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8 >
“아,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뵙네요.”
“아, 아아!! AA 에이전시 직원분 맞으시죠? 이야,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죠?”
성배가 이사 준비에 한창일 때, 버크만은 본인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기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잘 지내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요. 아우, 요즘 또 이상한 소문이 돌아가지고...”
낚여라.
속으로 버크만이 주문을 외웠다.
“이상한 소문이요? 왜요? 무슨 소문이길래 연초인데 쉬지도 못하십니까?”
걸렸군.
딱히 궁금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버크만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아아, 누구 이야기인지는 말 못하지만, 그 있잖아요, 왜? 요즘 한창 핫한 네덜란드 수비형 미드필더. 그 친구 때문에 말이죠.”
“아아, 그 선수도 AA 소속이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아닌 걸로 아는데...”
“우리 소속 아니에요. 그쪽보다 우리 쪽이 이번에 연결되는 클럽이랑 조금 더 가까워서 도와주고 있는 거죠.”
기자들에게 소식을 흘릴 때,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것 한 가지.
본인이 담당하는 선수의 소문은 흘리지 않는다.
기자들도 이쪽으로는 탁월한 감각을 가졌기 때문에 담당 에이전트가 직접 흘리는 루머는 의심부터 하고 보기 때문이었다.
“아!! 그런 거군요. 어느 클럽인지...”
“아이고, 기자님. 그런 건 말 못해 드리죠. 제 선수도 아닌데요.”
버크만은 일단 한번 튕겼다.
네덜란드 스타의 소식이라면 충분히 장사가 되는 매물이었다.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버크만 씨. 다 아는 사이에 왜 그러십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툭 까놓고 다 말씀해주시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까놓을 게 없는데요.”
“알았어요, 알았어. 다음번에 AA 선수들 소식 들어오면 바로 앞쪽에 내드릴 테니까 말씀해보세요.”
이제 완벽히 걸렸다.
당기기만 하면 끝.
이렇게 한 건 또 해냈다.
“하아... AA 선수들 소식은 특별한 것 없지만, 기자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말씀해드리죠.”
버크만은 끝까지 의뭉을 떨었다.
어차피 물렸다.
이 쪽이 급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은 하책.
끝까지 잡아떼는 편이 훨씬 더 유리했다.
“실명은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네덜란드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유명한 선수가 분데스리가 명문 클럽이랑 연결되고 있습니다. 거의 계약 체결 직전인 걸로 알아요.”
“명문이라고 하면...”
“아, 왜 있잖아요. 예전에 바이에른이랑 라이벌 관계였고, 챔피언스리그 우승 경험도 있는, 그...”
“아, 아아!! 거기? 이제 알겠습니다.”
기자에게 소식은 확실히 들어갔다.
이 바닥에서 버크만은 전도유망한 에이전트로 통했기 때문에, 버크만과 한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었다.
에이전트와의 친분은 기자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었다.
버크만은 급한 일이 있는 척,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기 전, 휴대폰을 들었다.
“아아, 마이클. 확실히 끝냈어.”
[역시!! 역시 알랭이야. 일처리 하난 확실하다니까?]
담당 에이전트가 직접 선수 이야기를 흘리는 것은 하책.
당연히 이번에 흘린 내용도 다른 에이전트의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너도 잊지 말라고. 주에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는 너도 알지?”
[야. 나 못 믿어? 나 마이클이야.]
“알지, 알지. 그래, 그럼 너만 믿고 있는다?”
자신이 그의 선수에 대한 이적 루머를 퍼뜨리고 다닌 것처럼, 그도 성배에 대한 이야기들을 흘려줄 것이었다.
이적 루머 하나하나가 성배의 몸값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자신의 수익과 실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허투루 처리할 수 없었다.
***
“아아, 요즘 그 친구 때문에 이래저래 시끄럽더만.”
“그 친구? 누구?”
“왜, 있잖아. 안더레흐트의 한국인 친구.”
