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4 >
‘좀 위험한데?’
겐트도 그냥 무너질 팀은 아니었다.
비록 이번 시즌에는 생각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9위까지 떨어져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겐트 역시 저력을 가진 명문.
위협적인 공격도 간간이 보여주고 있었다.
‘어때? 뒤에 공간이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아?’
바로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성배가 있는 왼쪽 측면으로 겐트가 공격을 시도했다.
안더레흐트의 수비수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수비 뒷공간이 넓게 비어 있었다.
겐트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성배는 모험을 선택했다. 자신의 뒷공간을 일부러 열어두었다.
‘어서, 어서, 뒷공간으로 찌르라고.’
전생에서, 성배는 피지컬이 거의 없었는데도 2부 리그 정상급 풀백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때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함정수비였다.
일부러 먹음직스러운 공간을 열어주지만, 사실은 함정.
이미 공간을 열어둔 그 순간부터 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비에서 수 싸움은 상당히 중요했다.
미리 상대의 수를 읽고 움직이면 어지간한 것들은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피지컬이 부족한 선수들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적었기 때문에 수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전생의 성배는 결국 1부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그렇지!!’
뒷공간을 열어두고 그곳으로 패스가 투입되면 먼저 출발해 막아낸다.
이것은 스피드가 없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수비 방법이었다.
예상하고 있어도 사람보다 빠른 볼의 스피드를 쫓아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걸렸다!!’
지금의 성배는 그 스피드가 살아있었다.
뒷공간을 내어주자, 상대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바로 그곳에 공간 패스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성배는 상대가 패스하기 위해 발을 드는 그 순간에 이미 몸을 돌렸고, 상대 공격수에게 패스가 연결되기 전에 미리 몸을 날려 볼을 걷어냈다.
“멋지다!! 태클 죽여줬다고.”
구어는 조금 전 공격에서 너무 멀리까지 나가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의 백업이 있었다면 위기 자체가 오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졸이던 구어는 성배가 이를 막아내자 과하게 좋아했다.
“나도 알아요. 일단 막고 시작하죠.”
시크한 성배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구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너는 더 막을 필요 없겠는데?”
그리고선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IN - 5. 올리비에 데샤흐트 / OUT - 16. 주성배]
교체 사인이었다.
구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인 성배는 바로 사이드라인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3-0으로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급할 필요는 없었고, 천천히, 하지만 주심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 정도로 걸어 나왔다.
“수고했다.”
“그럼, 넘길게요.”
자신을 대신해 투입되는 데샤흐트와 두 손을 마주친 성배에게 코치가 타월을 가져다주었다.
그 타월을 어깨에 두른 뒤, 성배는 물병을 들고 벤치에 가 앉았다.
“다음 경기 때문에 체력을 아끼라고 빼주신 거야.”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도중에 교체되어 기분이 상할 것을 걱정했는지, 옆에서 코치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그것밖에 없죠, 뭐.”
하지만 정작 성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굳이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자면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솔직히 오늘 경기는 우리가 이긴 거잖아요.”
3:0.
안더레흐트의 전력을 생각하면 오늘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데샤흐트가 들어가면서 수비는 더 강해졌으니까.”
코치의 말처럼 확실히 그랬다.
성배가 주전이기는 하지만 수비력만 놓고 보자면 데샤흐트가 조금 더 나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교체는 결국 다음 경기에 나가야 하는 주전의 체력을 아끼는 것이 목적이겠죠.”
이런 상황에서 교체의 목적은 체력 안배밖에 없었다.
다음 경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하는 선수의 체력을 아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선수가 바로 자신.
기분이 나쁠 수 없었다.
“그렇지. 감독님이 팬들을 위해서 챔피언스리그 1승을 노리고 계시니까.”
2005/06 챔피언스리그 G조.
이변은 없었다.
첼시, 리버풀, 베티스와 한 조가 된 안더레흐트는 지금까지 5전 전패.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레알 베티스와의 조별리그 6차전.
베우스만테른 감독은 어떻게든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아요. 1승을 노리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된 선수가 저라는 게.”
성배는 진심으로 흡족했다.
베티스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마지막에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교체된 것은 여전히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 맞대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고, 그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감독이 자신을 빼준 것이었다.
“다음 경기에서 호아킨을 지워버릴 겁니다.”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윙어를 뽑을 때, 한 번은 무조건 거론되는 선수.
그 선수를 지울 자신은 없었다.
“에이, 그건 힘들지 않을까?”
“요즘 경기들을 분석해보니까 많이 지쳤더군요.”
성배가 믿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과부하에 걸린 호아킨의 몸 상태였다.
레알 베티스는 스몰 마켓에 중하위권 클럽이었다.
호아킨의 활약으로 깜짝 돌풍을 일으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지만, 결국 탈이 났다.
“다음 경기. 어떻게든 막습니다. 두고 보세요.”
호아킨을 막는다.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일.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날로 한 단계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경기에 집중하자? 아무리 다 이긴 경기라지만, 너무 앞서나간다.”
“아, 아, 그렇군요. 네.”
