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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64화 (39/356)

< 낭만필드 - 064 >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 기회가 찾아왔다.

추가 시간도 거의 끝이 보이던 스탕다르 리에쥬의 마지막 코너킥 상황이었다.

‘움직임이 거친데?’

단신 중앙 미드필더들에게 골포스트를 맡기고 콘세이상과 자리싸움을 펼치던 성배는 콘세이상의 움직임에서 무언가 징후를 느꼈다.

사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자리싸움을 펼칠 때는 이런저런 자잘한 파울들이 많이 오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에 대처하는 콘세이상의 반응이 신경질적이었다.

‘이거 잘만 하면 여기서 보낼 수 있겠다.’

지금 이 부분이 승부처임을 직감했다.

물론, 지금은 자신 혼자만의 승부처였지만, 잘만 풀리면 오늘 경기 자체의 승부처가 될 것이었다.

0-0의 균형을 깨고 승리와 함께 리그 우승컵을 가져올 기회였다.

‘폭발해라, 그만 참아? 원래 다혈질이잖아.’

그리고 그때부터 성배의 손과 발이 바빠졌다.

손을 이용해 평범한 자리싸움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교묘하게 꼬집거나 중심을 잃은 척하면서 축구화 스터드로 뒤꿈치와 종아리를 긁기도 했다.

부상까지 입힐 생각은 없었기에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따끔해서 오히려 더 짜증 나는 반칙들이었다.

‘이거다!! 흡!’

그리고 성배는 자신의 손이 콘세이상의 흉근을, 그러니까 그 흉근에서도 특정 부분을 꼬집었을 때, 드디어 신호를 받았다.

자신을 등지고 자리싸움을 펼치던 콘세이상이 다 필요 없다는 듯 거칠게 몸을 돌렸고, 다음 상황을 이미 직감한 성배는 온몸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어금니도 물론 꽉 물었다.

-퍼-억!!

“으아아악!!”

다행히 주먹이나 발에 얻어맞지는 않았다.

콘세이상은 거칠게 몸을 돌리며 성배의 가슴을 강하게 밀쳤고, 기다리고 있었던 성배는 다리에 힘을 주고 뒤로 몸을 날렸다.

'이건 제대로다.'

그 결과, 꽤나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굉장한 임팩트를 보였을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라운드 위로 떨어졌다.

그 뒤, 임팩트를 유지하기 위해 얼굴을 부여잡으면서 그라운드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세상 끝나는 비명은 덤이었다.

“크으...”

‘다행히 조준을 잘못해줬네.’

분노에 휩싸여 팔을 뻗은 덕분에 콘세이상은 제대로 성배의 가슴을 조준하지 못했다.

그 덕에 볼 부분을 살짝 긁혔고, 얼굴을 감싸 쥘 수 있었다.

역시.

맞으려면 얼굴을 맞아야 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역시 콤파니.

가장 먼저 분노를 표출하며 콘세이상에게 다가갔다.

주장도 아니고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선수였지만, 수비진의 리더이자 성배와 가장 친한 선수였기에 동료들 모두 콤파니의 분노를 이해했다.

‘얄밉군. 확실히. 그래도 무서운 놈이야.’

정작 콤파니는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상황을 성배가 유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배가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상황을 확실히 살려주기 위해 먼저 나선 것뿐이었다.

“워, 워!! 진정하라고!!”

“이게 진정할 일이야? 저 자식이 폭력을 썼다고!!”

“전부터 주의 플레이가 심하긴 했잖아?”

“조금 거칠었다고 때려? 무서워서 수비하겠나, 이거!!”

안더레흐트 선수들과 스탕다르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두 선수의 대리전을 벌였다.

당사자들 못지않게 흥분한 선수들도 있었고, 이들을 말리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선수들도 있었다.

[우우우우!!!!!!]

[축구해라!! 격투기 하지 말고!!]

오늘은 안더레흐트의 홈경기였다.

당연히 관중들의 야유가 폭발해 콘세이상과 스탕다르 선수들을 향해 쏟아졌다.

