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51화 (26/356)

< 낭만필드 - 051 >

“페로 제도, 한 골을 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진영에 자리를 잡고 서서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캐스터가 지루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전력의 차이는 분명 있으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페로 제도의 목표는 최소 실점이었다.

골을 넣어서 승리를 노리거나 승점을 따낼 생각은 처음부터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최소한의 실점으로 경기를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버스 세웠네.’

성배 역시 그런 페로 제도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버스를 세웠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라인을 지키는 최종 수비라인 앞에 미드필드 선수들로 또 하나의 수비라인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말했다.

총 두 줄의 수비라인이 생긴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모든 선수가 수비하고 있으면, 아무리 전력에서 차이가 나도 뚫어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기량 차이가 있어도 상대 역시 프로선수로 이루어져 있고, 저렇게 수비하면 뚫기 힘들어요. 가끔 최고의 팀들이 의외의 팀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습니까? 똑같은 거죠.”

작정하고 수비‘만’ 하는 페로 제도의 골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기회는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슈팅은 전부 골문 앞에 빽빽하게 서있는 페로 제도 선수들의 몸에 맞고 튕겨 나왔다.

몸으로 막고만 있어도 슈팅 코스가 보이지 않았다.

“주, 왼쪽 측면으로 빠르게 올라갑니다!!”

이렇게 상대가 버스를 세웠을 때는 측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으로 공격을 시도하면 앞쪽 수비라인과 뒤쪽 수비라인의 선수들에게 포위를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측면은 아무리 버스를 세워도 많아야 두 명이 붙는 수준.

중앙과 비교하면 수비벽이 훨씬 얇았다.

“중앙으로 방향 틀면서 펠라이니에게 넘겨줍니다.”

“아, 돌파가 막혔네요. 아쉽습니다.”

중계진은 성배가 돌파를 시도하다가 막혀서 볼을 돌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좋아. 이제 알았다.’

성배는 페로 제도가 버스를 세운 이후부터 계속 상대의 수비를 관찰했다.

상대가 버스를 세운 이상, 쉽게 득점하는 것은 힘들었다.

골을 넣을 때까지 어차피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 그 시간동안 상대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버스를 세우기는 했는데, 양옆으로 심하게 움직인다.’

성배가 찾아낸 빈틈은 바로 이것이었다.

페로 제도는 벨기에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개인 기량의 차이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측면으로 볼이 전개될 때, 수적인 우위를 지키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필요한 플레이였지만, 지나치게 많이 움직였다.

‘역시. 지금도 그러잖아.’

성배가 중앙으로 볼을 올려준 이유는, 측면으로 벌리라는 뜻이었다.

의도한 대로 성배로부터 볼을 이어받은 펠라이니가 오른쪽 측면의 레기아르에게 패스하며 오른쪽으로 볼을 투입했다.

그러자 페로 제도의 수비라인 전체가 이동.

성배의 앞, 왼쪽 측면이 텅 비어버렸다.

‘내놔.’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펠라이니에게 볼을 넘겨준 이후, 페로 제도의 수비수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이드라인에 붙어있던 성배가 출발했다.

오른손을 들어 레기아르에게 신호를 주면서 페널티박스 왼쪽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레기아르가 성배의 신호를 포착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걸 어떻게 안 줘...’

완벽한 침투였다.

물론, 상대 수비수들의 기량이 부족해서 빈틈이 크게 생긴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을 잡고 침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레기아르는 성배의 움직임을 본 순간에 이미 크로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 주!! 파고들고, 크로스!!”

‘이건 백 퍼센트다.’

역시.

레기아르도 크로스 하나만큼은 확실히 쓸만했다.

골키퍼는 함부로 뛰어나오지 못하는 위치, 그리고 자신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위치로 크로스가 날아오고 있었다.

‘들어갔다!!’

슈팅을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득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완벽히 유지되고 있는 신체 밸런스.

제대로 받은 탄력.

확실히 힘이 들어간 점프.

완벽한 헤더였다.

“골!! 골입니다!! 주성배의 완벽한 헤더!! 벨기에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첫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합니다!!”

“완벽한 침투와 완벽한 크로스!! 멋진 골이네요!!”

점유율은 일방적인데 득점이 나오지 않는 경기는 보는 입장에서 굉장히 답답했다.

볼은 계속 뒤에서 돌고,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고.

팬들이 답답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그리고 성배의 골은 그런 시점에서 터졌다.

“골!! 골이라고!! 데뷔전에서 골이라니!!”

오늘 경기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라마가 득점에 성공한 성배보다 더 흥분해 달려왔다.

“내가 뭐랬냐!! 주는 너랑 다르다고 했지?”

그리고 어시스트를 기록한 레기아르 역시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답답한 흐름을 깨버리는 골이 들어간 상황.

그 상황에서도 라마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데뷔전에서 어시스트에 이어 골까지 기록하는 주성배!! 완벽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직은 U-19 대표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네요!! 벨기에에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죠?”

또 한 번의 공격 포인트.

해설자들은 또 한 번 장황하게 성배를 포장해주었다.

이 정도면 성배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던 팬들도 해설자들의 말만 듣고 빠져들 정도였다.

***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어시스트 한 개 정도는 추가하고 싶은데.’

성배가 경기 두 번째 골을 터뜨린 순간, 이미 게임은 터져버렸다.

