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6 >
“어어!! 골!! 골입니다!! 들어갔습니다!!”
“아, 이게 들어가네요!!”
분명 성배의 실수였다.
실수라기보다는 애초에 처리하기 힘든 볼이었다.
그런데 우연과 선택이 겹치고 엇갈리면서 골망을 갈랐다.
“처리하기 어렵지 않은 크로스였거든요? 그런데 도블라스 골키퍼가 너무 판단을 서둘렀어요!!”
아웃 프론트에 걸리면서 볼은 바깥쪽으로 휘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골키퍼 가슴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블라스 골키퍼의 빠른 판단이 독으로 작용했다.
볼을 처리하기 위해 미리 앞으로 움직이다가 역동작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주의 크로스가 워낙에 정확하다 보니,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주성배 선수의 크로스 정확도는 100%에 가까웠으니까요!!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하필이면 이 순간에 실수가 나왔고, 예상치 못한 실수가 오히려 골이 되었어요!!”
“주에게는 운도 따라주고 있습니다!! 오늘 베티스는 주, 한 선수에게 지나치게 휘둘립니다!!”
“주성배 선수, 오늘 일 한 번 내나요? 엄청난 공격력을 선보이고 있어요!!”
그동안 빅클럽들이 주목했던 부분은 성배의 수비력이었다.
첼시의 아르옌 로번과 리버풀의 루이스 가르시아, 레알 베티스의 호아킨을 상대하면서 크게 밀리지 않은 열여덟의 레프트백.
다른 클럽들이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수!! 수비 부담이 사라지니까 진가를 드러냅니다!! 굉장한 공격력도 갖추고 있는 선수였습니다!!”
“수비에서 부담을 갖도록 만들지 못하면 이런 꼴을 당하는군요!!”
물론 해설진이 흔히 사용하는 과장법이었다.
호아킨이 빠져서 수비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것은 확실히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늘 경기에 나선 베티스 선수들이 2군 선수들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야, 너 오늘 뭐 좀 되는 날인가 봐!! 이런 게 들어가?”
음펜자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성배가 벨기에로 귀화한 이후, 같은 귀화 선수여서 그런 것인지 부쩍 호의를 내보였다.
“그러게. 오늘 좋은데?”
성배도 마주 웃어 보였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
내 편으로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좋아. 좀 막힌다 싶을 때까지는 계속 이대로 가자.”
“그래 주시면 고맙죠.”
성배가 있는 왼쪽을 이용한 공격.
효과가 엄청났다.
굳이 지금 전술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바트!! 저 녀석, 저거 완전히 무너졌어요. 이제 바트 차례에요.”
지금까지는 성배가 그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사실 측면 공격은 윙어인 구어의 역할이었다.
성배도 계속 공략을 시도하겠지만, 이제는 굳이 구어가 서포트해줄 필요도 없어보였다.
“좋아!! 안 그래도 슬슬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고!!”
분위기가 좋은 성배를 살려주기 위해 서포트에 집중하던 구어가 전의를 다졌다.
후안데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구어에게 연결!! 후안데와 대치, 아!! 주!! 중앙으로 침투합니다!!”
후안데와 구어가 대치하는 동안, 성배가 뒤쪽에서부터 달려들었다.
뒤에서 출발해 박스 근처까지 도달하는 동안 충분히 가속한 성배였다.
이를 발견하고 상대 수비수들이 따라왔지만 이미 속도 차이가 상당히 나는 상황이었다.
‘됐다!!’
성배가 수비라인을 뚫은 순간, 구어의 패스가 절묘하게 이어졌다.
“한 번 접고!! 오른발 슈팅!!”
타이밍은 살짝 늦었지만 5백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활용하기 까다로웠고, 수비수 한 명이 늦게 빠져나왔다. 온사이드였다.
“아!! 아깝습니다!! 골대를 때리는 주의 슈팅!! 베티스,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먼 쪽의 포스트를 보고 인프런트로 감았지만, 아쉽게 골대를 때리고 말았다.
골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멋진 플레이였다.
“아, 베티스. 승리를 포기한 경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밀리고 있습니다.”
“분명 주전들에게 휴식을 줘야 하는 타이밍은 맞아요. 그렇지만, 홈팬들 앞에서 이런 경기를 보여주는 것도 안 되죠!! 무슨 수를 쓸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후안데의 경기력이 올라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구어까지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후안데의 정신력은 점점 가루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IN - 3. 메일리 / OUT - 44. 후안데]
결국, 베티스의 페레르 감독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교체입니다.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베티스에서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아무리 부담 없는 경기라고 하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경기 끝에 패배하면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아껴서 얻어낸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좋은 판단입니다.”
페레르 감독은 결국 아껴놓으려 했던 주전 라이트백 메일리를 투입했다.
주전 체력 아끼려다가 선수단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판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후안데...’
후안데를 바라보는 성배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에게서 전생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선수도 그냥 그렇게 하위 리그를 전전하게 되겠지.’
솔직히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베티스의 포지션 경쟁이 그리 치열하지 않음에도 그 경쟁을 이길만한 경쟁력이 없는 선수였다.
그래서 더욱 전생의 자신이 떠올랐다.
B팀을 운영하는 라리가의 특성상 지금은 하부리그에서 활약 중일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벨기에나 네덜란드, 스위스 등 중소리그에서 뛸 수 있겠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할 것이었다.
‘아니지. 아직은 이럴 때가 아니야.’
성배를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쓸데없이 감상적이 된 마음을 추슬렀다.
