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3 >
A매치 주간이 끝나고 다시 리그 일정이 시작되었다.
A매치를 치르기 위해 2주 동안 흩어져 있었던 안더레흐트 선수들은 오랜만에 다시 훈련장에 모였다.
“주!! 한 건 했던데? 축하해.”
가장 먼저 성배를 발견한 콤파니가 달려왔다.
누구보다 성배의 귀화를 기대했던 콤파니였기 때문에 성배의 활약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아아, 그런데 축하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벨기에 U-19 대표팀은 페로 제도에 이어 스웨덴까지 잡아내고 2연승, 마지막 헝가리와는 무승부를 거두며 2승 1무의 성적으로 조 1위를 기록, 엘리트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리고 성배는 이후 두 경기에서 한 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하며 1골 4어시스트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성배는 콤파니의 축하를 웃는 얼굴로 받아주지 않았다.
“으으... 그건 그렇지. 젠장!!”
성배가 U-19 대표팀에 차출되어 1차 예선에 참가하는 동안,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콤파니 역시 월드컵 예선을 치렀다.
콤파니가 가벼운 컨디션 이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벨기에는 스페인, 리투아니아와 경기를 치러 1무 1패에 그쳤다.
최종 탈락.
1982년 월드컵부터 2002년까지,
경쟁이 가장 치열한 유럽에서 6회 연속 월드컵 진출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벨기에는 결국 6회에서 연속 출전 기록을 끝내야 했다.
‘다행이다...’
성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아직 성배가 대표팀에 차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배가 국가대표팀에 합류해있지 않을 때.
그러니까, 지금 같은 때 성적이 바닥을 기어주어야 했다.
‘그래야 새 얼굴을 찾을 테니까.’
기존의 대표팀으로 처참한 실패를 겪은 벨기에.
이제 물갈이에 나설 때가 되었다.
그리고.
성배는 이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아아, 그러니까 빨리 네가 대표팀에 들어와야 할 텐데.”
“올리비에한테 이를 거야, 뱅상.”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짓는 콤파니를 보면서 성배는 마주 미소 지을 뿐이었다.
***
귀화, 벨기에 U-19 국가대표팀 차출, U-19 유로피언 챔피언십 예선, 귀화에 대한 벨기에와 한국의 반응.
정신없는 한 달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던 10월이 지난 뒤에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잠깐 타올랐던 논란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후 성배가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논란이 있었던 동안 잠시 성배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내던 언론들도 이에 발맞춰 성배에게 관심을 끊었다.
어머니와 유빈이도 마음을 추슬렀고, 덕분에 성배도 일단 한숨을 돌렸다.
반대로 벨기에에서는 점점 성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귀화하게 되면서 자국 유망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필러 리그 최강의 팀인 안더레흐트의 주전 레프트백.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
그리고 이런 활약을 보여주는 열여덟 살의 선수.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는 조건들을 성배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미안하다.’
옆에서 거칠게 들어온 성배의 어깨에 겐트의 오른쪽 미드필더 부사파가 피치 위를 나뒹굴었다.
“나이스 태클!!”
뚫렸을 경우를 대비해 백업을 준비하던 반더헤그가 성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뭘, 이 정도로.”
성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크하게 반더헤그의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힘이 좋았다고!! 건방지네.”
멀리서 콤파니의 외침도 들렸다.
휴가까지 반납해가면서 피지컬 보강에 열을 올렸던 성배였다.
당연히 지난 시즌에 비해 많이 좋아져 있었다.
“저런 플레이를 진짜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에게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성배가 상대 윙어를 그라운드 위에 굴려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베우스만테른 감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저 정도면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지만... 툭 치면 굴러다니는 선수들에게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좀 아쉽군요.”
성배의 피지컬이 좋아진 것은 분명했다.
이제 평균적인 피지컬이 많이 떨어지는 벨기에에서는 대부분의 선수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성배가 피지컬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상대 선수의 피지컬이 정말로 형편없을 때, 그때뿐이었다.
“좋은 피지컬을 갖게 되었는데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한 번에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직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지컬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이 베우스만테른 감독의 불만이었다.
성배가 그것만 제대로 해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주가 챔피언스리그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러 클럽들이 벌써부터 주의 영입에 대해 문의하고 있으니까요.”
챔피언스리그에서 로번, 가르시아, 호아킨 등과 상대하며 성배는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여러 클럽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제 겨울 이적시장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혹시나 이번 겨울에 바로 팀을 떠나게 된다면, 바로 이 약점 때문에 이적료에서 손해를 봐야 할 것이었다.
“상담가가 뭐라고 했다고요?”
“아무래도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아무리 알아봐도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TV에서 보기라도 한 건가...”
“전문가도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성배의 절대적인 피지컬 수준이 올라간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피지컬을 키우는 것은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를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를 상대하면 여전히 몸싸움을 기피하는 성배의 플레이는 아직 문제점이 남아있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약점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플레이하면서 성배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지난 삶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주전 자리를 따냈고, 전생보다 훨씬 더 질이 좋은 경험들이 기존의 경험들에 더해져 생각보다 빠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상대의 미드필더가 안더레흐트의 수비 뒷공간을 노렸다.
하지만 안더레흐트에는 콤파니가 있었다.
겐트의 스트라이커, 믈라데노비치는 콤파니의 몸에 막혀 볼의 소유권을 잃었고, 그 사이 반덴 보레가 볼을 따냈다.
“여기!!”
믈라데노비치가 반덴 보레를 압박했다.
반대편 측면은 텅 비어있었다.
