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72화 (47/356)

< 낭만필드 - 072 >

“릴이라고요?”

버크만의 전화를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성배였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을 열 때부터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예.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버크만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있는 소파로 향했다.

“아약스 못지않은 계약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릴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릴 OSC.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던 클럽이었지만, 2000/01시즌 승격 직후 3위를 차지한 이후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승격과 강등을 반복했기에 당연히 재정이 풍족할 수는 없었다.

네덜란드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챔피언스리그에 꾸준히 출전한 아약스와 비슷한 조건이라면 훨씬 무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릴에는 지금 양쪽 풀백 모두 아쉬울 것 없는 클럽 아닙니까?”

그레고리 타포로우와 마티유 샬메.

양쪽 풀백 포지션은 릴의 확실한 장점 중 하나였다. 두 선수 모두 팀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크고 특히 레프트백인 타포로우는 팀에서 주장을 맡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라이트백인 샬메를 지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모양입니다. 제가 볼 때는 아무래도 주성배 선수를 라이트백으로 활용하려는 것 같습니다.”

성배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멀티 포지션 소화능력이었다.

레프트백으로 활약하는 것만큼 라이트백으로도 활약할 수 있고, 아쉬운 대로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한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시장에 라이트백 매물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왜 저를...”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레프트백에 비해 라이트백 포지션은 매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왼발보다는 오른발을 잘 쓰는 선수들이 많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몇몇 선수들을 찔러보고 있는 듯합니다. 몇몇 선수들의 에이전트와 연락했더니 이미 제안을 받은 선수도 있더군요.”

그럴 수밖에.

라이트백으로도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주전으로 소화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렇겠죠.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클럽이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모험을 걸지는 않을 테니.”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여러 포지션에 활용할 수 있는 성배를 노리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냥 진행합니까?”

“글쎄요. 굳이 벌써부터 딱 자를 필요는 없겠지만, 마음에 좀 걸립니다. 주전으로 활약할 수만 있다면 릴 쪽이 더 좋은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프랑스 리그앙.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확보한 클럽.

조건으로만 따지면 릴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다만, 주전 레프트백으로 뛰기 힘들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레프트백으로서 주가를 높일 때라고 봅니다. 라이트백보다도 더 귀하니까요. 지금 괜히 조건 따라서 라이트백으로 뛰었다가는 인식이 그렇게 굳어질지도 모릅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레프트백으로 확실한 이미지를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지난 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는 해도, 중소리그에서의 활약이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도 겨우 여섯 경기 가지고는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고 말하기 아쉬웠다.

“그건 그렇습니다. 아직은 원래 포지션에서 입지를 다지는 게 중요한 시점이죠.”

버크만도 성배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귀화 선수 출신으로 프랑스어권에서 활동하다가 네덜란드로 옮겨가서 활약했다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건 생각 못했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 선발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고, 이래저래 얻을 수 있는 게 많아 보입니다.”

벨기에는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의 갈등이 심한 나라였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다시 네덜란드로 국가의 주도권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는 국가대표팀도 마찬가지였고, 이럴 때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귀화 선수의 등장은 큰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아약스가 좋겠습니다.”

“하아, 근데 리그 수준이 너무 아쉽습니다. 아약스를 제외한 에레디비지에의 뛰어난 윙어라고 해봤자 아이사티나 아펠라이, 파르판을 비롯해서 열 명이 채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약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조건은 성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리그 수준의 문제는 여전히 아쉬웠다.

“하지만 프랑스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인 수준이 조금이나마 나으니까요. 뭐, 그건 어쩔 수 없겠죠. 전부 다 만족할 수는 없으니.”

프랑스도 리옹이나 마르세유 등 몇몇 클럽을 제외하면 뛰어난 윙어를 보유한 클럽은 몇 없었다.

프랑스 리그의 특징이 특징이다 보니, 상대 팀의 수준 높은 공격 작업을 경험하는 것도 어려웠다.

보통은 막싸움이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럼 아약스를 최우선으로 협상하겠습니다. 다른 클럽들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특별히 아셔야 할 것이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예. 언제나 그랬듯이 저만 믿고 계시면 됩니다. 최대한 좋은 계약으로 안겨다 드리겠습니다.”

이번 이적시장에서는 생각만큼의 업그레이드가 힘들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아약스 정도면 유럽에서도 꽤 먹어주는 클럽이고, 벨기에 국가대표 생활에서 그라운드 바깥에서의 메리트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할 것 같았다.

‘토마스, 얀이랑 호흡을 맞춰볼 수 있다는 것도 이득이고.’

토마스 베르마엘렌과 얀 베르통헨. 그리고 토비 알더베이럴트까지.

향후 벨기에 황금세대의 주축 수비수가 될 선수 중 세 명이 아약스에 속해있었다.

콤파니와도 호흡을 맞춰보았던 성배이기 때문에 아약스로 이적하기만 한다면 벨기에의 핵심 수비수들과 모두 호흡을 맞춰본 선수라는 타이틀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지금은 아약스가 가장 나은 선택인 것 같네.’