“아!! 주성배? 그 친구가 왜?”
친분이 있는 에이전트를 통해 기자들에게 이야기가 들어가게 해야 기사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헤르만도 ‘친분이 있는 에이전트’였다.
“요즘 이쪽 업계가 그 친구 때문에 꽤 시끄러워.”
“왜? 여기저기서 이적설이 터져?”
에이전트로서의 평가는 몰라도 사람으로서의 평가는 하늘을 찌르는 헤르만이었다.
자주 만나는 기자들 중에서도 당연히 헤르만이라는 사람에게 반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뭐 그것도 있고. 이적설은 아주 난리 나지. 어제는 이 팀이 영입 제안을 했다고 했는데, 오늘은 거기가 아니고 저기라네? 도대체 뭔 소리들을 하는 건지...”
“자네가 그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진짜 장난이 아닌가 보네.”
기본적으로 헤르만은 이런 루머들에 관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진심과 사실에 입각해 확실한 이야기들이 아니면 입 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배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것보다 같은 팀의 콤파니 그 친구랑 해서 몇 년 안에 빅리그로 나갈 인재니까,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고 난리들이야.”
에이전트 계약은 통상적으로 1년 만기 계약이었다.
마음에 들면 연장 계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1년 뒤, 바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에이전트가 있는 선수라고 해도 다른 에이전시의 러브콜은 항상 이어졌다.
꽤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런 건가? 확실히 그럴 만도 하겠네. 에이전트 입장에서는 잘 팔리는 선수를 맡아야 자기한테 떨어지는 것도 많으니까.”
계약 규모에 따라 퍼센티지로 커미션을 떼가는 에이전트였기 때문에 계약 규모가 큰 한 선수만 맡아도 애매한 선수 열 명을 맡는 것보다 수익이 높았다.
유명 선수를 유치하려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자네도 특종 잡으려면 이런 선수들에 대해서 좀 파봐. 누가 알아? 나중에 유명해지면 크게 써먹을 날이 올지.”
“아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헤르만도 본인의 임무를 완수했다.
이래저래 어설프긴 했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이미지 자체가 이런 쪽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기자들을 낚고 있었다.
***
[EPL 소속 클럽들, 주성배 쟁탈전 돌입!!]
[리그앙 챔피언 올랭피크 리옹, 주성배 노린다!!]
[주필러 리그 최고의 레프트백, 다음 시즌은 스페인에서?]
성배의 앞에 신문과 잡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하나같이 전부 성배의 이적설을 다루고 있었다.
버크만과 헤르만, 그리고 그들의 인맥들이 몇 주 동안 바쁘게 돌아다닌 성과였다.
“어때? 이제 만족해?”
성배와 함께 식탁에 앉은 헤르만이 말했다.
자신이 뛰어다닌 성과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마냥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예상한 대로.
“네. 감사해요, 아저씨.”
그랬기에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자신의 기준을 어겨가면서까지 도움을 주었으니,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온 말이었다.
헤르만이 어떤 사람인지 가족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에휴, 뭘.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한 건 아니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으니까 계약 제대로 따내게.”
“예. 감사합니다.”
의외였던 것은, 버크만도 헤르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에이전트 업계에서는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에이전트가 능력과는 별개로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이라나.
“이번 여름에 이적하는 게 목적이라고?”
“예. 그래서 겨울부터 밑밥을 까는 중입니다.”
“그래, 뭐. 나야 그래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더군. 어떻게, 입질은 좀 있나?”
“예. 벌써부터 여러 클럽들이 관심을 보여서 생각보다 일찍 바빠질 것 같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바쁘게 움직인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이번 성배에 대해 문의하는 클럽들이 순식간에 불어난 것이었다.
겨울에 이적할 마음은 없지만, 여름까지 이들의 관심을 유지해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는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빨리 벨기에를 떠나라고. 그래야 내가 이 짓을 또 안 하지.”
