요. 헤비헤스도 있고, 그레고리도 있죠.”
이후 발렌시아와 세비야에서 핵심으로 활약하는 헤비헤스 마두로, 리그앙 최강의 클럽으로 성장한 파리 생제르망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그레고리 반 더 비엘도 현재 아약스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것밖에 안 돼? 벨기에 애들은 얘들 말고도 그 얀이라는 애랑 토비라는 애도 있던데. 네덜란드 애들은 그게 전부?”
스탐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벨기에의 수비수 유망주들은 당장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만 해도 넷이었는데, 네덜란드 유망주는 겨우 둘이라니.
언제나 벨기에보다 앞서왔던 네덜란드의 레전드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게요. 이번에는 그렇게 되었네요. 이번 세대는 벨기에 쪽에 유망주가 더 많은가 봐요.”
콤파니와 반덴 보레부터 시작한 벨기에 유망주들의 출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선수 중에는 간헐적으로 대형 유망주들이 나왔지만, 90년대 이후 태어난 선수들이 주축이 된 벨기에 U-17 대표팀과 그 아래 대표팀에서는 이미 여러 명의 선수들이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너, 잘해라. 네 세대에서 만약 벨기에한테 밀리면 알아서 하라고. 내가 찾아와서 응징해줄 테니.”
“아니, 그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 다른 선수들도 잘해야죠.”
“아니지. 내가 볼 때, 네가 다음 세대 주장이니까, 너에게 책임이 있을 거다.”
실제로 헤이팅아가 한동안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차기는 했다.
“음... 뭔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가만히 있어. 우리가 무슨 말을 해.”
그리고 그 앞에서 가만히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벨기에 유망주, 성배와 베르마엘렌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꼭 네덜란드는 이겨야겠다.”
“그건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나? 네덜란드는 이겨줘야 팬들이 좋아하고 욕을 안 먹으니 당연히 이기는 거지.”
베르마엘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배 역시 네덜란드에게는 꼭 이기고 싶었다.
그래야 세대교체라거나 새로운 얼굴 발굴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일들을 막을 수 있었다.
< 낭만필드 - 07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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