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5 >
‘아니야.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긴 해.’
성배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생각해보면 호아킨이 오늘 경기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했다.
현재 상황이 그랬다.
‘어차피 두 팀 다 얻을 것이 없는 대결. 1승이라도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가 더 이상한 거지.’
현재까지 레알 베티스는 2승 1무 2패, 승점 7점으로 조 3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안더레흐트는 5전 전패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2위 첼시가 3승 1무 1패로 승점 10점을 챙기고 있었는데, 골득실에서 베티스와 9점이나 차이가 나고 있어서 사실상 16강에 진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베티스나 안더레흐트나 굳이 이 경기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영상에서 호아킨은 분명 어딘가 불편해 보였지. 확실히 정상 컨디션은 아니었어.’
호아킨과의 재대결을 위해 찾아본 최근 플레이 영상들.
그 영상들 속에서 호아킨은 분명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챔피언스리그는 베티스에게 과분한 무대였고, 그 과분한 무대를 견뎌내기 위해 베티스의 A이자 Z인 호아킨은 퍼져버렸다.
‘주전은 한 명밖에 없네.’
호아킨이 없다는 충격에서 벗어난 뒤, 성배는 천천히 베티스의 선발 명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 시즌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 중 선발로 출전한 선수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인 알베르토 리베라 단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져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이건?’
리베라를 외에도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하는 세 명의 선수를 빼면 나머지 필드 플레이어들은 모두 후보 선수들이었다.
이번 시즌 한 경기도 출전하지 않았던 선수가 무려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유소년팀 선수였다.
‘져도 괜찮은 경기라... 아주 철저하게 박살 내주지.’
져도 괜찮은 경기.
주전 선수가 한 명 밖에 나오지 않은 경기.
완벽히 박살내기에,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호아킨은 나중에 잡아주지.'
호아킨에게 복수하겠다는 목표는 이미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이 경기를 통해 이름을 날리겠다는 두 번째 목표라도 달성해야 했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마지막 무대.
성배가 유럽 유수의 빅클럽들을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2005년의 마지막 무대였다.
***
“아, 베티스.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수비적인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거든요? 주전 선수들이 대부분 체력 저하에 시달리면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고, 백업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르려 하다 보니 수비적이 될 수밖에 없죠.”
오늘 베티스의 전술을 5백이었다.
표면적으로는 4-5-1이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선 선수는 원래 자리가 수비수였고, 실제로도 수비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 참... 3백이 수비할 때 5백 되는 건 봤지만, 5백은 내 눈으로 처음 보네.’
5백.
이미 예전에 사장된 전술이지만 다른 곳도 아닌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베티스가 최근 얼마나 상황이 안 좋은지를 말해주는 포메이션이었다.
‘94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써먹었었지.’
성배가 국민학교 1학년이던 시절.
한국 대표팀이 그때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3백이 곧 5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3백에서 윙백은 미드필더로 분류되며, 센터백들과 라인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터치 라인 방어와 공격을 더 중시하고, 5백에서 풀백은 수비수로 분류되며, 센터백들과 하나의 라인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 왼쪽을 내 독무대로 만들어야겠다.’
또한, 윙백으로 출전하느냐, 풀백으로 출전하느냐에 따라 경기력에 편차가 있는 선수들이 많은 만큼, 분명 플레이에도 차이가 있었다.
오늘 측면 수비수로 나온 베티스의 선수들은 전부 풀백이 원래 포지션인 선수들이었다.
“측면으로 최대한 빼줘요. 터치 라인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할 테니까.”
성배는 안더레흐트의 플레이메이커, 제터베리에게 측면으로 자주 볼을 빼달라 부탁했다.
5백을 상대로 중앙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세 명의 센터백과 한 명의 미드필더가 마름모꼴로 포진해서 공격수들을 그 안에 가둬놓기 때문이었다.
“터치 라인이라... 알았다.”
반면, 터치 라인은 아무리 수비수가 많아도 한 명, 많아야 두 명만 제치면 뚫을 수 있었다.
한쪽이 막혀있기 때문이었다.
성배는 터치 라인 돌파를 통해 베티스의 측면을 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빅리거라고 해도 교체로도 한 경기 못 나온 선수한테 밀리면 안 되지.’
베티스의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후안데.
이미 전반기가 거의 다 마무리된 시점에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선수였다.
***
“중앙에서 제터베리, 왼쪽 측면으로 길게 전환합니다!!”
제터베리는 성배가 요구한 대로 경기 초반부터 볼을 연결해주었다.
“주와 후안데의 일대일!!”
“챔피언스리그 G조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선수죠? 소속팀 안더레흐트는 5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지만, 주성배 선수는 그 속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서 안더레흐트의 성적은 분명 좋지 않았다.
하지만 5패를 하는 과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리버풀의 홈에서 한 번 두 골 차 패배를 당했을 뿐, 나머지 경기들은 모두 0-1 패배였다.
안더레흐트의 수비진이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덕분이었다.
“확실히 안더레흐트의 수비진은 탄탄한 수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팀들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저항에 고전했죠?”
그리고 성배는 그 다섯 번의 패배 속에서 콤파니와 함께 빛을 내뿜었다.
콤파니와 비교하면 흐릿한 빛이었지만, 빛은 빛이었다.
‘자세가 어정쩡하네.’
