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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57화 (32/356)

< 낭만필드 - 057 >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승 5패의 부진한 성적으로 탈락하고 말았지만, 안더레흐트는 여전히 주필러 리그의 강자였다.

18라운드를 끝으로 주필러 리그가 휴식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안더레흐트는 2위 그룹을 승점 4점 차이로 따돌린 1위에 올라있었다.

“아아, 이제 드디어 휴식인가.”

후반기를 대비하기 전, 1주일의 짧은 휴가였지만 어쨌든 선수들에게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 전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콤파니가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안더레흐트의 에이스이자 벨기에의 희망이라는 포지션에 위치하다 보니, 이래저래 피곤할 수밖에 없는 선수였고, 휴식이 가장 반가운 선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푹 쉬다 와라. 너도 초반 같지 않아.”

옆에서 함께 빠져나가던 성배가 말을 받았다.

콤파니에 비하면 성배는 비교적 체력 관리가 잘 된 편에 속했다.

“야, 이래 봬도 나 프로 3년 차야. 아직 1년도 안 된 게 어딜...”

2003/04시즌 개막전부터 프로 무대에 데뷔한 콤파니와 2004/05시즌 후반기가 되어서야 데뷔한 성배.

콤파니의 경력이 성배의 5배가 넘었다.

“누가 뭐래. 그냥 너 퍼졌다고. 그건 그냥 보면 아는 거다.”

어쩌라고?

전생의 16년 경력을 가져올 필요도 없이, 축구를 조금 볼 줄 안다, 하는 사람들은 콤파니의 몸이 조금은 무거워졌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이번 시즌에는 20경기만 뛰겠다며? 벌써 선발 출전만 스무 경기 가까이 됐지?”

“한... 열여덟 경기쯤 되지 않았나. 챔피언스리그 다섯 경기에 리그도 한 네다섯 경기 빼고 다 나간 것 같은데...”

데샤흐트가 겡크와의 경기를 계기로 주전 경쟁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경기를 출전하고 있는 성배였다.

한 시즌 동안 선발 출전은 20경기에서 25경기 정도, 그리고 총 30경기 정도 출전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미 선발 출전 경기가 20경기 가까이 되었다.

“괜찮은 거냐?”

분명 시즌 시작 전, 체력 배분을 위해 20경기 정도만 선발로 나서고 싶다고 말했던 성배였다.

벌써 20경기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으니 콤파니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말이라고... 매 경기 베스트이기는 힘들지만,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

“역시 걱정할 필요 없었네. 가끔은 베테랑이랑 이야기하는 것 같단 말이야.”

굳이 숨기지 않았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노련한 모습 좀 보여준다고 해서,

‘아, 얘는 원래 베테랑인데 회귀한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자일 것이었다.

신인이 노련한 것은 장점이면 장점이지, 단점이 되지 않았다.

모든 방법을 활용해서 가치를 높여야 하는 성배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럼 푹 쉬고 일주일 뒤에 보자.”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제 차에 올라 훈련장을 빠져나가면, 일주일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래. 푹 쉬어라. 괜히 딴짓하지 말고.”

“너는 안 가?”

“아, 잠시 통화할 게 있어서.”

“그래라. 그럼 나 먼저 간다.”

콤파니는 차에 올라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혼자 주차장에 서있었다.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며 성배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버크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버크만. 접니다, 주성배.”

[네. 끝나셨습니까?]

“지금 출발합니다.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버크만과 약속이 있었던 성배는 전화를 끊고 바로 차에 올랐다.

굉장히 중요한 대화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면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속장소에 먼저 와있었던 버크만이 성배를 보자마자 던진 첫 마디였다.

“당연하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늘 뵙자고 한 겁니다.”

그리고 성배 역시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반응했다.

이미 두 사람 간의 이야기가 끝나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업무의 영역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버크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래. 에이전트라면 이래야지.’

그리고 그 모습이 성배를 만족스럽게 했다.

평소에는 정말 이 사람이 업계에서 탑을 찍는 그 사람이 맞나, 싶다가도, 일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순식간에 남다른 분위기를 내뿜었다.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뭡니까?”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팀을 옮기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오늘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적에 관한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으로 전략을 세우기에 앞서, 이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 저도 우승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니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고 합니다.”

우승보다 본인의 성공에 더 집중하는 성배였지만, 그래도 우승 트로피 한 개쯤은 가지고 싶었다.

전생과 더해 20년에 가까운 프로 생활 동안 단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따내지 못했다.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개인적으로도 여름을 추천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레프트백을 영입할 클럽이 마땅히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좋은 매물이 시장에 나와도, 그 매물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가 없다면 결국 가격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성배는 분명 좋은 선수이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유망주였지만, 겨울 이적시장은 유망주의 영입보다는 즉시 전력감을 영입하는 기간이었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면 다가오는 여름 이적시장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럼 두 번째. 다음 행선지로는 어느 리그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름으로 이적 시기를 잡았다면, 이번 겨울부터 밑밥을 깔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목표를 정할 때였다.