페로 제도는 대항할 의지를 잃었고, 그 순간부터는 벨기에의 일방적인 학살극이 펼쳐진 것이었다.

성배의 발끝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득점이 경기를 끝냈다.

‘어시스트 해트트릭. 한 번 노려봐도 되겠지?’

라마, 미랄라스, 펠라이니, 드레센이 각각 한 골씩을 터뜨리며 네 골을 추가한 벨기에였다.

그리고 이 중, 라마의 득점에 다시 한 번 관여하며 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는 1골 2어시스트의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한 개의 어시스트만 더 기록하면 어시스트 해트트릭이었다.

[어시스트 해트트릭]

사실 해트트릭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만든 느낌이 있는 기록이었다.

세 골을 넣으면 해트트릭인데, 어시스트가 세 개이면 어시스트 해트트릭.

특별히 따로 이름도 없었다.

‘확실한 임팩트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이름이 따로 있고 없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어시스트 해트트릭도 상당한 임팩트를 남긴다는 것이었다.

“이제 경기는 완벽하게 우리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오랜만에 화끈한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성인대표팀이고 연령별 대표팀이고 할 것 없이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든 벨기에였다.

그런 상황에서 약팀과의 경기라고는 해도 여섯 골을 터뜨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팬들도 오랜만에 통쾌한 경기를 관전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모든 선수가 잘해주고 있지만, 역시 주의 활약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 그렇죠? 골도 기록하고 어시스트도 두 개나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벌써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이제 추가 시간을 포함해도 10분이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목이 마른 누군가가 있었다.

‘중앙에 시선이 팔렸네.’

페로 제도의 라이트백이 펠라이니를 막기 위해 뛰쳐나왔다가 아직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으로 연결된 볼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성배의 앞이 뻥 뚫려있었고, 이 상황에서 여러 생각은 필요 없었다.

‘한 번에 질러.’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성배가 빠르게 뛰었다.

상대 수비수도 뒤늦게 이를 눈치채고 쫓아왔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몰래 움직이기 위해 사이드라인에 붙어서 올라온 성배가 방향을 대각선으로 틀어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접근한 뒤였다.

“데푸르, 대각선으로 연결!! 아!! 또다시 주에게!! 왼쪽입니다.”

“모처럼 깊숙한 침투!! 중앙으로!!”

그리고 데푸르는 성배의 앞에 맛있는 패스를 배달해주었다.

조금 앞에서 한 번 바운드가 되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느라 수비수의 접근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운드 된 공을 논스톱으로!! 로시니!!!”

“있어요!! 있어요!!”

볼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수비수가 자리를 잡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운드 된 볼이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점프하면서 공중에서 크로스를 시도했고, 이는 정확히 로시니에게 이어졌다.

골키퍼도 볼을 따라 성배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골대는 텅 비어있었다.

“슛!! 골!!!! 로시니!! 7-0, 벨기에!! 7-0으로 앞서나갑니다!!”

“이야... 주성배!! 정말 대단하네요!! 벌써 오늘 경기 네 번째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어요!! 이 선수가 풀백입니다, 여러분!! 믿을 수 있으신가요?”

텅 빈 골대에 골을 넣지 못하는 선수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로시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선수였다.

성배의 크로스를 발리 슈팅으로 연결한 로시니는 텅 빈 골대에 본인의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키면서 벨기에의 일곱 번째 골을 만들어냈다.

7-0.

페로 제도는 벨기에에게 완벽하게 무너졌다.

“화끈하게 해내는구나!! 세바스티앙이 긴장 좀 하겠어.”

“어딜!! 세바스티앙은 주보다 한 수 아래지!!”

성배가 귀화하기 전까지 U-19 대표팀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세바스티앙 포코뇰리가 생각나지 않는 활약이었다.

1골 3어시스트.

비록 이번에는 포코뇰리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다음번에는 부상이 없어도 합류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딜!! 그래도 아직은 세바스티앙이지!!”

“무슨 소리!! 애초에 리그 활약도 주가 훨씬 더 대단하다고!! 너네 몇 위냐? 몇 위야!!”

어느새 성배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라마와 헹크의 허버트가 팀 동료들을 대변하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안더레흐트의 라마와 성배.

헹크의 허버트와 포코뇰리.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성배는 포코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번 부상이 너무 컸지.’

겡크가 애지중지 키웠던 포코뇰리지만, 얼마 전 당한 부상이 커리어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성배는 알고 있었다.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할 것이었다.

빅리그 하위권 클럽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은 없었고, 그러니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포코뇰리를 무시하다니... 주성배. 정신 차려라. 아직 이뤄낸 것은 아무것도 없어.’

성배는 순간 흠칫하고 놀랐다.

포코뇰리는 전생에서 성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커리어를 쌓았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를 상대로 콧방귀를 뀌다니...

워낙 모든 것이 착착 이루어지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아직은 이를 경계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경계해야지. 마음을 놓는 건, 빅리그로 간 다음이어도 늦지 않아.’

남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를 받아놓고 마치 그것이 원래 자기 것인 양 빠져들지 말아야 했다.

자만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그런 기미가 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앞으로 잘 하자. 정신 차려라, 주성배.'

앞으로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낭만필드 - 05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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