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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62화 (37/356)

< 낭만필드 - 062 >

[IN - 22. 주성배 / OUT - 15. 필리페 레오나르도]

드디어 성배의 차례였다.

선발 레프트백으로 경기에 나섰던 레오나르도가 나오고 성배가 투입되었다.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선수인생에서 첫 번째 A매치 출전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잘하면 바로 주전이다.’

첫 경기부터 주전으로 뛸 것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는 말을 했던가, 안 했던가.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주전 레프트백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성배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기존의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올리비에는 이미 따돌렸고... 오늘 레오나르도도 별로 좋지 못했으니까.’

벨기에 포백라인의 왼쪽 자리는 데샤흐트와 반 더 헤이든, 레오나르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었다.

벨기에 최강 안더레흐트의 주전 레프트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가장 앞서나갔던 데샤흐트는 그 무기를 성배에게 빼앗겼고, 기존의 제 2옵션 반 더 헤이든은 볼프스부르크로 이적했다가 로테이션 멤버가 되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적당히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면 이 자리는 내 거다.’

데샤흐트와 반 더 헤이든이 잠시 소속팀에서 주춤하고, 성배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지금이 레오나르도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레오나르도는 한 수 아래의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미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살리지 못했던 레오나르도와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성배의 경쟁.

누가 더 유리한지는 굳이 말할 이유조차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동료들 플레이도 좀 확인하고...’

베르마엘렌이나 뎀벨레 등 나중에 황금세대로 활약하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현재 벨기에 대표로 뛰고 있는 선수들의 플레이까지도 성배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전생에서의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랑 지금의 모습은 10년이 넘는 차이가 있으니까... 지금의 플레이를 파악해야 해.’

동료들, 특히, 수비수들의 플레이는 모두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씩 성장하기 위해 이들의 플레이를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이들이 전성기를 달릴 때의 것.

아직 덜 여문 지금의 플레이가 어떤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의 기량을 바탕으로 이들과 함께 뛰었으면 분명 언젠가 실수가 나왔을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지금도 전성기 못지않게 뛰어난 기량을 갖춘 콤파니가 커버해 준 덕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콤파니와 처음 호흡을 맞춰서 다행이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쟤들이랑 같이 뛰었으면 분명 계속 실수했겠지.’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앞으로는 운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그들에게 맞출 필요가 있었다.

오늘이 그 시작이었다.

***

[붉은 악마의 새로운 얼굴들. 그들의 가능성은?]

- 향후 붉은 악마를 이끌고 갈 그들, 룩셈부르크전에서 어땠나?

지금, 벨기에 축구는 분명 위기에 처해있다.

유로 2000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2002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유로 2004에 이어 2006 월드컵까지 본선 진출조차 실패한 벨기에 축구의 지금은 확실히 어둡다.

다만, 그것이 벨기에 축구의 몰락을 알리는 것은 아니다.

벨기에의 미래를 대표하는 뱅상 콤파니를 필두로, 안토니 반덴 보레, 토마스 베르마엘렌, 케빈 미랄라스, 무사 뎀벨레, 니콜라스 롬바르츠, 마루앙 펠라이니, 얼마 전 귀화한 주성배 등을 비롯한 여러 선수가 빛나는 재능으로 벨기에 축구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있었던 룩셈부르크와의 친선 경기는 이들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한 경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선수들이 다섯 명이나 그라운드를 밟았고, 다들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이며 팬들을 만족시켰다.

이제부터 이들이 어제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짚어보며 장점과 보완해야 할 점을 파악해 볼 것이다.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기에 필자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먼저, 주전 센터백으로 경기에 나선 토마스 베르마엘렌(아약스). 그는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터프하고 거친 수비로...

....

후반전 중반이 넘어서야 교체 투입된 안더레흐트의 주성배 역시 특별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시간은 없었다.

다만, 그 짧은 시간에도 넘치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자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사실, 콤파니를 제외하면 리그에서 주성배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신예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풀백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 2골에 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챔피언스리그에서 로번, 가르시아, 호아킨 등 세계 최고의 윙어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것이나.

그의 활약은 이미 기존의 선수들을 뛰어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이번 경기에서도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의 인상적인 패스 커트와 한 번의 위협적인 크로스를 보여주며 자신의 기량을 어필했다.

앞으로의 가능성이나 현재 리그에서의 활약 등을 살펴봤을 때, 왼쪽의 주인이었던 데샤흐트와 반 더 헤이든이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면서 공석이 된 왼쪽의 새로운 주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커보인다.

...

***

[거기는 반응이 어때?]

A매치 데뷔전 바로 다음 날 아침, 성배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여기는 좋아요. 다들 칭찬해주고 있어요.”

[에휴... 여긴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기사만 나오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머니의 전화에 성배는 컴퓨터를 켜 인터넷에 접속했다.

과연 한국에서 무슨 말들을 하고 있기에 이 이른 시간부터 전화를 거신 건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 아니, 외국인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가요?