아직은 그나 자신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남을 걱정해줄 때는 아니었다.
‘잘 풀리기를.’
그래도 일말의 미안함은 있어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빌어주었다.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젠장. 잘난 선수를 상대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1부 리그 팀의 주전 선수들을 상대할 때는 자신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 기쁘기만 했다.
그런데 후보 선수나 하부 리그 선수들을 상대해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때는 괜히 께름칙한 뭔가가 있었다.
‘내가 남들 생각할 때냐. 건방져졌구나!!’
-짝!!
배부른 투정이었다.
어느 정도 살만하고 배가 불러오니 전생의 그 비참함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성배는 스스로 뺨을 때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동정해서 뭐 어쩌자고.’
아름다운 녹색의 그라운드.
하지만 그 속은 회색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청량한 녹색이지만 이 안에서 보면 한없이 삭막한 전쟁터였다.
경쟁에서 밀린 선수가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도태되지 말자.’
전반전도 채 마치지 못하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는 후안데의 모습은 슬슬 현실에 만족하기 시작했던 성배를 다시 깨워주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최소한 이번 시즌에는 1군의 그라운드에 다시 발을 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자신도 직감한 것일 터였다.
이 세계가 원래 그런 세계였다.
초라하게 그라운드에서 퇴장하는 후안데의 모습.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딘가 자신의 전생과 비슷했고, 그것이 성배를 다시 목마르게 했다.
***
전반전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후안데가 그라운드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주전 라이트백인 메일리가 채웠다.
그러나, 그 정도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주가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안더레흐트의 코너킥을 전담하고 있는데, 양발을 모두 사용하네요. 위치와 관계없이 그때그때 코너킥을 올리는 발이 달라지고 있죠?”
메일리의 투입과는 관계없이 안더레흐트는 끝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왼쪽 공격이 살짝 막히기 시작하자, 오른쪽과 중앙을 활용한 것이었다.
성배가 공격을 이끄는 동안 힘을 아껴놓았던 선수들은 후반전에 남은 힘을 쏟아부었다.
‘한 골만 더 넣었으면 좋겠는데...’
후반전에도 안더레흐트가 경기를 주도했지만, 득점은 터지지 않았다.
스코어는 여전히 2-0.
완승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진짜 제대로 승리했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한 골 정도는 더 필요했다.
‘뱅상. 롤랑드. 한 골만 넣어봐.’
코너킥을 준비하던 성배는 콤파니와 후아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공권이 그닥 좋지는 않은 안더레흐트에서 그나마 기대해볼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믿음직스럽네.’
193cm의 후아즈, 192cm의 콤파니.
박스 안에 자리 잡은 모든 선수 중에 가장 컸다.
골키퍼인 도블라스도 184cm에 불과했으니 한 번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거 하나 올려주지.’
-뻥!!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신경 써서 코너킥을 처리한 성배였다.
‘느낌이 괜찮은데...’
코너킥 자체의 궤적도 좋았지만, 동료들의 움직임이 좋았다.
주력이 되는 콤파니와 후아즈의 움직임과 그 둘이 더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나머지 선수들의 서포트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코너킥, 올라옵니다!! 중앙에서 콤파니!!!!!”
코너킥이 올라오기 직전, 가까운 포스트 쪽에 서 있던 콤파니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뒤로 돌아나갔다.
그리고 콤파니를 따라가는 수비수는 반더헤그가 몸으로 막아냈다.
잠깐이지만 콤파니가 자유를 찾았고, 잠깐이면 충분했다.
“골!! 골입니다!! 경기 종료 직전, 콤파니가 세 번째 골을 터뜨립니다!!”
“아아, 베티스 수비진이 콤파니 선수를 놓쳤어요. 이런 걸 놓치는 선수가 아니거든요?”
종료 직전에 나온 세 번째 득점.
안더레흐트는 베티스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베티스의 볼로 경기 재개... 되는 순간, 주심의 종료 휘슬을 불었습니다. 안더레흐트와 베티스의 챔피언스리그 G조 조별리그, 마지막 6차전!! 안더레흐트가 베티스를 3-0으로 잡아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하프라인에서 베티스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주심의 종료 휘슬이 경기의 끝을 알렸다.
3-0.
안더레흐트는 마지막 경기에서 드디어 승리를 거두며 챔피언스리그 첫 승을 거두고 퇴장하게 되었다.
“오늘의 히어로는 역시 주성배 선수가 아닐까 싶네요.”
“맞습니다. 한 골과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세 골에 모두 기여하며 일찌감치 안더레흐트가 승기를 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MOM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세 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베티스의 전의를 전반전 중반이 되기도 전에 꺾어버린 성배의 차지였다.
지난 다섯 경기에서 수비력을 어필한 것에 이어 마지막 경기에서는 공격력까지 어필,
개인적으로도 크게 만족한 경기였다.
‘하아... 이렇게 끝났구나.’
아쉽지만 괜찮은 마무리였다.
2005/06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이제 퇴장할 시간이었다.
‘언제 또 이 무대를 밟을 수 있을까?’
다음 시즌에는 더 큰 무대로 나가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챔피언스리그의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꽤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 무조건 돌아온다.’
약한 마음을 떨쳐냈다.
여전히 최종 목표는 빅리그 진출이었다.
하지만,
빅리그로 진출한 뒤에는 다시 빅리그에서 챔피언스리그를 노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할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야. 잘 있어라.’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성배는 별들이 반짝이는 챔피언스리그의 엠블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낭만필드 - 05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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