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44 >
축구협회 직원의 표정은 갑자기 어두워져 있었다.
벨기에로 귀화할 생각이 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벨기에가 좋아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만약,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음에도 U-20 월드컵 대표는 물론이고 유소년 대표로도 뽑히지 못했던 것이 귀화를 결정한 원인이었다면, 지금 이 전화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벨기에 국가대표보다 한국 국가대표가 훨씬 더 경쟁력이 있었다.
월드컵 5회 연속 진출에 앞으로도 계속 진출할 것이라 예상되는 한국 대표팀과는 달리 훨씬 더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는 벨기에 대표팀은 확신은커녕 월드컵 진출 확률 자체가 낮았다.
게다가 FIFA 랭킹도 한국이 한 수 위.
얼마 전 발표된 2005년 8월 FIFA 랭킹에서는 한국이 23위에 올라있었고, 벨기에는 52위에 불과했다.
성배가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대표팀 주전 레프트백 역시 한국의 윤기표가 벨기에의 데샤흐트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여러모로 벨기에보다 한국이 더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리그 일정 때문에 거절한다고 보내주세요.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일단 리그가 우선이니까요. 그런 작은 대회에 참가한다고 해서 남을 것도 없고요.”
하지만 대표팀 차출을 거부하겠다는 성배의 말에 직원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며 기쁨을 표했다.
일본 니가타에서 펼쳐지는 소규모 국제대회였고, FIFA 주관 대회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로에서 활약하는 유소년 선수들은 애초부터 참가할 수 없는 대회였다.
그래서 차출 거부 의사를 표현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클럽의 계획에 포함되어있는 선수라면 클럽 측에서 무조건 차출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시기의 대표팀 합류 제안이었으니 거부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벨기에 협회는 애초부터 성배를 대표팀에 차출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꼼꼼한 검토를 거치고 있는데, 한국 축구협회는 한창 시즌을 치르고 있는 자신에게 들어보지도 못한 U-18 대회 참가 공문을 보내다니.
그리고 덜렁 공문만 보내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성배는 한국 대표팀에 합류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앞으로 계속될 한국 축구의 퇴보와 여러 문제도 있었지만 역시 찬란하게 빛날 벨기에 황금세대 때문이었다.
그 일원으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몸값 불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었다.
“응? 아직 안 가셨나요?”
“아, 지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뵙죠.”
일단 한국 U-18 대표팀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라고 했던 성배의 말이 신경 쓰일 것이었다.
정말로 성배를 원한다면 저 한 문장이 조금 더 빠른 처리가 가능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었고, 그러라고 굳이 언급한 것이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협회 직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배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타이밍을 딱 맞춰서 휴대폰을 전해준 버크만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정말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한국 대표로 뛰는 게?”
“뭐... 어차피 U-18 대표팀 출전 기록이 있어도 귀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하하.”
귀화하기 전에 몇 경기 정도 한국 청소년 대표로 뛰는 것은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올림픽 대표 이하의 대표팀에서 활약한 것은 귀화 이후 국가대표 자격을 갖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성배가 한국 청소년 대표팀에서 뛰지 않은 것은 차출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벨기에 대표가 아니면 안 된다, 뭐 그런 감정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는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규모의 대회도 아니었다.
“이런, 이런. 지금이라도 다시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분,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나가던데요.”
“뭐, 굳이 그럴 것 있습니까? 어차피 귀화하는 건 변함없는 데 말이죠.”
가끔 버크만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주제가 나올 때, 성배는 조금씩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헤르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의리, 신의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이번 생에서 헤르만과 계약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잔소리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다.
‘전화라도 한 번 해볼까?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시즌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마시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헤르만의 얼굴이 한 번쯤 보고 싶어진 성배였다.
***
시즌 초반, 데샤흐트와 함께 레프트백 주전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성배는 8월이 끝나갈 즈음부터 경쟁에서 앞서나가 주전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성배가 꾸준히 공수 양면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안 데샤흐트는 언제나처럼 공격력에서 마땅한 장점을 보여주지 못했고, 수비 역시 눈에 띌 정도로 나은 모습은 아니었다.
두 선수의 경쟁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은 바로 4라운드, KRC 겡크와의 경기였다.
이 결기를 기점으로 두 선수의 처지가 역전되었는데, 우승을 다투는 라이벌 중 한 팀인 KRC 겡크와의 원정 경기에서 수비 강화를 위해 데샤흐트를 투입한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정에서 최소한 무승부, 전력 차이를 고려하면 승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고 그로 인해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되어 결과는 0-3.
완전히 처참하게,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팬들의 원성이 치솟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희생자로 낙점된 것이 데샤흐트였다.
우승 경쟁 팀과의 경기를 안정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수비력이 더 뛰어난 데샤흐트를 선발로 내보냈는데, 성배가 나설 때와는 달리 구어 혼자 분투한 왼쪽 측면이 죽어버렸다.
