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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45화 (20/356)

< 낭만필드 - 045 >

“뭐하는 거야!! 램파드라고, 램파드!! 램파드가 볼을 잡고 있는데 뒤로 물러나면 어떡해!! 자리 나면 바로 때리는 거 몰라서 그래? 더 달라붙었어야지!”

수비라인의 최고 베테랑이자 정신적 지주인 타이히넨이 다른 동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꾸짖었다.

확실히 지금은 동료 미드필더들의 대처가 좋지 않았다.

미드필더이지만 굉장한 득점력을 가지고 있는 램파드가 볼을 잡았을 때, 드록바만 신경 쓰다가 압박이 헐거워져 버렸다.

중거리 슈팅을 얻어맞는 것이 당연했다.

‘젠장, 이럴 때 콤파니가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늘은 평소 사용하던 4-2-2-2가 아닌 4-3-3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평소 쓰리 미들로 경기를 진행할 때는 수비에 장점이 있는 반더헤그와 공격에 장점이 있는 바슈쥬, 제터베리로 조합을 짰었다.

그런데 오늘은 수비에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더헤그, 드 망을 동시에 투입하고 심지어 나머지 한 자리도 센터백 멀티 자원인 즐라코프에게 맡기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주문했다.

'이렇게 수비적인 선수만 투입하면 오히려 공격하기 편한데...'

거의 텐 백에 가까운 수비적인 전술로 최대한 첼시의 득점을 억제해 무승부를 노리려는 것 같은데 이제는 의심이 들었다.

무엇보다 현재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콤파니가 결장했다는 부분에서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수비를 강화하면서 정작 팀 내 최고 스타이자 최고의 수비수인 콤파니를 뺀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오늘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거지. 어차피 잡을 수 없는 경기니까.’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펼쳐지는 첼시와의 원정 경기.

2003년 러시아의 갑부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인수한 이후 무시무시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최강의 클럽 경쟁에 뛰어든 첼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경기력만큼은 ‘세계 최강’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는 첼시를, 그것도 첼시의 홈구장에서 상대한다는 것은 안더레흐트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었다.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이해한다고.'

그래서 베우스만테른 감독은 과감히 이 경기를 포기하고 다른 경기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상식적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경쟁력이 없어. 안더레흐트 입장에서는 조별리그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니까 여기서 더 욕심내지 말고 리그에 집중하는 게 맞아.’

괜히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다가 리그 우승을 놓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찌감치 단념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매진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도 조금만 정상적으로 운영했으면 좋았을 텐데.'

조별리그 진출도 큰 성과였고, 여기까지 진출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을 얻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이 안더레흐트에게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 경기는 져도 괜찮다는 거지?’

져도 되는 경기.

감독의 그러한 의도가 전면에 드러나는 경기.

이런 경기만큼 선수 입장에서 부담 없는 경기가 또 있을까?

패배가 당연한 경기에서 선수가 조금 못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경기에서 조금만 잘해주면 그 선수는 바로 주목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제대로 보여주지.'

하물며 그 무대가 챔피언스리그 본선 무대이고, 상대가 프리미어리그 우승 후보이자 최근 가장 핫한 클럽인 첼시임에야.

몸값을 올려야 하는 성배에게는 최고의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

‘도저히 하프라인을 넘어설 수가 없네. 참... 저런 장악력이 어떻게 나오는 건지.’

수비수들이 열심히 뛰어서 겨우 볼을 뺏어내 중원으로 연결해보지만, 겨우 볼을 걷어내도 금방 안더레흐트 진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드록바에게 향하는 패스를 후아즈가 가까스로 끊어내 중원의 드 망에게 연결했지만, 곧바로 다시 빼앗겼다.

'방금 수비자세 풀었던 것 같은데.'

다시 자세를 낮추면서 생각했다.

아마 오늘 안더레흐트에서 가장 바쁠 선수들은 수비수들과 골키퍼일 것이었다.

수비적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미드필더들도 바쁘게 뛰어야 할 것이었고, 공격수들은 열심히는 뛰겠지만, 볼은 잡지 못할 것 같았다.

방금 볼을 빼앗아낸 두 선수.

중원을 완벽히 장악해버리고 있는 마케렐레와 에시엔 때문이었다.

흑인 특유의 탄력과 쫄깃함, 그리고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첼시 중원에 버티고 서있는 이 두 선수를, 안더레흐트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만 해보려고 하면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나타난 두 선수에게 바로 볼을 헌납해야만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온다.’

그리고 그렇게 끊어낸 볼은 전방으로 이어져 안더레흐트의 수비를 괴롭혔고, 이번에는 성배가 괴롭힘을 당할 차례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첼시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고, 첼시의 전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양쪽 윙포워드 중 오른쪽 윙포워드에게 볼이 전개되었다.

회귀하기 전, 서른여섯이었던 전생의 성배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겨우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선수였다.

‘어딜!!’

아르옌 로번.

장점을 대라면 수도 없이 댈 수 있겠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피드를 이야기할 것이었다.

