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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71화 (46/356)

< 낭만필드 - 071 >

“우와!! 백조다!!”

백조를 본 유빈이가 운하를 향해 달려갔다.

네덜란드와 비슷하게 도시를 관통하는 운하를 가지고 있는 브뤼헤였고, 운하를 따라가며 브뤼헤를 여행하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오리도 있네. 근데, 백조 되게 꼬질꼬질하다. 히히.”

브뤼셀을 구경하고 프랑스로 넘어갔다가 다시 브뤼헤로 넘어와 겐트로 마무리하는 여행 일정은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입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대책이 없을 정도로 해맑은 모습을 되찾은 유빈이와 일상에 지쳐 퍼진 몸을 재충전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성배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유빈이는 입시 스트레스를, 어머니는 업무 스트레스를, 성배는 몸을 만드느라 얻은 스트레스를 털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기... 주성배 선수 맞죠?”

“아, 네.”

그러던 중 누군가 성배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젊은 부부인지 커플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남녀 한 쌍이었다.

“하하, 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벨기에를 여행하는 동안 몇 번 정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아무래도 벨기에 국가대표로 A매치에 두 번 출전했고, 주필러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나름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기 때문에 벨기에 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지 않았다.

“가족분들이신가 봐요?”

“예. 제 가족입니다.”

유빈이와 어머니는 성배가 팬과 대화를 나누자 살짝 떨어져서 백조와 오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슬슬 이동할 타이밍이라 팬에게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가족들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요.”

“아! 죄송합니다. 얼굴 보니까 반가워서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그럼 다음 시즌에도 좋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성배의 말에 오히려 팬이 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 그런 팬도 있지만 대체로 사생활 쪽은 나름 잘 지켜주는 유럽의 팬 문화는 마음에 들었다.

“우와! 오빠 프랑스어 진짜 잘하네!! 벌써 며칠째 보는 거지만 익숙해지지 않아.”

팬과 악수를 하고 돌아온 성배를 보는 유빈이의 시선이 강렬했다.

여행 내내 본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기한 듯했다.

“프랑스어 아니고 네덜란드어인데? 여긴 네덜란드어 지역권이라.”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싫어하는 걸 알지만, 머리카락을 또 헝클어뜨리면서 틀린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아악! 내가 머리 건드리지 말랬지!! 헤헤, 안 감았는데!”

뭐 어쩌라고.

안 감은 유빈이의 머리카락이나 바깥에서 몇 시간째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손이나.

어쩌면 손이 더 더러울지도 모르지.

“쳇, 손 치워! 프랑스어든 네덜란드어든 뭔 상관이야.”

회심의 일격이 통하지 않아 실망한 유빈이가 성배의 손을 찰싹하고 때리고는 머리를 정리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도 할 줄 알아? 대단하다. 벨기에에서 살면 그렇게 되는 건가?”

“글쎄? 못하는 선수들도 많지. 벨기에 사람들도 프랑스어권에서 사는 사람들은 네덜란드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잘 못 해. 내가 대단한 거지.”

전생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 지역인 안트베르펀에서, 현생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영어의 활용빈도가 높은 브리쉘 수도권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어 권에서도 네덜란드 어와 영어를 가장 잘하는 브뤼셀에서 생활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부럽다. 나도 외국어 잘하고 싶은데.”

확실히 한국 사람들은 외국어에 대한 환상이 컸다.

유럽 사람들, 특히 프랑스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아 했다.

점점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언어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나라 중 하나였다.

“너도 유럽으로 유학 오려면 배워야지. 어느 나라로 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유빈이도 이미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미리미리 조금씩이라도 배워놓을 필요가 있었다.

순수 미술이라면 독일이나 영국, 디자인 쪽이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벨기에 쪽이 괜찮았기 때문에 먼저 어디로 갈지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까. 그런데 아직 뭘 공부할지도 잘 모르겠어. 일단 영어부터 해놓으려고.”