어느 정도의 아쉬움은 있지만, 모든 욕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 확신했다.

***

[계약 조건]

급료      : 주급 14,500유로 (약 2,200만 원)

계약 기간 : 이적이 성사된 날 - 2010년 6월 30일

계약금    : 20만 유로 (약 3억 원)

부가 옵션

출전 수당 : 2,000유로 (약 300만 원)

승리 수당 : 3,500유로 (약 525만 원)

연간 20% 급료 인상 보장

“좋습니다. 앞으로 좋은 활약 부탁합니다, 주성배 선수. 늦어도 2년 안에 이곳을 벗어나야죠.”

“얼마든지요.”

2006년 8월 초, 성배는 아약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마지막까지 아약스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과 경쟁력 있는 전력을 갖춘 클럽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급은 안더레흐트 시절보다 5배 정도 상승했고, 수당 역시 크게 올랐다.

승리하는 날이 많을 것이었기에 출전 수당을 줄이고 승리 수당을 높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다만, 바이아웃 조항을 넣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다.

“집은 어떠십니까? 정말 힘들게 구했습니다.”

“와, 진짜 토 나오겠던데요? 월세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전 세계에서 가장 집을 구하기 힘든 나라 중 하나가 네덜란드였고,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이 가장 심했다.

집을 무단으로 점거하더라도 24시간이 지나면 집주인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없다는 법을 악용한 스쿼터 족과 무시무시할 정도로 높은 인구밀도 때문에 암스테르담의 집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집이 좁기는 무지하게 좁은데 월세는 도대체... 와, 진짜 살 떨립니다.”

인구밀도와 집의 면적에 따라 기하급수는커녕 제곱으로 높아지는 세금 때문에 네덜란드의 건물은 거의 다 조그마했다.

그런데 월세는 월 수백만 원 수준.

오래 살 곳은 아니었다.

“네덜란드가 좀 그런 부분이 있죠. 1, 2년만 참으시면 됩니다.”

물가 자체가 살인적이었다.

프랑스와 비교해서 주급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뭔가 그 차이가 생각보다 적을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분위기는 좀 더 자유롭다니까 그건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 자체가 개방적이니까 시선도 좀 덜 느껴지겠죠.”

본국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식민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건너와 생활하는 것이 네덜란드였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다인종 국가이고, 그 덕분에 여러 문화가 섞여서인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그건 확실합니다. 벨기에와 형제 나라라고 볼 수도 있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른 편입니다.”

동성 결혼 합법, 매춘 합법, 마약도 부분적으로 합법인 데다가 TV에서 유흥업소 광고까지 하는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물론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오래는 못 살겠습니다. 후딱 이름값 올리고 떠납시다, 우리.”

그런 것들 다 더해도 결론은 오래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보다는 인종차별이 좀 더 심하다고 해도, 그냥 참으면서 살만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물가는 참으면서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주성배 선수가 자주 옮겨 다니시면 저야 무조건 좋지 않겠습니까? 계속 커미션이 떨어지는 데 말입니다.”

성배의 이적은 곧 버크만의 이익으로 직결되었다.

계약을 한 번 체결할 때마다 거기서 나오는 에이전트 수수료로 수익을 창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었다.

광고 계약이나 스폰서 계약 등도 짭짤했지만, 역시나 가장 큰 거액이 오고 가는 것은 재계약,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이적이었다.

“그게 바로 서로에게 윈-윈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조금 더 올라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이적하는 상황이 나오면 성배에게도 이득이었다.

어느 한 행위가 함께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니 조건만 맞으면 무조건 순식간에 추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언제나 말했듯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성배 선수의 활약이 먼저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휴식기 정말 충실히 보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라운드에 나서고 싶네요.”

지난 두 달 동안 정말 치열한 시간을 보냈던 성배였다.

다음 시즌, 정말로 자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라운드에 나가고 싶어 좀이 쑤실 정도였다.

“암스테르담 아레나... 정말 크네요. 반덴 스톡과 비교하면 두 배도 넘을 것 같습니다.”

아약스의 홈구장인 암스테르담 아레나.

유럽 최초의 개폐식 천장을 가진 천연 잔디 구장이자, 세계 최초로 지하 통로를 가진 구장.

그리고 5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이 구장이 앞으로 성배가 활약하게 될 곳이었다.

“참 멋진 구장입니다. 유럽 전체에도 이보다 더 멋진 구장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암스테르담 아레나를 올려다보며 버크만이 말했다.

“아뇨. 빅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클럽의 구장들은 다 이것보다 멋집니다. 설사, 지은 지 70년이 넘어 벽에 금이 간, 수용 인원이 2만 명도 안 되는 구장이라고 해도 이것보다 멋질 겁니다.”

그저 그런 클럽들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 빅리그에서 10년 이상 버틴 클럽들.

그런 클럽들의 구장은 분명 암스테르담 아레나보다 훨씬 더 멋질 것이었다.

< 낭만필드 - 072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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