많은 장점들 속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로번의 스피드는 전 세계의 축구 선수 중 가속력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단했다.

바늘구멍 정도의 작은 틈만 보이면 툭 치고 달리는 것만으로 상대 수비수를 농락할 수 있는데, 여기에 드리블 능력까지 좋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수비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젠장!!’

성배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빈틈없이 로번의 앞을 틀어막았다고 생각했지만, 로번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 빈틈을 찾아내 달려들었다.

볼이 뒤로 빠져나간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스피드에서 차이가 나는데, 뒤돌아서 달려야 하는 성배가 더 먼저 가속한 로번보다 먼저 볼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만, 조금만 튀어라.’

하지만 성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당황하면 전생의 16년, 현생의 2년이 억울해할 테니까.

어차피 모든 플레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산을 벗어난 플레이가 나오면 피지컬을 앞세워 대응해야 했다.

대응할 피지컬이 부족한 자신이 고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갈 수 있어.'

다행히 전생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훨씬 더 뛰어난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너무 큰 차이만 벌어지지 않게 열심히 따라붙어 준다면 한 번은 기회가 생길 테니 일단 쫓아가자.

그런 마음으로 사력을 다했다.

태클 타이밍과 테크닉에는 자신이 있었다.

조금만 볼 터치가 길어지면 타이밍을 노린 태클로 막아 볼 생각이었다.

‘지금!!’

로번의 왼발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오른발은 살짝 아쉬움이 있었다.

그의 주 무기는 중앙으로 올라가며 시도하는 왼발 슈팅.

측면 돌파 후 크로스는 오른발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측면을 파고들었고,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려야 했으며, 익숙하지 않았기에 준비 동작이 살짝 길었다.

성배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역시... 아직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네.’

로번의 스피드가 엄청나다고는 하지만 성배 역시 스피드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였다.

잠깐 지체된 그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로번과 볼을 사정권 안에 둘 정도로 따라붙은 성배는 곧바로 왼발을 뻗어 태클을 시도했다.

로번의 페이크였다.

로번은 오른발로 페이크를 준 뒤, 크로스를 올리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접어 왼발 앞으로 볼을 옮겼다.

‘예상했어.’

빈틈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돌파당한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차피 로번의 오른발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반대로 접어서 왼발로 크로스를 올리거나 중앙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래서 처음부터 오른발을 뒤쪽에 남겨둔 것이었다.

로번의 뒤에 바짝 붙은 다음에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키면서 왼쪽 다리를 갈고리처럼 걸었고, 오른발은 그대로 로번의 뒤쪽에 위치시켜 두었었다.

반대로 볼을 접었다고 하더라도 그 앞에는 자신의 오른발이 오게 되는 것이었다.

“아아, 괜찮지? 조심해. 심하게 넘어진 것 같은데, 자꾸 그러면 머리 더 빠질지도 몰라.”

네덜란드어쯤이야.

전생에 살았던 안트베르펀 지역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걸쳐있는 플랑드르 주에 속한 도시였다.

당연히 네덜란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역이었고, 당연히 구사할 수 있었다.

'그래, 흥분해라.'

로번이 탈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이야기는 윤기표 선수가 전생에서 진행한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클을 시도했을 때, 뒷발에 막히면서 크게 넘어진 로번은 넘어져서 아픈 것보다 탈모를 조롱하는 성배의 말에 더 열이 받은 상태였다.

“어어? 안 돼, 그러면. 머리가 뜨거워지면 모근이 더 잘 빠진다고.”

불난 집에는 기름을 부어줘야 했다.

지금 자신의 면상을 한 대 후리고 싶어지게.

그런 마음으로 성배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

‘헉... 헉... 이 괴물 같은 자식.’

그리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후반전 중반.

성배의 유니폼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하얀색도, 보라색도 찾을 수 없었다.

성배의 유니폼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이라고는 이제 그라운드와 같은 색깔인 초록색과 갈색뿐.

성배가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니고 있는지를 유니폼이 대신해서 보여주었다.

‘괜히 건드린 건가...’

이제는 탈모를 가지고 로번을 흥분시켰던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까지 로번을 막아낸 것에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왠지 아까 놀린 것에 앙심을 품고 더 거세게 달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적당해 해라, 좀!'

로번은 괜히 로번이 아니었다.

아직 전성기에 접어들지 않은 스물한 살의 로번을 막아내기 위해 성배는 수십 번도 더 그라운드 위를 굴러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깔끔하게 막을 수 있겠다고 확신을 해도 어떻게든 자신을 뚫어내는 로번의 플레이.

성배는 그때마다 유니폼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다.

하도 넘어지고 구르고 일어나서 달리기를 계속하다 보니,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체력도 빠르게 바닥나는 중이었다.

‘이제 적당히 좀 하자. 다른 좋은 선수들도 많잖아...’

게다가 하필이면 첼시 공격의 또 다른 핵심인 데미안 더프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힘들기는 해도 어떻게든 로번의 돌파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더프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래도 로번의 공격이 계속될 것이었다.

성배는 볼을 몰고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로번을 보면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 낭만필드 - 04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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