하긴 지금까지 예고 입시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를 수도 있었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래. 계속 생각해봐. 입시 준비도 좋지만, 시간 있으면 잠깐씩이라도 뭘 하고 싶은지 깊게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오빠처럼 어느 날 안방 문 열고 들어가서, “저 벨기에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라는 거지?”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이 있으면 그게 좋지. 네 꿈에 대해 확신이 생기면 뭔들 못할까.”

확신이 있고 간절하면 분명히 길은 열릴 것이었다.

지금 자신도 확실한 꿈이 있었기에 맛대가리 없고 헛구역질 나오는 스테이크만 씹어가면서 하루종일 몸을 혹사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운하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한 이후, 여행 내내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다니던 유빈이가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 혜진과 성배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짝 떨어져서 소곤대며 대화했다.

“어,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요.”

그때, 성배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버크만이었다.

“네, 여보세요?”

[아, 주성배 선수. 버크만입니다. 통화 가능합니까?]

“예.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8월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이제 성배도 슬슬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되고 있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살짝 곤란해졌다.

[아약스, 랑스, 모나코와 일단 협상을 진행 중인데, 조건의 차이가 좀 큽니다. 아약스가 내민 조건이 훨씬 더 좋습니다.]

에레디비지에와 리그앙,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규모를 생각하면 리그앙의 중상위권 클럽인 랑스, 모나코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을 연고지로 두고 있는 네덜란드 최고의 클럽, 아약스는 몇몇 클럽을 제외하면 리그앙 소속 클럽들보다 훨씬 더 재정이 탄탄했다.

리그 내에서의 위상도 위상이지만, 매년 빠지지 않고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아약스와 유로파리그도 간당간당한 리그앙의 두 팀은 비교부터가 무리였다.

“차이가 많이 큽니까?”

[예. 협상을 마치면 아약스는 대략 15,000유로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랑스랑 모나코는 올려봐야 12,000에서 13,000 정도일 것 같습니다.]

지금 받는 주급이 2,880유로이니 지금 받는 주급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연봉으로 따지면 2억 이상의 차이.

주급에서 저 정도로 차이가 나면 기타 옵션들에서도 꽤 차이가 날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리그 수준의 차이가 있어도 리그앙을 선택하긴 힘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약스 쪽으로 무게를 두고 협상하죠.”

[예. 그럼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왕이면 리그앙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확실히 프랑스 리그앙은 리그 수준에 비해 규모가 너무 작았다.

유럽 빅리그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이 적은 17,000의 평균 관중 수와 그에 따른 작은 경제 규모 등이 리그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카타르가 파리 생제르망을 인수하기 전에는 리그앙도 참 힘들겠네.’

리옹이 5연패를 달성하고 앞으로 두 시즌 더 우승하게 될 현 상황은 프랑스 리그앙의 암흑기라 볼 수 있었다.

독일을 끌어내리고 유럽 리그 랭킹 4위 안에 들어가며 랭킹으로는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지만, 점점 리옹과 다른 클럽의 승점 차이가 벌려지면서 치열한 순위 경쟁이 펼쳐진다는 리그앙의 장점이 사라지는 중이었다.

‘리그앙의 경기들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봤는데, 인연은 없을 것 같아서 아쉽네.’

서로가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리그앙의 클럽들.

그런 식의 전술을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아들!! 뭐해?”

“오빠! 빨리 가자! 초콜릿 사러 가야지!!”

전화를 끊고도 생각에 잠겨 있던 성배는 혜진과 유빈이의 외침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고민은 내일부터 하고, 남은 이틀은 여행에 집중하자.’

“네, 가요!”

***

“밥 잘 챙겨 먹고, 굶지 말고. 몸 만드는 것도 좋은데,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열흘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새 휴가 마지막 날이었고, 혜진과 유빈이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네. 알았어요. 이제 시즌도 시작하니까 슬슬 식단도 다시 관리해야죠.”

한 달이 넘도록 지금과 같은 식단을 유지했던 성배도 이제 슬슬 정상적인 식단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한 피지컬 성장을 이루었고, 시즌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체력 관리도 필요했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 정도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엄마가 굳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야.”