“하하, 감사해요, 아저씨. 계획한 대로 이뤄지라고 하시는 말씀이시죠? 하하.”
성과가 나왔으니 분위기가 나쁠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
“가끔 어머니랑 유빈이랑 같이 놀러 오세요.”
“아아, 됐다. 한동안 비행기는 쳐다도 안 볼 거야. 내 나라가 좋아.”
후반기가 시작되기 1주일 전, 해외공관 파견 임기를 마친 장석의 귀국 날이 되었다.
장석이 업무용으로 받았던 차를 반납했기 때문에 성배의 차로 공항까지 이동했다.
“에이, 그러시면 저랑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볼 텐데요?”
“임마, 네가 한국에서 뛰어도 시즌 중에는 두 번 보면 많이 보는 거 아니야? 뭘, 특별한 것처럼 말하고 있어.”
서울에서 따로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을 때도 자주 보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어머니, 유빈이와는 떨어졌지만, 아버지와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는데, 이제는 또 헤어질 시간이었다.
“에이그, 이제는 진짜로 독립하게 되겠구나.”
“......”
경제적으로는 이미 완연한 독립을 이루었지만, 혼자 살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최소한 장석이 알기로는.
전생에서의 긴 시간들을 알리 없는 장석이었기에 아예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훌쩍 커버린 아들이었기에 믿고 돌아갈 수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나 엄마나 7급 공무원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라 네 국적이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너는 열심히만 살면 돼.”
고시로 시작해 정치인을 노리는 사람 중에도 아들이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해서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사람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40대 중반에 이제 막 5급으로 올라선 장석이나 혜진이 성배의 국적 때문에 고생할 일은 적어도 직장생활 부분에서는 없다고 봐야 했다.
네티즌들이 신상털이라도 털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곘지만.
“그래도... 나중에 제가 유명해지면 아버지랑 어머니도 알려지실 텐데...
아직은 자신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아서 별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또 몰랐다.
대한민국의 네티즌들.
향후 악명을 떨치는 그들의 마수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귀화 문제로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유빈이에게 피해가 간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하하, 그러면 너한테 용돈 받으면서 여행 다니지, 뭐. 정 힘들면 그렇게 하면 돼. 돈 걱정 없이 푹 쉬면 좋지. 그러니까 걱정은 하지 마라. 네가 아빠, 엄마 걱정하기에는 백 년은 일러.”
장석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성배를 달래주었다.
큰맘 먹고 결단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성배는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이 고생하시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장석이나 혜진이나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나중에 유빈이도 유학 가고 싶다고 하면 걔는 네 돈으로 공부시켜라. 에휴, 미술 공부까지는 무리야, 무리.”
“응? 걔를 왜 제 돈으로 공부시켜요? 뭐 예쁘다고. 아버지, 어머니 딸이니까 아버지가 알아서 하세요. 제 돈은 제 돈이죠, 하하.”
“에라, 정도 없는 놈. 그러니까 나라도 버렸지. 크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인 남자들의 이별에 눈물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은 비록 편치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빠 간다.”
“네, 들어가세요. 이번에 가시면 일 좀 줄이고 유빈이랑 좀 놀아주시고 그러세요.”
“유빈이랑 놀아주라고? 유빈이가 무슨 애인 줄 알아? 내가 놀아달라고 사정해도 안 놀아주는데... 네가 딸 키워봐라. 그 나이쯤 되면 아빠랑은 숨도 쉬기 싫어하는 법이야.”
성배는 엘리자베스가 일곱 살일 때를 마지막으로 딸을 키워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저 웃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엘리자베스가 커서 자신에게 짜증을 달고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너는 네 나라에서 열심히 뛰어. 나는 내 나라에서 내 일 열심히 할 테니까.”
“알았어요. 자꾸 네 나라, 내 나라 하지 마세요. 애예요? 자꾸 네 편, 내 편 가르게?”
성배의 말에 크게 웃으며 장석이 탑승 수속을 마쳤다.
장석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성배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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