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61화 (36/356)

< 낭만필드 - 061 >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성배의 국가대표팀 선발은 한국에서도 꽤나 논란이 되고 있었지만, 벨기에 내부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계 선수가 벨기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더레흐트 주성배, 벨기에 국가대표 합류!!]

[아시아의 붉은 악마에서 유럽의 붉은 악마로.]

[너무 많은 귀화 선수. 이대로 괜찮은가?]

현대 축구에서 이민자나 귀화 선수 없이 국가대표를 운영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특히, 강팀일수록 더욱 그랬다.

알제리 등 아프리카 선수들이 점령한 프랑스나, 수리남 출신 선수들을 활용해왔던 네덜란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게르만 순혈주의를 표방하던 독일까지도 가나 출신의 귀화 선수 게랄드 아사모아나 오동코어 등을 선발했으니, 축구계에서 인종과 출신의 중요성은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들 귀화선수 대부분이 아프리카나 남미 출신의 선수들이라는 점이었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신체적인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선수들이고, 남미 선수들은 유럽과 함께 축구계를 지배하는 대륙 출신이었다.

[위독한 붉은 악마들. 이제 아시아 선수까지?]

[추락한 붉은 악마. 아직도 추락할 곳이 남았나.]

[유럽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벨기에, 어디까지 가는가.]

하지만 성배는 아시안이었다.

아프리카나 남미처럼 유럽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유럽의 축구팬들 중에는 아시아 축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니 팬들의 걱정스러운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나, 주필러 리그를 보지 않고 해외 빅리그나 국가대표 경기만을 챙겨보는 유럽리그 팬들이 더욱 심했다.

이들은 성배에 대한 소식을 기사와 신문, 인터넷 매체 등으로 접했고, 유럽 최초로 아시아 귀화 선수로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된 성배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유럽 축구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가득 찬 일부 언론은 성배의 국가대표 선발을 두고 벨기에 축구가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아시아 축구에 대한 유럽 축구계의 멸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빌어먹을!! 이건 벨기에의 수치다... 유럽 강팀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붉은 악마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 허, 살다 살다 아시안이 붉은 악마 유니폼을 입는 것도 다 보는군. 너무 오래 살았나 봐.

- 저기, 겨우 4년 전에 우리 월드컵 16강 가지 않았었나?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난 거지?

- 니하오, 칭총!! 어차피 좀 있으면 사라질 얼굴인데, 뭘.

ㄴ 너는 좀 위험하겠다. 단어 선택이 안 좋아. 어쨌든, 나는 좀 다른 의견이 있어. 주의 기량은 솔직히 인정해. 주필러 리그 최고의 레프트백이니까. 그런데... 우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좀 거부감이 든다.

당연히 커뮤니티마다 익명성을 무기로 암약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흑인들은 축구를 너무 잘하니 마땅히 욕할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성배는 아직 보여준 것도 적고 차별주의자가 아닌 일반 팬들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니, 이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 음... 주필러 리그에서 잘한다고는 하는데, 주필러 리그 수준이야 거기서 거기고, 어차피 유망주 시험하는 거면 포코뇰리를 한 번 써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 지난번 U-19 경기 못 봄? 페로 제도랑 할 때, 솔직히 포코뇰리랑은 레벨 차이가 있어 보였다. 좋은 선택인 듯.

- 아니, 다들 왜 이래? 한 번 국가대표 뽑혔다고 평생 뽑히는 것도 아니고...

- 그러게. 어차피 못하면 다시 안 뽑으면 되는 거고, 잘하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 일단 하는 것부터 보자고.

- 하여튼, 유럽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사람 많아요. 유럽이 축구를 잘하는 게 유럽인이 원래부터 뛰어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행히 일반적인 반응은 이쪽에 가까웠다.

일단 이번 경기 자체가 새로운 얼굴들을 시험해보는 성격의 친선 경기였고, 성배의 활약을 감안했을 때, 뽑지 않으면 오히려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

“우리 오늘 뛸 수 있으려나?”

반덴 보레가 말했다.

물론, 벨기에가 미래를 대비하고 있고, 성배를 비롯해 여러 어린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선발했다고 하지만 역시 본 경기에서는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내가 알겠냐. 그냥 나가라고 하시면 나가는 거지.”

어차피 예상한 바였다.

시작부터 국가대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건방지지 않았다.

일단은 그라운드 위에서 뛰고 있는 기존의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켜보며 선수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위기다, 위기다, 하지만... 그래도 룩셈부르크랑은 할만하네. 1.5군 정도 스쿼드인데.”

성배가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니, 반덴 보레도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경기는 완전한 벨기에의 페이스였다.

시험대 성격이 강한 경기였기 때문에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는 수준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했고, 그들이 어떻게든 감독과 팬들의 눈에 띄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덕분이었다.

“당연하지. 룩셈부르크한테 이 정도 못하면 다들 벨기에까지 뛰어와야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무리 암흑기라고 해도 벨기에는 치열한 유럽 예선을 뚫고 1982년 월드컵부터 2002년 월드컵까지 6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며 4강까지 진출했던 나라였다.