챔피언스리그 다섯 경기는 성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섯 경기 동안 로번과 호아킨, 가르시아를 상대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한 걸음 더 성장한 것이었다.
1군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후안데의 수비는 그래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 다리 사이로 빼냅니다!! 터치 라인 돌파!!”
성배의 공격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정확한 타이밍과 위치 선정, 공간 활용을 바탕으로 한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화려함을 흉내 낼 정도까지는 성장했다.
‘약해빠졌군.’
아직 후안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기 때문에 가볍게 어깨를 부딪쳐보았다.
반발력이 형편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성배는 어깨를 집어넣고 오른팔을 들어 후안데를 떨쳐냈다.
“볼은 주에게!! 바로 왼발 크로스!!”
성배의 돌파력은 분명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크로스만큼은 최고 수준이었다.
즉, 돌파만 된다면 성배만 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는 몇 없었다.
“반대편으로, 음펜자!!!!!”
베티스의 중앙 수비는 분명 두터웠다.
그래서 반대편 골대 쪽으로 깊숙이 크로스가 투입되었고, 미리부터 돌아들어 가고 있었던 음펜자의 머리에 정확히 도달했다.
“골!! 골입니다!! 경기 시작 7분 만에 안더레흐트가 첫 골을 터뜨립니다!! 음보!! 음펜자!!”
완벽한 골이었다.
후안데를 무너뜨린 성배의 돌파와 그에 이은 크로스.
음펜자의 정확한 헤더.
베티스의 도블라스 골키퍼가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었다.
“안더레흐트의 이번 조별리그 첫 골!! 첫 골이 터집니다!!”
“아아, 정말 오래 걸렸어요!!”
첫 골을 넣기까지 여섯 경기가 필요했다.
당연히 리드를 잡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안더레흐트, 이대로 첫 승 갑니까?”
“충분히 가능해요!! 오늘이 마지막 기회이자 최고의 기회입니다!!”
2차 예선과 3차 예선을 거쳐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사라질 수는 없었다.
***
“제터베리, 왼쪽으로 찔러줍니다!!”
첫 시도에서 골을 만들어낸 이후, 제터베리는 성배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성배는 기대에 100% 부응했다.
“주와 후안데, 달립니다!!”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경기에 나선,
그리고 7분 만에 돌파당하며 첫 실점의 빌미를 내준 후안데는 정신 줄을 살짝 놓치고 있었다.
‘오늘 경기... 됐다.’
후안데와 함께 경합을 벌이면서 성배는 확신을 가졌다.
오늘 경기에서 측면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아!! 후안데가 균형을 잃었고!! 주!! 볼 잡아냅니다!!”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수비수가 상대를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성배와의 어깨 싸움에서 완벽히 패배한 후안데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 사이 성배가 볼을 따라잡았다.
“중앙으로 낮고 빠르게!! 아쿤, 헤더!!”
안더레흐트 공격수들의 제공권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성배는 크로스가 뛰어난 선수였고, 낮고 빠른 위력적인 크로스는 그들에게 적지 않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골키퍼가 뛰쳐나오기에는 애매한, 그렇다고 골대를 향해 움직이는 센터백이 걷어내기에도 부담스러운 위치로 날카롭게 감긴 크로스에 아쿤이 몸을 날려 반응했다.
“도블라스 펀칭!! 골키퍼가 겨우 막아냅니다!! 안더레흐트의 코너킥!!”
“주성배 선수!! 완전히 미쳤네요!! 왼쪽 측면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후안데는 본인의 베스트 기량을 선보여도 성배를 막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더 자주 줄게. 지금은 네 쪽이 제일 좋다.”
게임을 조율하고 있는 제터베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든지요. 제 얼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게 해주죠, 뭐.”
돌파 시도가 모두 성공하면서 성배도 점점 자신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호아킨과의 맞대결이 무산되어 실망했던 것이 조금 전이었는데, 지금은 호아킨이 나오지 않아 수비 부담이 사라졌다는 것에 감사했다.
***
“반더헤그가 왼쪽으로 길게!! 다시 한 번 주에게 연결됩니다!!”
안더레흐트는 성배에게 볼을 집중했다.
실시간으로 성배의 공격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있었다.
“안더레흐트는 오늘 분위기가 좋은 주성배 선수의 왼쪽 측면에 집중하고 있네요. 좋은 판단으로 보입니다.”
후안데가 다시 한 번 성배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울상이 된 얼굴로 이번만큼은 돌파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렇게 힘이 들어가서 수비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돌파가 아니었다.
제터베리가 조금 올라와 주었고, 성배는 제터베리에게 볼을 넘겼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주와 제터베리의 2 대 1 패스!!”
몸에 과하게 힘이 들어갔으니 반응이 느린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볼을 띄워 후안데의 머리 위로 넘긴 제터베리의 패스가 살짝 길었다.
-뻥!!
‘앗, 잘못 맞았다.’
자세를 잡고 올릴 시간은 없었다.
크로스 시도가 조금만 늦어지면 골라인을 넘어갈 상황이었고, 성배는 공중에서 왼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크로스로 이어가기 어려운 자세였기 때문에 의도와 달리 아웃 프론트에 잘못 맞고 말았다.
“중앙으로 크로스, 어어!!”
골키퍼 쪽으로 올라가는 크로스에 성배가 아쉬워한 그때,
볼이 휘었다.
< 낭만필드 - 05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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