수만 명이 내지르는 야유는 꽤 위협적이었지만, 콘세이상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틈에 쐐기를 박았다.

“어이, 당신!! 그 눈, 보이는 거 맞아? 안 보이지? 보이는데 이딴 식으로 경기를 운영할 리가 있나!!”

바로 주심에게 다가가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은 것이었다.

주심은 그라운드 위에서 절대자였고, 법이었다.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일부러 실수하는 주심은 없었고, 그런 주심의 권위를 선수가 침범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뭐라고? 지금 나한테 말한 건가?”

“그럼!! 아까부터 눈이 있어도 못 보고 있잖아!! 저 자식이 지금까지 얼마나 더럽게 플레이했는지 몰라서 그래?”

게다가 손가락으로 주심의 가슴을 찌르며 신체 접촉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 볼 것도 없었다.

“에이, 더러워서 진짜!! 이딴 덜떨어진 심판이랑 뛰어야 한다니.”

당연히 퇴장이었다.

주심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저지 앞주머니에서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안더레흐트 선수들과 언쟁을 벌이던 스탕다르 선수들이 급히 달려와 항의했지만, 그들도 당연한 판정임을 알고 있었다.

“더러운 새끼. 평생 그따위로 하면서 이딴 리그에서 썩어라!!”

-퉤!

퇴장을 당해 그라운드에서 나가면서 콘세이상은 누워있던 성배에게 침을 뱉었다.

이번에는 주심과 스탕다르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함께 콘세이상을 둘러쌌다.

안더레흐트 선수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이 정도야. 싸게 먹힌 거지.’

당사자인 성배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까짓 침 묻는 것 정도야.

솔직히 자신이 콘세이상이었어도 약이 바짝 올랐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쓰고 침을 뱉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콘세이상은 어리석었다.

노련하지만, 감정 조절에는 서툴렀던 것이었다.

그라운드 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뜨거운 곳이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냉정한 곳이었고, 눈에 띄는 약점이 있고 이를 관리하지 못하는 선수는 당연히 공략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쓱 닦고 넘어가는 너도 참 대단하다.”

콤파니는 유니폼을 들어 침을 닦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성배를 보면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문득 열아홉의 성배는 과연 그라운드 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뭐, 얼굴에 침 좀 맞았다고 뭐 있나? 저쪽은 퇴장인데.”

참...

콤파니는 팔을 쓸어보았다. 오톨도톨하게 올라온 피부가 만져졌다.

“이제 우승하러 가야지?”

얼굴에 침이 묻었던 일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이는 성배였다.

나이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노련한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처럼 위화감이 느껴진 것은 또 처음이었다.

“너는 화도 안 나냐.”

“화? 당연히 화나지. 그런데... 그거 내서 뭐해? 그리고 이기면 다 싹 사라져.”

선수로서 참 부러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면서 콤파니가 혀를 찼다.

다만, 사람으로서는 별로 부럽지 않았다.

***

“볼이 왼쪽으로 넘어갑니다. 주, 볼을 잡고 전방을 살핍니다.”

“스탕다르 선수들, 확실히 숫자에서 밀리게 된 이후로 고전하고 있어요. 안더레흐트의 패스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벅차 보이죠?”

전반전 종료 직전에 콘세이상이 퇴장당한 스탕다르는 열 명의 선수들로 열한 명의 안더레흐트와 싸워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탕다르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지고 있었고, 안더레흐트는 편안하게 볼을 돌리며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한 명 차이도 무시할 수 없어.’

콘세이상의 퇴장 이후 스탕다르는 수비를 강화했다.

현재 1위 안더레흐트와 2위 스탕다르.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그대로 우승 가능성이 사라지는 스탕다르였기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뿜었다.

문제는 수적인 열세로 비기기조차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비길 경우, 안더레흐트의 우승 확정을 한 경기 늦추는 선에서 그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돌려!!’