목표가 확실해야 적절한 밑밥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음... 최종 목표는 EPL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벨기에 선수들은 보통 EPL을 꿈의 리그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황금세대라 불리는 콤파니, 아자르, 베르통언, 베르마엘렌, 루카쿠, 벤테케, 쿠르트와, 데 브라위너, 펠라이니 등 벨기에의 탑클래스 선수들은 거의 모두가 EPL에서 활약했다.

당연히 벨기에 내에서는 EPL의 인기가 가장 높았고, 그래서 성배도 EPL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면 잉글랜드 구단들을 노리면 되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성배도 바로 EPL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뛰어난 피지컬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EPL에서 뛰기엔 아직 본인의 피지컬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행선지로는 프랑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향후 몇 년 뒤에는 벨기에 축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한 유망주들이 벨기에에서 바로 빅리그로 향하는 경우가 늘어나지만, 지금은 프랑스가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싸지 않은 이적료로 뛰어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프랑스어까지 할 줄 아는 유망주를 영입할 수 있다는 것은 프랑스 클럽들에게도 큰 메리트였다.

벨기에 유망주들에게도 말이 통하고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빅리그의 관심을 받기 쉬운 프랑스 진출은 좋은 기회였기에 프랑스 리그는 네덜란드 리그와 함께 벨기에 유망주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미랄라스, 아자르 등이 프랑스에서 빅리그 진출의 꿈을 키우는 중이었다.

“프랑스, 라... 혹시 네덜란드어는 할 줄 아십니까?”

“예. 네덜란드어도 할 줄 압니다.”

사실 프랑스어보다는 네덜란드어를 더 잘했다.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어 지역권의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도 고려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네덜란드는 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트벤테, AZ. 딱 다섯 팀만 고려하고 있습니다.”

분데스리가의 부진을 틈타 리그 순위 4위까지 치고 올라간 프랑스 리그앙과 7위에 머물러있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지만, 상위권 클럽들 사이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었다.

특히, 아약스와 PSV는 유럽 유수의 클럽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 화수분이었기 때문에 빅리그로 나가기에도 수월했다.

“그렇다면... 목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위권 클럽으로 잡으면 되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프랑스의 중상위권 이상 클럽, 네덜란드의 상위권 클럽. 그쪽을 목표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주성배 선수는 이제 여기 신경 쓰지 말고 경기에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적을 노릴 시기가 정해졌고, 원하는 클럽의 리스트가 뽑혔다.

이제는 버크만의 능력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최대한 많은 클럽을 영입전에 끌어들이고, 그들을 적당히 부추기며 경쟁을 심화시켜 좋은 조건을 얻어내는 것.

버크만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과연 어디까지 몸값을 올릴 수 있으려나.’

전생에서는 뛰어난 에이전트와 함께 일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일적인 관계를 떠나 사적으로도 강하게 묶여있었던 헤르만이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그것보다는 성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에이전트 자체가 없었다.

능력 있는 에이전트의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

그 결과가 상당히 기대되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한 번 믿고 맡겨보죠. 저는 그라운드 위에서 제 역할에 열중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얼마든지. 저만 믿고 경기에만 열중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설사 신이라고 해도, 주성배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좋은 조건 못 얻어냅니다.”

식사를 끝냄과 동시에 대화까지 마친 두 사람은 헤어지기 전 두 손을 맞잡았다.

이적 예상 시기까지는 아직 반년이 남아있었지만,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시즌 중반에 휴식기를 갖는 것은 선수들이 굉장히 선호하는 리그 일정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중계권 파동으로 리그에서 돌고 있는 자본 규모가 확 줄어든 분데스리가가 그럼에도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휴식기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성배야!! 내 선글라스 못 봤어?”

“아버지. 그런 건 아버지가 찾으셔야죠. 저는 어머니가 아니라고요.”

덕분에 성배도 짐을 싸고 있는 장석을 도울 수 있었다.

해외공관 파견 근무 기간 3년.

이제 며칠 뒤면 장석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다.

“아아, 지친다. 해외 근무는 다른 건 다 버티겠는데 이 짐 챙기는 게 제일 싫어.”

“그래도 대충 끝났네요. 아버지가 정리만 좀 더 체계적으로 해놓으셨어도 며칠은 빨리 끝났을 텐데.”

장석의 귀국으로 벨기에에 남아야 하는 성배도 새집을 구해야 했다.

버크만을 통해 얼마 전에 집을 구한 성배 역시 장석과 함께 짐을 챙기기 시작했는데, 성배는 이미 자신의 짐을 전부 챙긴지 오래였지만, 장석의 짐을 챙기기 위해 며칠을 더 고생해야 했다.

“아, 네 새집. 거기 괜찮더라. 여기보다 더 나은 것 같아.”

“그래야죠. 여긴 공짜고, 거긴 돈 내고 사는 덴데요.”

이미 수입에서는 성배가 장석을 훌쩍 뛰어넘은지 오래였다.

반년 정도 살 월세 집으로 좋은 곳을 구하기에는 충분한 수입이었다.

“키야, 누구 아들인지 참 잘 컸네.”

“네, 네. 아버지 아들입니다.”

이미 자신의 길을 정하고 훌륭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아들.

자신의 기특한 아들, 성배를 바라보는 장석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낭만필드 - 05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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