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66 >
“그래서 이번에 이적하긴 할 거지?”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콤파니는 몇 주 째 이 질문을 달고 살았다.
“어. 일단은 그럴 생각이긴 한데... 모르지.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제 슬슬 때가 왔다고 생각한 성배도 이번에는 대답해주었다.
“역시. 너도 이번에 이적할 생각이군.”
“당연하지. 너도 나갈 거잖아?”
며칠 전 있었던 터키와의 친선 경기에 나란히 선발 수비수로 출전했던 두 선수였다.
터키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두 선수였기에 앞으로 국가대표 합류는 안정적일 것이었고, 국가대표급 선수를 원하는 클럽들은 이미 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 건데?”
콤파니가 물었다. 그렇게 궁금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왕 물어본 김에 물어보는 듯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제의부터 들어오고 그다음에 내가 선택하는 거지.”
물론, 가고 싶은 리그는 있었다. 하지만 일단 자신을 원하는 클럽들의 목록이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우선이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독일?”
전생에서는 함부르크로 이적했던 콤파니였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일단 던져보았다.
“응? 어떻게 알았어? 벌써 이야기가 돌고 있나?”
역시.
이번에도 콤파니는 분데스리가 쪽으로 진로를 잡은 듯했다.
“그냥 어디서 들었어. 에이전트한테 들었었나? 하여튼. 분데스리가라... 너라면 뭐, 어딜 가든 잘하겠지.”
수비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춘 선수가 콤파니였다. 리그 특성에 따라 피지컬을 중시하든 스피드를 중시하든 간에 어디서든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도 사실 네 소문을 여기저기서 듣긴 하는데, 전해지는 곳마다 이야기들이 다 달라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하, 버크만이 일을 잘하고 있구나.
일단 만족스러웠다.
“도대체 어디서 소문이 도는 거야?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정확한 사실은 나도 모르니까 그런 소문 듣지 마.”
콤파니야 워낙 유명한 유망주이고 많은 클럽들이 실제로 주목하고 있어서 의미 없는 언론플레이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적시장의 경험이 많지 않고 어리다고는 하지만 소문들을 하나하나 믿고 있는 것이 아직은 순진해 보였다.
“그러면 그 소문이 다 거짓말인 건가?”
떡밥을 물었으니 이제 줄을 풀어줄 때였다.
“전부 다 거짓말은 아니고. EPL 유명 클럽 몇 곳에서 제의가 오긴 했는데, 유망주로 보고 계약하려는 것 같아서 고민 중.”
이번 이적시장에서 벨기에 선수 중에는 가장 핫한 선수가 바로 콤파니였다.
콤파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있는 기자나 에이전트, 구단 관계자들이 한둘은 아닐 것이었다.
“아, 나도 그랬지. 몇몇 클럽에서 제의는 왔는데, 당장은 주전으로 뛰고 싶어서 거절하려고.”
당연하지.
지금 상황에서 돈 좀 있다는 클럽 중 콤파니를 찔러보지 않은 클럽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성공이 보장되고 센터백은 물론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가 가능한 스무 살의 유망주.
도대체 누가 탐내지 않을까.
잠깐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자신의 경쟁자는 콤파니와 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아니었으니까.
‘차근차근 가자. 나 같은 선수는 급하게 가면 탈 난다.’
언젠가. 언젠가는.
콤파니나 다른 정상급 선수들과 같은 위치에 서겠다는 욕심이 성배에게도 물론 있었다.
다만, 그들보다는 확실히 재능의 영역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게 해줄 성배의 가장 큰 무기는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는 노련함과 철저한 계획이었다.
지금 흔들리면 가장 중요한 무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
“어쨌든, 오늘 한 이야기는 다 비밀이다. 알지?”
속마음과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성배의 말투였다.
“당연하지. 이런 이야기, 함부로 안 한다.”
어련하시겠어.
어이없다는 듯 공기를 내뱉는 콤파니의 모습은 제법 믿음직스러웠지만, 이적시장 전략을 세우며 에이전트와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말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가 에이전트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기에 스무 살짜리 선수에게 이러한 소문을 끌어내는 것쯤은 손쉬운 일이었다.
‘콤파니가 내 생각보다 신중한 성격이 아니길 바라야지.’
비밀을 잘 지켜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이제 할 말은 다 했고, 콤파니가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돈도 많이 벌면서 차는 아직도 이런 거 타네.”
차 문을 열고 오르려던 순간, 성배를 향해 콤파니가 입을 열었다.
성배의 차는 유망한 프로축구 선수, 연봉이 2억이 넘어가는 선수의 차라고 하기에는 많이 소박했다.
“아, 지금은 돈이 별로 없어서.”
어차피 아직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 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위치이기도 했고, 성배 스스로가 차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좋은 차를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들고 있는 돈이 없기도 했다.
“음? 그 큰돈을 다 어디에 썼길래?”
성배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도 대략 30만 유로가 넘어서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받았으면서 돈이 없다는 성배의 말에 콤파니의 눈이 커졌다.
“묶여있지. 네 말대로 큰돈인데. 들고 있어서 뭐해?”
성배의 돈들은 생활비를 제외하면 거의 다 어딘가에 투자되어 있었다.
“허, 벌써? 빠르기도 해라. 얼마나 부자 되려고.”
