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52 >
“오늘 경기의 Man Of the Match로 선정된 주성배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주성배입니다.”
vs 페로 제도. 7 : 0 승리.
엄청난 대승이었다.
벨기에의 대표팀이 이렇게 시원한 승리를 거둔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1개의 골과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는 당연히 Man Of the Match로 선정되었다.
“우선 오늘 맹활약을 펼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음... 물론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만, 아무래도 전력 차이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두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인터뷰를 하면서도 재수 없었다.
이런 자신감이라니.
전생의 자신은 이런 식으로 인터뷰하는 선수를 볼 때마다 달려가서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었었다.
“아... 그 말은 이 정도의 활약을 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뜻인가요?”
“뭐,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네요. 저, 주필러 리그 주전 선수입니다. 알아주는 선수라는 뜻이죠. 리그 최강인 안더레흐트에서 뛰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터뷰는 스킬.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터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진심으로 여긴다는 것.
팬들은 참 신기했다.
똑같은 인터뷰인데,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인터뷰는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보면서 운동선수들의 인터뷰는 진심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는 프로 선수들에 대한 인식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럼 별로 안 기쁘신 건가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당연히 기쁩니다.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이랑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건 또 다른 거거든요.”
안더레흐트 동료인 라마와 레기아르는 득점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홀란드, 조나단은 한두 개의 공격 포인트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저보다 못했다고 할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그들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해주었지만, 제가 운이 더 좋아 좀 더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거죠. 그건 기쁩니다.”
이렇게 안더레흐트와 주필러 리그 팬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고 벨기에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다.
그러면서 동료인 라마, 레기아르, 펠라이니 등 같은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까지 추켜올리며 동료들에게도 점수를 얻는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성배가 노리는 것들이었다.
“얼마 전, 귀화를 선택하신 것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진 않았다.
“네. 과분하게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리포터와 성배의 대화를 통해 큰 화제였던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귀화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프랑스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벨기에만의 언어가 따로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외국인이 자신들의 말을 훌륭하게 구사할 때, 사람들은 큰 호감을 느낀다.
아무래도 벨기에어가 따로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할 수 없었다.
벨기에식 악센트가 들어가는 프랑스어로도 상당한 호감은 쌓을 수 있을 것이었다.
“벨기에에 오신지 이제 겨우 2년이 조금 넘은 거로 알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나 봐요.”
“외국에서 활약할 때, 언어는 항상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외국은 아니게 되었지만.”
‘이 리포터... 꽤 하는데?’
시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배에 대한 호감을 심어줄 수 있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버크만과 함께 이를 계획했고, 귀화하면서 협회 측에 요청했던 성배가 민망할 정도로 본격적이었다.
“이런, 아직도 질문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거짓말일 것이다. 성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의 인터뷰는 시간제한이 철저했고, 그에 맞춰 질문지를 작성한다.
지금 리포터의 말은 의례적인 말에 불과할 뿐.
다만, 이 말을 들은 팬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이번 인터뷰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성공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그저 리포터를 향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앞으로의 목표가 어떻게 되시나요?”
“우선... 이번 1차 예선전을 가뿐하게 통과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겠죠.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고 저를 얼마나 원하는지 보여주셨던 협회 분들을 위해서라도 엘리트 라운드, 본선 라운드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소속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고 싶습니다.”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낯선 곳에서 온 저를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팬분들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 팀과 팬들을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벨기에’를 위해서가 아니라 ‘팬들’을 위해서.
듣는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겠지만, 말하는 입장에서는 달랐다.
적어도 자신은 ‘벨기에’를 위해서 뛰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이미 벨기에를 위해 뛰고 있지만.
“힘드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멋있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첫 단추는 훌륭하게 끼웠다.
골과 어시스트를 모두 기록하며 자신을 처음 보는 벨기에 팬들에게 확실한 임팩트를 주었고, 경기 종료 후 인터뷰까지 가졌다.
‘느낌이 좋아.’
이제 막 시작했지만, 분명 느낌이 좋았다.
***
[안더레흐트 유망주, 주성배. 벨기에로 귀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 전, 챔피언스리그 첼시전을 통해 혜성같이 나타나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던 안더레흐트의 유망주 주성배(18)가 벨기에 귀화를 선택했다는 소식이다.
벨기에 국적 취득 신청 조건인 3년 거주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벨기에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인한 것이 분명하다.
이미 벨기에 국적 취득 절차까지 모두 마친 주성배는 어제 있었던 벨기에와 페로 제도의 U-19 경기에 대표로 출전했다.
주전 레프트백으로 경기에 나선 주성배는 이날 한 개의 골과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본인의 첫 국가대표 선발을 자축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성배는 이번 경기가 모든 연령대별 대표팀을 합쳐 ‘첫’ 국가대표 소집이었던 것이다.
만 17세의 나이에 유럽 리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한 선수가 이제야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과연 지금까지 우리 축구협회는 무엇을 한 것일까?
이런 선수를 두고 과연 어떤 선수들을 선발해왔던 것일까?
어떤 것이 이 어린 선수에게 국적을 바꾸라 강요했던 것일까?