그 이유로 공격이 무뎌졌다는 결론이 나왔고, 데샤흐트의 공격력 부재가 이유로 꼽혔다.
이전까지만 해도 보다 수비적이면서 안정적인 데샤흐트를 우선순위로 두었던 베르스만테른 감독도 슬슬 성배를 더 우선순위에 두었다.
약팀들과 경기할 때는 데샤흐트가 가지고 있는 공격력의 빈약함이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벨기에 국가대표팀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약하는 데샤흐트인 만큼 기본적인 정도의 공격력은 가지고 있었다.
안더레흐트 자체가 다른 팀들과 전력 차이가 꽤 나는 강팀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팀을 상대하면서 데샤흐트의 약점이 드러났고, 이전과 달리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대체자가 존재함으로 인해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성배야!! 이제 곧 챔피언스리그 본선 경기하지 않아? 빨리 약속한 1차전 티켓 줘. 보러 갈 테니까.”
“아버지. 1차전은 원정 경기예요. 런던으로 오실 수 있으면 드릴게요.”
“아... 1차전은 원정이었나? 그럼 조별리그 첫 번째 홈경기 티켓으로 주면 되잖아. 굳이 그렇게 면박을 줘야겠냐?”
아무래도 자신이 회귀한 것은 신이 도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번 생에서 성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타이밍 좋게 들어맞고 있었다.
데샤흐트와의 경쟁에서 사실상의 승리를 거두자마자 챔피언스리그 본선이 시작된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 본선.
선수들에게 영광스러운 꿈의 무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무대보다, 심지어 월드컵보다도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쉬운 무대였다.
이미 정상권에 자리한 빅 클럽의 선수들에게는 정체된 자신들의 몸값을 올릴 기회였고, 중소 리그의 선수들에게도 빅 리그 클럽들을 향해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무대에서 선발로 뛸 수 있다는 것은 영업을 위한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는 말과 같았다.
“1차전이 첼시라고 했지? 이야... 첫 경기부터 아주 만만치 않네.”
“아버지. 왠지 놀리시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4포트를 배정받아 마지막으로 챔피언스리그 G조에 속하게 된 안더레흐트였다.
안더레흐트보다 먼저 G조에 속하게 된 클럽은 1포트의 리버풀과 2포트의 첼시, 3포트의 레알 베티스.
어느 하나 만만한 팀이 없어 고전이 예상되는 대진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 팀이 만만한 조 따질 입장은 아니지. 어딜 가도 까다롭고, 우릴 만나는 팀들만 좋아할 수준이니까.’
주필러 리그에서는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안더레흐트이지만, 최근 몇 년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별달리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조별리그까지는 항상 진출하는데, 2000년대 이후로는 조에서 3위를 차지해 UEFA컵으로 넘어간 적도 없을 정도로 매번 조 최하위를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안더레흐트와 한 조에 속한 클럽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음... 챔피언스리그 본선 여섯 경기도 엄청난 기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UEFA컵에서까지 몇 경기 더 출전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자신이 전생을 살다가 돌아왔어도 직접 활약했던 팀도 아닌 안더레흐트의 2005/06시즌 챔피언스리그 성적까지 기억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당연히 성배도 이번 시즌 안더레흐트가 원래 어느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최하위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고 예상해볼 뿐이었다.
“어때? 네 생각에는 16강 진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도. 16강은커녕 UEFA컵도 힘들 것 같은데요. 안더레흐트는 안방 호랑이니까요.”
“야, 야. 그래도 네가 소속되어있는 클럽인데 안방 호랑이는 너무한 거 아닐까? 네가 소속된 집단에 조금만이라도 애정을 가져봐.”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냉정한 평가를 내린 성배였다.
직접 안더레흐트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인 성배가 뛰고 있었기 때문에 애정을 가지게 된 장석의 기분이 살짝이나마 상할 정도로 심하게 객관적이었다.
“애정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가능성을 물어보셨잖아요? 그래서 가능성에 대해 대답한 거예요. 아마 UEFA컵 진출권을 얻으면 성공이지 않을까, 싶어요.”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이런 모토를 가지고 이번 생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 자체가 조금 냉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 좋은 전생의 성격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팀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고, 클럽과 팬을 위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마음 역시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 조금 어려운 상황이어도 열심히 뛰어라. 혹시 아니? 안더레흐트가 이변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지.”
“네. 진짜 죽을 힘을 다해서 뛰려고요.”
객관적으로 첼시를 상대로 완벽한 플레이는 펼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서 뛰면 어느 정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
‘진짜 죽을 것 같다...’
첼시와의 2005/06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G조 1차전.
성배는 죽을 힘을 다해서 뛰겠다고 말했던 며칠 전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어졌다.
성배가 바라보고 있는 곳, 안더레흐트의 골대 안에서는 아직 받아들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볼이 그물을 흔든 뒤, 다시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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