***
“아악!!”
“야, 야. 적당히 해라. 다치겠다.”
안더레흐트의 훈련장.
레알 베티스와의 챔피언스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마무리 훈련에 접어든 이곳에서 때아닌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때? 보였어?”
선수들에게 비명을 지르게 한 장본인,
성배는 그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쓰러진 레기아르를 한 번 흘깃 쳐다본 성배는 뒤에서 보고 있던 콤파니에게 물었다.
“아니. 안 보이는데? 장난 아니네. 이거 어지간하면 다 속겠어.”
뒤에서 성배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콤파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규 훈련을 마치고 따로 남아서까지 진행하는 지금의 훈련은 바로 반칙 훈련.
티 나지 않는 반칙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얼마나 연습했는데.”
기본적으로 성배는 반칙에 능했다.
피지컬은 딸리고 지능은 뛰어난 선수들의 생존 비법과 다름없는 것이 바로 반칙이었다.
당연히 성배도 많은 덕을 보았다.
“나 참. 하루종일 그렇게 연습하고도 반칙까지 연습하냐?”
“아오, 이렇게 아픈데!! 이게 반칙이 안 불리다니!! 도대체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성배에게 당하는 역할을 맡은 라마와 레기아르가 투덜거렸다.
여기저기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발목은 차이고, 허벅지나 엉덩이는 찍히고, 허리, 심지어는 젖꼭지까지도 꼬집혔다.
그런데 콤파니는 그중 대부분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냐? 나도 좀 가르쳐줘.”
역시 수비수라서 그런 것인지 콤파니는 성배의 교묘한 반칙에 관심을 보였다.
이거면 두고두고 공격수의 발을 무디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서라. 이런 것도 어울리는 사람이나 쓰는 거지. 너는 그냥 실력으로 밀어붙여. 몸도 좋으면서...”
하지만 성배는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배우면 위험지역에서 괜히 프리킥을 선물하는 수비수가 되고 말 것이었다.
콤파니는 이런 것이 없어도 세계 최고가 될 인재.
애초에 필요도 없었다.
“아구, 아구, 삭신이야. 그런데 지금까지는 왜 안 보여준 거야?”
비명의 주인공.
레기아르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앓는 소리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레기아르의 몸에는 성배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종의 비밀무기지.”
“비밀무기?”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머지않아 빅리그로 갈 거잖아.”
“뭐, 그건 그렇지...”
“음, 우리는 사실 아직 자신 없는데.”
이곳에 있는 선수들은 모두 안더레흐트에서 나름 인정받는 유망주들이었다.
레기아르나 라마는 조금 애매하지만, 콤파니와 성배의 경우에는 그 누구도 주필러 리그에서 오래 남아있을 거라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은 이런 것 필요 없다고.”
“...재수 없지만 사실이지.”
레기아르의 투덜거림은 무시했다.
‘벨기에에서 반칙까지 써가면서 막아야 할 선수는 없다.’ 이것이 성배의 생각이었고,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반칙을 아껴두었지만, 성배는 리그 최고의 레프트백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적하면 언젠가 내 순수한 기량이 통하지 않을 때가 올 거란 말이지. 그때까지는 아껴둬야지. 임팩트를 위해서.”
“참나... 거기까지 계산하면서 사냐? 피곤하겠네.”
“재미없는 녀석...”
“......”
성배의 말에 레기아르는 고개를 저었다.
라마는 혀를 찼다.
그리고 콤파니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깨달음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러면 무슨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고.’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는 선수였다. 한 마디 한 마디로 뭔가를 깨고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전생에서보다 먼저 포텐셜이 터지려나?’
그렇다면 환영이었다.
어차피 콤파니는 자신의 경쟁자가 아니었고, 대표팀에서든 소속팀에서든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동료 수비수였다.
조금이라도 먼저 터지면 터질수록 좋았다.
‘어떻게 변하려나. 많이 좋아지면 도움받기도 쉬울 텐데...’
세계 최고의 센터백이 될 콤파니.
그에게 빚을 지워놓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벨기에와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이자 핵심 선수.
그런 선수가 도와주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
성배의 2005/06시즌 챔피언스리그 마지막 경기가 될 레알 베티스 전은 베티스의 홈에서 치러졌다.
하루 먼저 베티스에 도착한 안더레흐트 선수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히 몸을 풀었다.
그리고 경기 전날까지 잘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성배 역시 컨디션을 완벽히 끌어올려 홈경기 못지않은 몸을 만들었지만, 심리적인 부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경기 전, 양 팀의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었다.
레알 베티스의 선발 명단에서 호아킨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장이었다.
“코치!! 이거 확정된 것 맞죠? 잘못 나온 것도 아니고.”
“응. 그런데? 왜?”
성배가 내뿜는 아우라에 당황한 코치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코치가 당황하는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원래 성배의 성격이었다면 아마 호아킨이 빠져서 상대하기 쉬워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을 것이었다.
‘이번에 갚아주려 했더니...’
하지만 지금은 원래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맞대결을 기대했다가 그것이 무산되어 아쉬워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5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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