알려진 것처럼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직접 선수와 접촉해 귀화를 설득하는 동안 우리 협회는 무얼하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하다.
2005/06시즌.
주성배는 벨기에 최강 안더레흐트의 당당한 주전 레프트백으로 출전하며 매 경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대로라면 빅리그로의 진출도 그리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선수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대한민국의 품을 떠난 유망주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보려 한다.
[댓글]
- 개뿔... 군대 가기 싫어서 튄 거지, 뭐. 넌 아웃이다. 이제 그냥 외국인이지.
- 아, 오늘 칼럼은 3류 외국인 선수에 대한 내용인가요? 듣보잡 선수들에 대한 지식도 알려주려 하시다니... 존경합니다.
- 하여튼 다들 꼬여가지고... 유럽에서 산 지 벌써 3년 가까이 됐고, 앞으로도 계속 거기서 살 거면 당연히 국적도 따는 게 편하지.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냐. 게다가 벨기에에서 모셔간 거라며. 네들은 미국에서 시민권 내줄 테니 와달라고 하면 안 갈 거냐?
- 벨기에에서는 귀화시키고 싶어서 모셔간 선수가 한 번도 대표팀에 안 뽑혔다는 게 이상하지 않냐? 이거 조사해야지.
- 그냥 외국인 선수라고 생각해. 욕할 것도 없고 빨아줄 것도 없어.
한국에서의 반응은 한 유명 칼럼니스트의 칼럼으로 인해 성배와 버크만이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이 상황은 아직 해외축구를 다루는 전문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가 약간은 사실과 다른, 성배를 피해자로 보는 듯한 글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는 프리미어리그를 빼면 나머지 빅리그에 대한 정보도 알기 힘든 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와 주필러 리그에 대한 정보는 이런 개인의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거의 소설이나 마찬가지인 이 글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네, 어머니. 저도 봤어요. 하하, 소설가로 등단해도 될 것 같던데요?”
[너는 괜찮니? 아무렇지도 않아?]
“당연하죠. 사실 훨씬 더 욕먹을 줄 알았는데요.”
덕분에 비난하는 반응이 대부분일 것으로 예상했던 성배의 생각과는 달리 비난과 옹호, 무관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호재였다.
[에휴... 나는 댓글들 못 보겠더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하하, 어머니. 자세히 읽어보니까 이해한다는 사람도 많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많던데요. 욕하는 게 임팩트가 커서 그런 거죠.”
[그래도... 역시 인터넷은 못하겠어. 사람들이 왜 그러니?]
성배의 예상대로 되었으면 어머니는 버티지 못하셨을 것이었다.
그 칼럼니스트에게 조금 더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다 잊어버릴 거예요.”
[그럴까?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군대에 대해서 민감해서 그렇게 빨리 잊을 것 같지 않은데?]
비난하는 댓글의 9할 이상이 군대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 그중에서도 탑을 다투는 주제다운 성적이었다.
“어머니.”
[응? 왜 부르니?]
“어머니는 제가 벨기에에서 어떻게 활약하는지 찾기 어렵지 않으셨어요?”
[에휴, 말도 마. 얼마나 어려웠는데. 벨기에에서 그렇게 잘한다고 하는데, 왜 기사가 안 나오는 거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지금 당장은 민감한 주제가 생겨서 성배에 대한 관심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곧 식을 것이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어디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든 하루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지 주제가 며칠 동안 이어진다고 하면 굉장히 긴 것이었다.
“어차피 관심이 식으면 소식도 전해지지 않겠죠. 그러면 그냥 잊히는 거예요.”
[그럴까? 에휴, 전에는 네 소식이 안 보여서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전처럼 관심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언제부터 내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혜진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자기 아들에게 전부터 계속 관심을 보내주고 응원을 보내주었던 사람들이라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욕하는 이들은 아마 지금까지 성배의 존재조차 몰랐거나, 기사를 보고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일 것이었다.
그것이 화가 났다.
“하하, 나중에는 싫어도 저를 알게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 꼭 그렇게 되도록!!]
“그럼요. 제가 말했죠? 성공하고 싶다고. 열심히 할게요.”
한국에서의 반응이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다.
이로써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이로 인해 부모님이나 유빈이에게 어떤 피해가 가지는 않을지 고민했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그 칼럼니스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움을 준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성배는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나중에 제가 좀 더 뜨면 또 나타나겠죠. 하지만 그때는 아마 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그래, 알았어. 기대할게. 국제전화요금 많이 나오니까 이제 끊자.]
“네, 어머니. 그럼 쉬세요. 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건강챙기시고요.”
[알았어, 알았어. 점점 잔소리가 늘어가는 것 같다? 내가 엄마인데?]
큰 고비는 넘겼다.
이제 한동안은 걱정 없이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빨리 가자. 함부로 건드릴 생각조차도 못하게.’
나중에 또 자신의 국적 문제를 언급하는 악플러들은 분명 나타난다.
사실 그들이 떠드는 것을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입을 닫아놓을 필요는 있었다.
< 낭만필드 - 05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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