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9 >
“아오, 골치야...”
겨울 이적시장 기간 종료까지 2주 전.
책상에 앉은 베우스만테른 감독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적 문의만 도대체 몇 건이 들어오고 있는 거야...”
주필러 리그 최강의 클럽, 안더레흐트.
그 말은, 안더레흐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는 선수들은 더 큰 무대에 속한 클럽들의 타겟이 되기 쉽다는 뜻이었다.
“뱅상, 주, 안토니, 크리스... 아주 기둥뿌리를 다 뽑아가려고 작정했군.”
4대 리그 상위권 클럽들은 리그 하위권 팀들에서 선수들을 영입하고, 하위권 클럽들은 4대 리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리그 상위권 팀에서 선수들을 영입하고, 그럼 또 그 팀들은 자신들의 리그 하위권 팀의 선수에게 눈독 들이고...
벨기에 최강이라지만 안더레흐트는 이 먹이 사슬에서의 위치를 따지면 상당히 아래쪽에 있었다.
“오래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빨라도 너무 빠르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럽 최고의 센터백 유망주로 꼽혔던 콤파니나 반덴 보레, 주필러 리그 최정상의 윙어로 활약한 빌헬름슨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제 막 프로 데뷔 1년이 되어가는 성배에게까지 러브콜이 쏟아지는 것은 의외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침 감독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어 감독실을 찾은 마이크 코치가 베우스만테른을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한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으니 놀라지 않으면 이상했을 것이었다.
“아아, 별것 아니에요. 그냥... 이적제의가 하도 쏟아진다기에 고민이 많아져서...”
감독의 말에 마이크 코치도 알만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 그래도 요즘 신문들에서 다 난리더군요. 우리 팀에서 시즌 끝나고 떠날 선수가 그렇게나 많은지 저도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안더레흐트 보드진에는 비상까지 걸려있었다.
콤파니나 반덴 보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적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빌헬름슨이나 성배는 달랐다.
빌헬름슨은 떠날 수도 있지만, 벨기에에 남을 수도 있는 선수, 성배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선수라 여기고 있다가 급하게 대책을 세워야 했던 것이었다.
“도대체 이제 고작 데뷔한 지 1년밖에 안 된 선수한테 무슨 확신들을 그렇게 갖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 높지 않은 주필러 리그의 수준을 감안하면 유망주의 1년 반짝 활약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2년, 3년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확실하겠지만, 1년 정도는 플루크 시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영입 문의가 쏟아지다니.
“아, 제가 알아보니까 주가 꽤 골치 아픈 에이전트를 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사람 수완이 꽤나 좋다고 합니다.”
기자, 스카우트와 기자 간의 커넥션이 끈끈한 만큼이나 감독, 코치와의 커넥션 역시 끈끈했다.
그쪽에 도는 소문이 이쪽에 돌지 않을 리 없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군.”
좋은 에이전트는 선수에게 큰 이익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선수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구단과 감독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여기 에이전트가 끼어든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시즌 후 이적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다음 시즌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습니다.”
에이전트가 이런 소문을 흘릴 때는 결국 두 가지였다.
재계약 계약서를 내놓아라, 아니면 진짜로 떠날 거다. 두 가지.
아직 재계약을 요구할 시기는 아니었기에 성배도 팀을 떠난다고 가정하고 계획을 짜야 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죠. 아직 우승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일단은 이번 시즌이 중요하니까요.”
적어도 겨울 이적시장을 통한 전력 누수는 없었다.
다음 시즌에는 위의 네 선수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이번 시즌,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컵을 따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늘었다.
***
“좋겠네. 니콜라스가 합류해서.”
후반기 첫 경기.
세르클레 브뤼헤와의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콤파니가 말을 걸었다.
“뭐... 크로스의 위력은 분명 살겠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던 성배는 귀찮았지만 일단 대답을 해주었다.
콤파니와의 관계는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닐 텐데...”
눈을 감으면서 집중하고 있다는 뜻을 전했지만, 콤파니는 굴하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는 없었기에 성배도 그냥 포기하고 눈을 떴다.
“그래,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좋다. 됐어?”
“충분해, 음음.”
계속된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진 예스트로비치가 이번 이적시장에서 중동으로 떠나고, 그 대체자로 아르헨티나의 니콜라스 프루토스가 영입되었다.
193cm의 신장에서 나오는 제공권이 가장 큰 강점인 프루토스와 크로스가 뛰어난 성배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170cm 중반의 아쿤과 음펜자에게 맞추기 위해서는 낮고 빠른 크로스로 수비 뒷공간을 노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전반기에 꽤 재미를 보긴 했지만, 역시 옵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빅 & 스몰 조합. 몇 년만 더 지나면 투톱은 사장되지만... 아직은 쓸만하지.’
곧 원톱의 시대가 오고 투톱 전술은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투톱의 정석, 빅 & 스몰 조합.
음펜자, 아쿤, 그리고 새로 합류한 프루토스의 조합이 기대되는 이유였다.
***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려.’
안더레흐트의 프리킥 상황에서 볼이 박스 안에 투입되었다가 다시 측면으로 흘러나왔다.
오른쪽 측면에서 빌헬름슨이 볼을 잡고 있었고, 박스 안에서 수비하고 있었던 세르클레의 수비수가 급히 뛰어나오는 중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성배가 빌헬름슨의 뒤에서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휴식기 동안 컨디션이 떨어진 반덴 보레를 대신해 오른쪽 풀백으로 경기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지금!!’
측면이 텅 비어있고, 이를 막기 위해 수비수가 뛰쳐나오고 있는 상황.
