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67 >
“지금까지 꽤 많은 클럽에서 관심을 보이는 중이고, 적지 않은 클럽에서 구체적으로 이적 제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들이 오기 전에 급한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버크만과 약속을 잡아야만 했다.
“참 다행이네요.. 이적하고 싶은데 저를 원하는 클럽이 없어서 이적하지 못하면 꽤 슬펐을 텐데 말입니다.”
다행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될 것 같았다.
물론, 지난 시즌의 활약으로 자신을 원하는 팀들이 많을 것이라 기대는 했지만, 실제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았다.
“이제 중요한 건 어느 리그, 어느 클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가장 활약하기 좋은 곳으로 이적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적을 선택했을 때부터 생각해놓았던 조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분류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곳이 최우선입니다. 물론, 클럽과 리그 수준도 감안해서요.”
선발로 뛴다는 것.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조건이었다. 성배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조금 더 수준 높은 경험이었고, 이는 경기에 최대한 많이 나가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직 젊은데, 빅클럽에서 월드클래스의 선수들을 보고 이것저것 흡수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린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향하는 이유는 돈과 시설, 생활 수준, 그리고 동료들의 수준이었다.
당장 주전으로 뛰지는 못하더라도 몇 년 정도 백업 역할로 실력과 경험을 쌓아 다시 주전 자리를 노리려는 것이었다.
“아뇨. 저는 지금 당장 주전으로 뛰고 싶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훈련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수준은 지났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얻은 피지컬과 스피드를 제외하더라도 이미 전생의 기량을 뛰어넘은 성배였다.
이미 전생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자신이었다.
훈련으로 크게 성장하기는 이미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이 아쉽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열 장 정도 되는 A4용지를 손에 드는 버크만이었다.
“그게 뭡니까?”
“UEFA 클럽 랭킹 20위권 이내의 클럽들이 보내온 겁니다. 주성배 선수를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이죠.”
조금 놀랐다.
물론, 문의한 클럽들 중 최소한 로테이션으로라도 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클럽은 두세 곳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대부분은 후보 선수나 미래를 위한 보험 정도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클럽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준다는 것이 기뻤다.
“별로 아깝지는 않습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1, 2년 안에 금방 갈 수 있을 텐데요, 뭐.”
중간 단계를 거치는 이유는 차근차근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중간 단계의 리그에서 만족할 리 없었고, 처음부터 생각해왔던 대로 프랑스나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중간단계 리그를 한 번 거치면서 한 번 더 가치를 높일 생각이었다.
“1, 2년이라... 이번에 이적한다고 해도 오래 계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예. 길어야 2년입니다. 2년 안에, 빅리그로 갈 겁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2년이라고 해봐야 스물한 살. 여전히 가치가 높을 때였다.
“다시 튕겨져 나온다고 해도 이 정도 클럽에 소속되었던 경력만으로 꽤 큰 메리트가 되지 않겠습니까?”
선수의 계획을 존중하지만, 마지막까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에이전트의 역할이라 믿는 버크만은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선수의 계획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자신의 일은 선수가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메리트 필요 없습니다. 과거에 한때나마 레알 마드리드에 소속되었던 선수? 몇 년 지나면 자기 기량따라 갑니다.”
성배는 무조건 기량이 기본으로 깔린 다음에 이름값, 에이전트 영업능력, 상품성 등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기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조건 선발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클럽을 찾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일단 이것들은 필요가 없겠고.”
성배의 생각을 확인한 버크만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옆자리에 던졌다.
미련은 없지만, 사람인지라 슬쩍 눈이 가기는 했다.
“아까우십니까?”
성배의 시선을 확인했는지 버크만이 웃으며 말했다.
“아깝지 않으면 거짓말이죠. 다만,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웠다.
지금 당장 저들이 내민 계약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사인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이제 실질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클럽 명단을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버크만이 다시 한 번 종이 뭉치들을 꺼냈다.
이번에는 조금 전에 꺼낸 것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일단은 지금에 집중해야지.’
아쉽기는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저 중 대부분은 그저 찔러보는 식에 불과했을 것이었다.
“그중에서 일단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연락한 클럽들은 일단 빼죠. 그런 곳으로는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데려가지도 않을 텐데, 시간 낭비 아닙니까?”
분명 저 리스트 중 절반은 그저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문의한 클럽들일 것이었다.
라이벌 클럽에서 성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어쨌든 같은 리그의 클럽에서 성배를 영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거나 하는 이유로 찔러 본 클럽들.
몸값을 조금이라도 올려서 다른 클럽의 전력 보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게 만들 목적으로 찔러 본 클럽들의 제안은 검토할 가치도 없었다.
‘이용은 해야겠지만.’
다만,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이용하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서 고맙기는 했다.