여행도 여행이지만 지난 열흘 동안 성배의 생활을 관찰한 혜진은 걱정이 싹 사라진 것을 느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멀리 떨어져 생활하면서 생긴 걱정거리들을 모두 사라지게 해주었다.

“너도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아버지도 집에 잘 안 계시니까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알았지?”

성배의 시선이 벌써부터 울고 있는 유빈이에게로 향했다.

“내가 애야? ...오빠나 잘해. 그 맛없는 거 그만 먹고...”

그래도 좀 컸다고, 그리고 일 년에 겨우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다고 그런 것인지 오빠를 애틋하게 생각해주는 느낌이었다.

“하하, 많이 컸네. 오빠 걱정해줄 줄도 알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서로를 걱정해주는 남매.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도 미술 공부 열심히 하고. 영어 공부도 틈틈이 하고, 나중에 뭘 하고 싶은지, 어디서 공부하고 싶은지도 깊게 생각해봐.”

“네가 아빠야, 엄마야? 돈 버는 건 그렇다 쳐도 우리 할 일까지 뺏지는 말아 줄래?”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은 성배의 모습이 기가 찬 혜진이었다.

누가 보면 엄청나게 동안인 아버지인 줄 알 것 같았다.

“하하하, 또 일 년 동안 못 본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네요.”

“너는 너만 신경 써.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잘 사니까 걱정하지 말고.”

“에이. 이렇게 만났으니까 이러는 거지, 한국 들어가시면 평소에 별로 생각도 안 해요. 저 사는 게 바빠서.”

실제로 이제 시즌에 돌입하면 가족 생각할 시간도 별로 없을 것이었다.

벨기에로 건너온 이후부터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빠서,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바빠서 가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가 없었다.

“잘하는 거야. 지금은 네 인생을 보고 바쁘게 살아야지.”

“그래, 맞아. 오빠는 오빠 일 열심히 해. 나도 내 일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용돈이나 많이 주면 되지, 뭐.”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응원에 큰 힘을 받은 느낌이었다.

특히 유빈이의 응원이 특별했다.

어머니야 언제나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와 함께 자신이 쉴 수 있는 포근한 안식처 역할을 해주셨지만, 어느새 유빈이도 많이 커서 오빠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알았다, 아가야. 열심히 할게. 아가도 돌아가서 열심히 해. 나중에 전화해서 어머니께 확인해볼 거야.”

“아가라니!! 나 다 컸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함?”

그래서 괜히 더 아기 취급을 하게 되었다.

마흔 살이 다 된 오빠를 위로하려 들다니.

아직 천 년은 일렀다.

“에구, 비행기 놓치겠다. 그럼 우린 이제 갈게.”

“네, 어머니. 들어가세요.”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 조금 더 지체하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건강해. 건강이 최고야. 성공보다도 건강이 먼저야. 알았지?”

“알았어요, 어머니. 어머니도 건강하시고요. 이제 몸도 챙겨가면서 일하세요.”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눈물을 참아내지는 못한 혜진이었다.

성배와 마지막으로 이별의 포옹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이었다.

“히잉, 전화 자주 해? 알았지?”

“알았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좋고 입시도 좋지만, 너도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말고. 즐겁게 해, 즐겁게.”

유빈이도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네 번째 이별이지만, 역시 가족과의 이별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내년에 또 봐! 잘 있어, 안녕!”

“오빠, 안녕!!”

마지막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든 세 사람이었다.

성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몇 분이 지나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버크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아, 주성배 선수! 좀 급한 일이 생겼는데, 시간 되십니까?]

“예. 지금 괜찮습니다. 방금 어머니를 배웅해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가족들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걸려온 전화라니.

급한 일이 지금 생겨서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사무실로 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한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인 버크만이 말을 이었다.

[릴에서 아약스 못지않은 계약을 제시했습니다.]

< 낭만필드 - 07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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