이제 열아홉 살에 불과한 성배고 돈을 쓰지 않고 투자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선수들 중에는 중소리그에서 빅리그로 이적하면서 확 뛰어버린 소득을 감당하지 못하고 씀씀이가 헤퍼져 은퇴 시기가 다 되었을 때 정작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성배의 행동은 꽤 놀라웠다.
“무지막지한 부자가 될 거다. 나중에 페라리 한 대 사주지.”
어차피 먼 미래의 일.
기분 좋게 공수표 한 번 날려 본 성배였다.
"하하, 감사히 받도록 하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내가 잊어버릴 거라 기대하지도 말고."
콤파니도 기분 좋게 웃었다.
과거로 돌아왔는데, 굳이 돈을 모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니 돈을 모으기 위해 시간을 많이 투자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마우스 몇 번 클릭하고 한 십 년 정도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며 잊어버리면 그걸로 ‘부자 되기’는 끝.
성공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축구와 관련된 일들에 투자하고 있지만, 마우스 몇 번 클릭할 시간은 있었다.
***
[이번에는 안 들어올 거니?]
시즌이 끝났는데도 아직 귀국하지 않고 벨기에에 남아있는 성배에게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아마 늦게 가거나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이적을 노리고 있는 이적시장.
에이전트인 버크만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자신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으면 했다.
이적 준비에 직접 참여하려고 하니, 일이 끝없이 많아졌다.
[아유, 겨우 쉬는 건데 또 뭐 그렇게 일이 많아? 선수가 시즌 끝났으면 쉬는 거지.]
귀국하지 않는다는 성배의 말에 당연히 아쉬워하는 혜진이었다.
지난번 귀국 이후 1년을 보지 못했으니 어머니 입장에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번에 휴가 내셔서 유빈이랑 같이 놀러 오세요. 유빈이도 유럽 구경 한 번쯤은 해야죠.”
이제 곧 여름 휴가시즌이었다.
자신이 한국으로 만나러 가지는 못하겠지만, 어머니가 놀러 오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너무 비싼데... 너도 알다시피 공무원 월급이야 뻔한데 유럽 여행은 너무 비싸.]
거짓말. 성배는 웃음이 나왔다.
두 분 모두 20년 정도 근무한 5급 공무원이시고, 서울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청주에서 살아왔는데 그 정도 돈이 없을 리 없었다.
게다가 자식들 사교육도 그리 심하게 시키지 않았고, 자신은 혼자 벨기에로 나와서 오히려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아이고, 알겠습니다, 어머니. 여행비는 제가 부담할게요. 유빈이랑 어머니는 몸만 오세요. 아버지도 오실 수 있으시다고 하시면 미리 말씀해주시고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생을 살아봐서 노후의 부모님은 돈 걱정 없이 여유롭게 사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작 몇백만 원쯤 못 해 드릴 이유는 없었다.
[어머, 정말? 그럼 가야지!! 한 열흘 정도 가면 되나? 연차 붙이면 그 정도는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는데!!]
이렇게 기뻐하시는데.
자신이 연봉을 부모님께 맡기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따로 용돈을 챙겨드리지도 않았기에 거하게 선물 한번 해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생겨 오히려 다행이었다.
“일정은 며칠이 되든 상관없어요. 일주일도 좋고, 이 주일도 좋고, 한 달도 좋고요. 길어지면 저야 좋죠.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재밌게 놀 생각만 하세요.”
성배의 연봉은 당장 자신에게 가족을 부양하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여유롭게 부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를 쉬다 가시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요즘 유빈이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프랑스랑 이탈리아를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루브르 박물관을 가보고 싶다나?]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유빈이였기 때문에 미술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유럽 미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더더욱 오셔야겠네요. 그런데 유빈이 예고 입시는 괜찮겠죠?”
이번 생에서는 유빈이가 꿈을 이뤘으면, 꿈을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부딪힐 수 있는 곳까지 부딪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크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뭐, 열흘 정도 그림 안 그린다고 큰일 생기겠니? 안 그래도 재능이 있는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오히려 지금은 이런 경험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지.]
유빈이에게 재능이 있다는 소식에 성배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예고 입시를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에게 그 정도 평가를 들었으면 적당히 조절해서 들어도 예고 입시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았다.
“그러면 그쪽으로 도움되는 장소들도 많이 알아놔야겠네요.”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역시 과거 세계 최고의 문화를 자랑했고, 루브르 박물관 등을 보유한 프랑스가 좋을 것이고, 현재 유럽 순수 미술을 주도하는 독일이 지금의 미술을 공부하기에는 좋을 것이었다.
또, 순수 미술이 아닌 디자인 등의 파생 학문도 어느 정도는 공부해보는 것이 좋았다.
순수 미술은 현실적으로 돈을 벌기가 어려우니 일단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건 우리가 가기 전에 미리 알아보고 갈게. 너는 그냥 나중에 돈만 보내면 되지. 흐흐흐.]
“알겠어요. 어쨌든 정해지면 알려주세요.”
[알았어, 아들! 나중에 또 전화할게.]
이번 휴식기에는 가족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유럽으로 오신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그럼 일단 그전까지 급한 일들은 대충 마무리해볼까?”
여름 휴가시즌까지 한 달 정도 남은 시간, 그 안에 급한 일들은 대충 마무리해야 가족들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 낭만필드 - 06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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