“이런, 저를 뭘로 보시고. 그런 클럽들은 이미 다 제외했습니다.”
이번엔 좀 놀랐다.
언뜻 보기에도 꽤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제 몸값이 비싸지 않다고 해도 그건 좀 많은 거 아닙니까?”
리그 내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배는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리그도 수준이 살짝 떨어지는 주필러 리그. 몸값은 비싸지 않았다.
“지금 주성배 선수의 예상 이적료가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금액은 빅리그 하위권 클럽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금액이지 않습니까?”
주필러 리그의 유망주들 이적료는 다른 리그에 비해 굉장히 낮은 편이었다. 당장 지금 시점에서의 유망주 시장인 에레디비지에와 비교해도 상당히 약했다.
주필러 리그보다 수준이 높은 리그라면 어지간한 팀들은 성배의 몸값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대략 300만 유로 정도까지는 이적료가 올라갈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150만 유로에서 200만 유로 정도가 될 것 같았는데, 작업이 생각보다 잘 먹혔습니다.”
300만 유로의 이적료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성배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음 시즌에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 반덴 보레의 이적료가 315만 유로였다.
데뷔 시기도 1년 정도 늦었고,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위상 차이가 꽤 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많이 따라잡았다고 볼 수 있었다.
“역시. 버크만과 함께하기로 한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네요. 감사합니다.”
성배의 기량과 활약상이 기본이 되어준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에이전트인 버크만의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언뜻 봐도 열댓 개 정도 되는 클럽이 진지하게 뛰어들었다는 뜻인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하하. 어디까지나 주성배 선수가 좋은 활약을 펼쳐주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런 활약을 보여준 선수를 데리고 이것도 못해내면 에이전트의 자격이 없는 거죠.”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리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러면 한 번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디, 한 번 볼까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영입을 희망하고 있는 클럽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현재의 전력과 재정, 이번 여름 전력 보강 계획 등을 살펴보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했다.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나름대로 분류를 해보려고도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제 사견이 들어갈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언뜻 살펴보니 소속 리그나 전력과 상관없이 뒤죽박죽되어 있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분류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었기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마음에 들었다.
“일단 이탈리아 클럽부터 빼죠.”
종이 무더기에서 일단 이탈리아 소속 클럽들을 골라내 옆으로 치웠다.
세리에A 소속 클럽 두 곳이 제외되었다.
“으음, 역시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인종차별은 유명하니까요.”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세리에A의 인종차별은 유명했다.
애초에 이탈리아 축구는 유럽에서 폐쇄적인 리그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게 선택지가 많은데 굳이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겠죠.”
두 장을 버리고도 열 장이 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안에서 세 장을 다시 골라낸 성배였다.
“아쉽지만... EPL도 일단은 빼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에 제외된 클럽들은 EPL 소속의 클럽이었다.
“EPL을 말입니까? 롱패스가 정확한 주성배 선수랑 잘 맞지 않습니까?”
EPL.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하고 최고로 쳐주는 리그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EPL이었다.
그런데 성배는 두 번째에 바로 EPL을 제외한 것이었다.
롱패스를 선호하는 EPL이기 때문에, 성배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겼던 버크만은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은 EPL에서 버틸만한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PL에서 활약하기 위해 피지컬이 중요하다는 것은 축구팬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이번 시즌부터 피지컬을 보완하기 위해 시간을 꽤나 투자했지만, 기본적으로 아직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치열하게 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작은 했지만, 아직 결과물이 나올 시점은 아니었고, 이 상태로 EPL로 건너가는 것은 무리였다.
“아쉽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면 할 수 없죠.”
“예. 일단은 이적할 클럽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니까요.”
좋은 클럽으로 이적하는 것.
당연히 성배도 이런 욕심이 있었다.
다만, 그것보다도 조금 더 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 남은 건... 스페인하고 프랑스, 네덜란드군요.”
성배의 손에 남아있는 종이의 주인들은 모두 위의 세 리그에 속한 클럽이었다.
EPL과 함께 1, 2위를 다투는 리그이지만, 피지컬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몸을 이용한 압박이 아니라 전술과 기술적으로 계산된 압박을 펼치기 때문에 성배에게 유리한 프리메라리가.
프랑스 리그앙과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는 EPL과 프리메라리가, 분데스리가, 세리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받아들인 두루뭉술함이 특징이었다.
유망주 입장에서는 덕분에 다른 리그로 진출하기 전에 살짝 맛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일단 이 중에서는 여기가 제일 끌리는데...”
성배의 손에 잡힌 한 장의 종이.
거기에는 빨간 동그라미 안에 웬 모자 쓴 남자가 그려져 있는 엠블럼이 찍혀 있었다.
< 낭만필드 - 06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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