성배는 반덴 보레를 돕기 위해 페널티 박스로 진입,
압박에 시달리던 반덴 보레는 바로 성배에게 볼을 내주며 압박에서 벗어났다.
‘너무 느려.’
오랜만에 안더레흐트 골문 앞까지 진출한 겐트 선수들은 이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는 듯 성배에게도 강한 압박을 시도했다.
하지만,
성배는 이미 그런 압박에 당황할 수준을 넘어섰다.
‘뒤에 텅 비었다.’
성배의 탈압박 능력은 분명 뛰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목숨을 걸고 훈련에 매진해 얻어낸 탄탄한 기본기 덕분에 어느 정도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뛰어난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발밑 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압박이 들어오기 전에 패스로 빠져나가는 것쯤은 쉬웠다.
“빨리 진행해!!”
성배가 중앙으로 볼을 투입한 순간, 겐트의 뒷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성배에게 중앙과 측면 미드필더,
총 두 명의 미드필더가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볼을 받은 반더헤그는 단 두 번의 터치로 볼을 전개했고, 성배 역시 텅 빈 측면으로 전력질주, 겐트 진영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반더헤그에게서 볼을 건네받은 제터베리가 원터치로 구어에게 패스했고, 구어 역시 잡지 않고 바로 성배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성배의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좋아!!’
겐트의 오른쪽 윙어 부사파는 성배에게 압박을 시도했다가 뚫렸다.
오른쪽 풀백은 중앙으로 이동한 구어를 따라갔다.
성배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왼쪽에 구어, 중앙에 아쿤, 음펜자...’
페널티박스에서 반더헤그에게 패스.
그리고 바로 전력질주를 시작한 성배였다.
텅 빈 공간을 질주하다 보니 어느새 겐트의 페널티박스가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숨이 조금 찬다 싶었다.
‘중앙으로 가도 되겠는데?’
상대 오른쪽 풀백이 생각보다 구어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성배에게 패스한 이후, 측면으로 빠진 구어가 수비수 한 명을 달고 있으니 중앙에 공간이 많이 있었다.
풀백을 더 끌어들인 뒤에 측면으로 볼을 빼주거나 중앙 쪽 공격수들에게 바로 찔러주기 위해서는 중앙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어보였다.
직접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비!! 안 되지!!’
“으앗!!”
그때, 겐트의 수비형 미드필더 트라체프가 태클을 시도했다.
성배는 침착하게 볼을 접어 트라체프의 태클을 피해냈고, 그 순간 골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뻥!!
‘들어가라!!’
공격수 시절, 성배의 골 결정력에 대한 평가는 그닥 높지 않았다.
골대 앞에서 해결하는 부분과 강한 슈팅을 때리는 능력이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킥 정확도와 킥력이 좋아 수비가 헐거운 상황에서 시도하는 정교한 슈팅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반대편 골대로 감아찬 지금의 슈팅도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아오!!”
“아!! 좋아, 좋아. 나이스 슈팅!!”
“멋있다!! 좋은 슈팅!!”
득점으로 이어질 만한 좋은 슈팅이었지만, 골키퍼가 바깥으로 쳐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에 걸린 것이었다.
‘아오, 아쉽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라운드 끝에서 끝까지 달리느라 힘도 많이 떨어졌고, 그러다 보니 마지막 임팩트 순간 디딤발이 조금 흔들렸다.
‘조금만 더 감겼으면 분명 들어갔을 텐데...’
일단 아쉬움을 잊는 건 잊는 거고, 왜 들어가지 않았는지는 파악해놓아야 했다.
하나의 플레이마다 얻어내는 것이 있어야 이것들을 모아 경험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한 경기 한 경기 조금씩 발전해야 했다.
‘골은 못 넣었지만 어시스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성배의 킥은 리그 내에서도 유명해졌다.
리그 내 모든 팀들이 성배의 킥을 경계했고, 위협적이라 여겼다.
당연히 다른 팀들보다 성배의 킥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안더레흐트는 직접 슈팅이 가능한 순간을 뺀 모든 프리킥과 코너킥을 맡기고 있었다.
슈팅은 어찌저찌 막아낸 겐트였지만, 성배의 무서움은 슈팅이 아니라 킥에 있었다.
‘음... 애매한데?’
성배의 킥을 경계한 겐트 선수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맡은 선수를 마크했다.
콤파니, 타이히넨 등 190cm에 육박하는 장신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전부. 나머지 선수들은 180cm가 되지 않아 아무래도 코너킥 상황에서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걸로. 알지?’
성배가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인이었다.
성배가 손을 올리자, 안더레흐트 선수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빠졌다.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성배가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페널티박스 안에서는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지고 있었고, 성배가 킥을 시도했다.
볼은 페널티박스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뻐--엉!!
성배가 신호를 보낸 이후, 박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제터베리가 논스톱으로 슈팅을 시도했다.
174cm의 단신으로 코너킥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안더레흐트에서 중거리슛이 가장 좋은 선수였다.
성배가 낮고 빠르게 깔아준 코너킥을 제터베리가 달려들면서 바로 슈팅으로 연결했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안더레흐트의 홈구장에 팬들이 함성이 울려퍼졌다.
제터베리의 슈팅은 경쾌하게 겐트의 골망을 흔들었다.
“슈팅 좋았어요.”
“코너킥이 좋았지.”
득점을 만들어낸 성배와 제터베리가 손뼉을 마주쳤다.
오늘 경기도 안더레흐트가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 낭만필드 - 0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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