아직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여 분.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스탕다르 선수들이 점점 체력에 부담을 느낄 것이고, 그때가 되면 계속해서 기회가 생길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굳이 급할 필요도 없었고, 패스 위주로 볼을 돌리면서 그 시점을 빠르게 만드는 것이 유리했다.

“아-악!!”

다만, 성배는 조금 조심해서 볼을 다룰 필요가 있었다.

콘세이상의 퇴장 이후, 스탕다르 선수들이 성배에게만큼은 거친 플레이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얌전한 편인 주필러 리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자식들이 자꾸!!”

“생각이 아주 그림처럼 보인다, 이 자식들아!! 피해자한테 뭐하는 거냐!!”

당연히 안더레흐트 선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성배에게 가해지는 파울이 잦아질수록 성배를 대신해 스탕다르 선수들과 주심에게 어필을 계속해주었다.

덕분에 그라운드 위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네가 찰 거지?”

“당연하지. 항상 내가 찼는데.”

그런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성배는 멀쩡히 일어나 프리킥을 준비했다.

어차피 예상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을 뿐이니 당황할 필요도 없었다.

“안더레흐트가 프리킥을 준비합니다. 콤파니, 타이히넨 등 수비수들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스탕다르는 잘 막아내고 역습을 노려야죠. 수비수들까지 올라온 이런 세트피스 상황이 위기이면서도 기회예요.”

한 명이 부족한 스탕다르가 이 경기를 잡기 위해서는 결국 역습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센터백들까지 모두 공격으로 올라가고, 풀백 중 한 명인 성배는 프리킥을 준비하는 상황은 그들에게 위기이기도 했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습은 일단 이 공격을 막아낸 다음에 생각해야 합니다. 미리 역습부터 생각하면서 수비하기에 안더레흐트의 세트피스 공격력이 막강하지 않습니까?”

“그건 당연하죠. 190cm가 넘는 콤파니와 프루토스, 190cm에 육박하는 타이히넨 등 세트피스 공격력이 강한 팀이니까요.”

프루토스의 합류 후 안더레흐트의 세트피스는 확실히 위력이 배가되었다.

기존의 콤파니, 타이히넨 센터백 듀오에 프루토스까지 추가된 안더레흐트의 제공권은 굉장히 강력했다.

“휘슬 울리고, 도움닫기 후 크로스!! 날카롭게 감겨 들어갑니다!!”

게다가 조금씩 더 정확해지고 있는 성배의 킥 또한 세트피스의 위력을 높여주고 있었다.

제공권이 뛰어난 선수들.

정확한 킥.

세트피스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갖춘 안더레흐트였다.

“콤파니, 헤더!!! 골!! 골!! 들어갑니다!! 안더레흐트, 우승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습니다!!”

“드디어 골이 터지네요!! 안더레흐트!! 이제 우승이 눈앞에 있어요!!”

성배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한 콤파니에 의해 드디어 선취골이 나왔다.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면 우승을 확정 짓는 상황에서 굉장히 중요한 골이었다.

“나와, 나오라고!!”

우승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골을 터뜨린 콤파니가 흥분해서 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를 향해 달려오려 했지만, 마찬가지로 흥분한 다른 선수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성배는 홀로 제 자리에 서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일 뿐이었다.

“벨기에의 미래라 불리는 두 명의 어린 선수들이 결정적인 득점을 합작했습니다!!”

“이걸로 주성배 선수는 이번 시즌 열 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공격뿐 아니라 수비력도 뛰어난 선수이니 이제 국가대표 자격 논란은 수그러들어야겠네요.”

3골 10어시스트.

두 경기를 남겨놓고 성배가 기록 중인 공격 포인트 개수였다.

그야말로 벨기에 내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는 최고의 레프트백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하, 이 정도까지 했는데 설마 자격 논란이 계속 일어나겠습니까?”

“글쎄요.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분명 많이 줄어들겠죠.”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씩 벨기에 내의 여론을 바꿔나가고 있는 성배였다.

한국과 벨기에, 양국에서 반응이 좋지 않으면서 미지근하기까지 했는데, 점점 벨기에 쪽은 뜨거워지면서 호의적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64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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