그 뒷공간은 텅 비어있었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 선수는 빌헬름슨을 향해 뛰어오는 중이었다.
전력 질주 중 역동작에 걸린 것이었다.
‘프루토스. 실력 좀 보자.’
성배가 할 일은 빌헬름슨이 굴려준 볼을 크로스로 연결하는 것밖에 없었다.
볼을 따라가는 동안 박스 안쪽을 훑어본 뒤, 머리 반 개 정도 올라와 있는 프루토스를 향해 지체하지 않고 오른발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가서 닿아라!!’
아직 최고 속도 근처에서 올리는 러닝 크로스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비슷하게는 올라갔고, 오히려 정확하지 않아서 더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자!! 나이스 헤더!!”
“하하하, 크로스 멋진데? 뿅 가버릴 것 같다고!!”
미리 자리를 잡는답시고 프루토스보다 앞에서 수비를 시도했던 상대 수비수의 선택은 실책이 되고 말았다.
살짝 길었던 크로스는 수비수의 키를 넘어버렸고, 프루토스가 뒤로 움직이면서 자유롭게 된 것이었다.
“역시, 스트라이커는 키가 커야 해.”
193cm의 장신이 아니었다면 머리에 대는 것조차 힘들 크로스였다.
정확하지 않은 크로스였음에도 몸을 쭉 펴서 헤더로 연결하는 그 신장. 신장 덕에 얻어걸린 어시스트였지만, 그렇다고 어시스트가 아닐 리 없었다.
“하하, 네가 크로스 자신 있다고 그딴 소리 하는 거냐!!”
“라커룸 가면 아쿤한테 바로 일러버려야지.”
음펜자와 빌헬름슨 등 다른 선수들도 차례로 달려와 골 세리머니에 동참했다.
단신 스트라이커 음펜자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아쿤의 반응도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데뷔골 축하한다.”
대충 선수들이 진정되자, 성배가 프루토스의 어깨를 쳐주며 말했다.
“아아, 고맙다.”
프루토스가 미소를 지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벨기에로 무대를 옮기며 걱정이 많았을 텐데, 첫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으니 적응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내 기록에 큰 도움이 될 헤딩 기계가 들어왔는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아니지. 네가 내 기록에 큰 도움을 주는 거다.”
“뭐, 네가 나한테 도움만 되면 그건 너 알아서 생각하게 해주지.”
어차피 크로스가 주 무기인 자신은 골을 넣어줄 공격수가 없다면 스탯을 쌓을 수 없었다.
잘 받아먹어 줄 선수가 무조건 있어야 했다.
프루토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잘 먹어주는 것.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
“뒷공간 내주지 마!!”
콤파니가 급히 소리쳤다.
세르클레의 역습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인 유지하고!! 선수에 집중해!!”
안더레흐트가 분명 유리한 경기를 펼치고는 있지만, 위기가 없을 수는 없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공격을 진행하다가 패스가 끊겼고, 오랜만에 역습 기회를 잡은 세르클레 선수들은 빠르게 안더레흐트 진영으로 넘어왔다.
“피발레비치, 체크!!”
성배가 소리쳤다.
다르코 피발레비치.
로얄 앤트워프의 1부 리그 마지막 경기를 보러 갔을 때, 로얄 앤트워프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그 선수였다.
‘그때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말할 필요나 있을까.’
자신이 있었다. 피발레비치를 막을 수 있다는.
세르클레에서 역습을 전개한다면 다음 순서는 피발레비치일 확률이 9할 이상.
다른 선수들보다 상당히 앞서서 뛰어 들어오는 그에게 볼이 올 것이었고, 성배는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주!! 간다!!”
역시나.
이쪽으로 볼이 전개된다는 동료들의 외침이 들렸다.
성배는 라인을 지키며 피발레비치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볼이 도착했다. 피발레비치가 왼발을 들어 볼을 잡아놓은 순간, 성배는 눈을 빛냈다.
분명 좋은 기회였지만 마음만 앞선 트래핑이었다.
“아악!!”
성배는 다리를 뻗어 태클을 시도했고, 피발레비치는 이에 걸려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좋아!!’
바로 주심부터 바라보았다.
휘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정당한 플레이라 판정한 것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하게 잘 들어갔다. 파울이 아니라는 확신도 있었고, 역시나 파울이 선언되지 않았다.
“나이스 태클!!”
멋진 태클로 실점 위기를 막아낸 성배에게 동료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멋진 플레이를 해냈고, 박수를 받았지만, 성배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수비에 긴장감이 너무 적어.’
타고난 수비력과 재능이 부족한 성배에게는 경험의 중요성이 절대적이었다.
경험만 쌓인다면 재능의 차이를 극복할 자신도 있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상대와의 대결을 경험한 뒤, 리그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플레이가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으니...’
그게 문제였다.
지금 자신의 플레이에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데, 리그에서 날아다니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플레이를 예측한다는 것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플레이라는 것. 자신의 세계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번뜩이는 플레이를 보여줄 상대가 필요했다.
‘내가 이렇게 공격 포인트를 많이 쌓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벌써 이번 시즌 공격 포인트가 두 골을 포함해 아홉 개나 쌓여 있었다.
성배의 공격력은 폭발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간 활용 능력과 타이밍 포착에서 나오는 것.
상대가 내준 틈을 타서 경기마다 몇 번씩 좋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매 경기, 매 순간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수비에서 조금 더 부담을 가질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해.’
국가대표 무대이든, 조금 더 경쟁력이 있는 리그이든.
수준 높은 무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성배였다.
< 낭만필드 - 05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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