- 그러게. 박인진이나 윤기표 기사 쓸 시간도 없을 텐데... 이 기자는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다. 신문사에서 위치가 그리 높지는 않은 듯.

- 나 참... 굳이 이렇게 반응할 필요 있나? 유럽에서 활동하려고 유럽 국적 딴 것 가지고. 욕하려면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외국 국적 딴 정치인 아들이나 욕해.

- 걔들도 욕할 거야. 걱정 마.

- 그냥 응원이나 합시다. 응원하기 싫으면 관심을 끄고. 욕할 거면 대체 왜 기사를 읽는 거지?

뭐, 별것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생각한 것에 비하면 거의 천사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최악의 경우, 미국 국적을 따고 병역 면제를 받았다가 아예 나라를 떠나야 했던 가수의 전철을 밟을 각오까지 했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뭐.

천사들이었다.

“하하, 어머니. 이 정도로 속상해하시면 어떡해요? 이 정도 반응은 윤기표 선수나 박인진 선수한테도 나와요. 좀만 부진하면.”

당장 EPL 탑클래스 클럽으로 이적한 박인진이나 윤기표도 하루 부진하면 바로 신나게 욕먹는 곳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두터운 팬층이라도 있는데, 하물며 그런 것도 없고 벨기에로 귀화한 자신은 어떻겠는가.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그래도... 내 아들한테 안 좋은 말 하니까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

물론, 어머니 마음도 이해는 했다.

자신이야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지만, 어머니 마음이 어디 그럴까.

예상은 하셨겠지만, 막상 아들이 욕을 먹으니 속상하실 것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아이돌 기사 확인하느라 댓글 많이 보시잖아요. 거기 가보시면 제 댓글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글들 많지 않아요?”

어머니는 아이돌 그룹과 연예계의 소식들을 자신과 유빈이에게 전해주는 소식통이셨다.

[어머, 얘는. 내가 그런 거 얼마나 본다고...]

어머니한테 이런 말 해도 되려나?

참, 귀여우셨다.

[그건 그렇고, 벨기에 댓글은 어때? 여기 반응이 별로여서 거기 반응이라도 알고 싶은데.]

여기 사이트 주소라도 가르쳐드려야 하나?

아쉽게도 불어를 모르실 테니 읽어드리기로 했다.

성배는 모니터에 벨기에 최대 축구 커뮤니티를 띄웠다.

- 지금 보니까 아예 처음부터 주를 주전으로 썼으면 어땠을까, 싶다. 잘하네.

- 어차피 주는 이제 뜨는 별이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많잖아. 그러니 이번에는 레오나르도를 시험해보는 게 맞았다고 봐. 덕분에 미련도 버릴 수 있었잖아. :)

- 크크. 윗사람이 맞는 말 했네. 주는 이제 주전으로 뛸 것 같고, 레오나르도는 마지막 미련까지 정리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지.

- 그나저나, 우리 수비진 앞으로 엄청 기대되는데? 공격수 유망주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 :(

- 케빈... 있잖아? 케빈이 뭔가 해줄 거야...

[거기서라도 사랑받고 있어서 다행이야. 에이, 16년 동안 생활한 나라보다 겨우 3년 생활한 나라에서 더 사랑받다니. 말도 안 돼!!]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인터넷이 원래 그런 거잖아요. 나중에 저 잘 돼서 한국 들어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팬이라고, 사인해달라고 할 거예요.”

인터넷 공간에서는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굳이 거기서 자신을 위해 싸움에 뛰어들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분명 언젠가 한국의 길을 걸을 때, 자신에게 사인해달라며 다가올 사람들도 많을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

“지금은 그냥 저 잘 되는 것만 생각할게요. 어머니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저 잘 되는 것만 보면서 웃기만 하세요.”

자신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신경 쓸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었다.

그런 것들 신경 쓰다가 진창에 빠졌던 전생이 아닌가.

주어진 기회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앞에서 떠들지 못하는 자들을 의식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알았어. 아들, 엄마가 아들 믿는 거 알지?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죠. 어머니. 저도 사랑해요.”

전생은 물론이고, 돌아온 뒤에도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 입에 담는 말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여전히 자신은 과거에서 그렇게 많이 빠져나온 것 같지 않아 씁쓸했다.

‘그럼 이제 생각을 좀 정리해볼까.’

그래서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과거로 돌아온 뒤, 맨 처음 계획을 세울 때 이후로 습관이 되어 깊게 고민할 때마다 함께 하는 종이와 펜도 꺼냈다.

‘과거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부분과 선별적으로 이용해야 할 부분, 그리고 완전히 달라져야 할 부분들을 정리해보자.’

하얀 종이 위에 몸싸움, 피지컬 보완, 선수 평가, 동료들과의 관계 등등 여러 단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얗던 백지가 까맣게 변해갈수록 성배의 머릿속은 점점 깨끗해졌다.

< 낭만필드 - 062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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