아무리 백업 선수들이라고 하지만, 룩셈부르크에 고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토마스 잘 뛰네. 뱅상!! 긴장 좀 해야겠어?”

“개그에 소질 있네. 개그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 것일 테고.”

부동의 주전 센터백.

콤파니도 그러한 감독의 의중에 따라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를 대신해 출전한 토마스 베르마엘렌은 무난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르마엘렌. 역시 잘하네.’

지금이야 잠재력은 몰라도 현재 기량에 대한 평가에서 자신에게 밀리지만, 사실 가진바 재능의 차이는 있는 편이었다.

유리몸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의식을 덜할 뿐, 실력 하나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한국이나 여기나 주전 자리를 따내기 쉽지는 않구나.’

벨기에는 분명 풀백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할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세대에 좋은 수비수들은 많은데 전부 센터백 자원이고 풀백 자원은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벨기에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베르마엘렌과 베르통언, 알더베이렐트 등 대다수 센터백들이 풀백 자리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더베이럴트는 밀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베르마엘렌과 베르통언을 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고, 하필이면 이 두 선수 모두 레프트백으로 뛸 수 있었다.

‘나도 라이트백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으니까.’

알더베이럴트만 밀어내면 라이트백 포지션에 자리가 생긴다. 반덴 보레야 지금은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로 불리고 있어도 곧 알아서 꼬꾸라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라이벌의 활약을 벤치에서 지켜만 보는 기분이 어때?”

생각에 잠긴 성배의 귀에 콤파니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잠시 라이벌이 누군지 고민하던 성배가 대답했다.

“라이벌? 토마스?”

“그래. 너랑 동갑이잖아. 나란히 첫 소집이기도 하고. 같은 수비수고.”

그러는 자기도 겨우 한 살 차이면서.

워낙에 일찍부터 국가대표팀에 합류했고, 핵심 선수로 활약하다 보니, 또래 선수들을 후배보듯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어울리기는 했다.

“글쎄. 별생각 없는데. 어차피 포지션도 다르고.”

어린 선수들처럼 경쟁심을 불태울 나이는 아니었다.

정신 연령은.

게다가 선수들의 미래를 알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저 선수는 어디까지 큰다, 이 선수는 어디까지 큰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굳어져 있었다.

‘음...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순간, 성배는 무언가 잘못되어있음을 직감했다.

전생에서의 기억에 너무 깊숙이 잠식되어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 정도이니 아무리 피지컬이 늘어도 몸싸움이 안 되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전생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성장한 것.

여기까지는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분명 이것들이 지금의 자신을 여기까지 올려주었다.

‘이용하는 정도에서 그쳤어야 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의 자신은 미래를 꿈꿀 자격이 없었다.

과연 자신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자.’

나만의 시간과 깊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몇 년간 전생의 기억에만 의지해 살아온 자신이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경기 중이었기에 그럴 수 없어 다짐으로 그쳤지만, 경기를 마치고 돌아가면 바로 자신을 천천히 돌아볼 것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에 감사하자.’

자책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성은 할 것이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그래도 전생에서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서 맺은 인연이 없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주!! 주!!”

고민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코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예!!”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경기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못 들었습니다.”

“경기에 대해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귀는 열어둬야지. 얼마나 불렀는데.”

“죄송합니다.”

자신이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코치가 자신을 찾았던 것 같았다.

코치가 짜증을 내도 상관없었다.

조금 전의 시간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으니까.

“하하하, A매치 합류했다고 긴장한 건 아니고?”

“이야... 평소에 그렇게 시크한 척을 하더니 정작 중요한 순간에 긴장한 건가? 안 어울리는데?”

반덴 보레와 콤파니가 성배를 보며 웃었다.

긴장했다고 생각해서 풀어주려 하는 것인 것도 같았다.

‘내 나이가 마흔이고, 경력이 20년이다.’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하하, 방금 이러지 말자고 해놓고...’

나이에 맞게 긴장하겠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장점을 버릴 리 없었다.

다만, 남들과 다른, 특별하다는 생각은 버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금 더 충실할 것이고, 좀 더 다가갈 것이었다.

“풋. 긴장은 개뿔. 기대돼서 미칠 것 같다.”

자신을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기도록.

자신에게 뭐 하나라도 더 내주고 싶어 하도록.

자신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 마음이 생기도록.

“뭐야... 갑자기. 갑자기 그러니까 무섭다.”

“뭘 잘못 먹었나? 저런 표정 처음 보는데?”

물론, 지금 당장은 낯설겠지만.

나중에는 어딜 가나 자신을 찾게 될 것이고, 자신과 떨어짐을 아쉬워할 것이었다.

사회생활 경력이 몇 년인데.

“아아, 잡담은 나중에 경기 끝난 다음에 하고, 주!! 교체다. 아오, 이 말 한마디 하기가 더럽게 어렵네.”

코치가 폭발했다.

분명 자신이 불렀는데, 대답 한 번 하더니 지네 팀 동료들끼리 시시한 장난이나 하고 앉아있다니.

반덴 보레나 콤파니야 그렇다 치더라도 A매치 데뷔전인 성배까지 그러니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일지도?’

그래서 기대가 되었다.

< 낭만필드 - 06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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