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40화 (15/356)

< 낭만필드 - 040 >

‘휴가 갔던 선수들이 다시 복귀하기까지는 오늘부터 2주. 다시 훈련이 소집되고 본격적으로 훈련 스케줄이 시작되기까지는 복귀 1주일 후. 그럼... 3주 정도의 시간이 남은 건가.’

드디어 출고된 차량을 인수한 성배는 자신의 차를 타고 안더레흐트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아직 구단에서 내준 휴가 기간이 2주 정도 남아있었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일찍 시즌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전에도 시즌 종료 후 주어지는 휴가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쉬는 것보다 훈련하는 것이 더 편했다.

‘이제 키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다 컸으니 본격적으로 피지컬을 키워야지. 언제까지나 붕붕 날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지난 시즌 막판, 베스테롤로와의 경기에서 상대 윙어 자자를 상대했을 때 받은 충격은 꽤 컸다.

자신의 피지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회귀 후에는 전생과 달리 일찍부터 체계적인 관리하에 훈련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생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 여겼던 피지컬에서 형편없이 밀려버린 것이었다.

실제로 성배의 피지컬이 전생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릎의 부상도 없고, 무릎부상으로 인해 함께 망가졌던 다른 부위들도 모두 쌩쌩했다.

그리고 피지컬 훈련을 전혀 시키지 않는 한국의 학원 축구계와는 달리 일찍부터 성장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플랜 아래 피지컬을 키워왔다.

몸 상태도 엉망이고 체계적인 관리도 받지 못했던 전생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1군의 수준 차이, 그리고 흑인과 황인의 차이가 확실히 있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1군 무대의 벽은 확실히 높았다.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피지컬로도 맞상대하기 버거운 선수들이 많이 포진해있는 것이었다.

물론, 주필러 리그는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피지컬이 약한 편이었고, 자자가 독특한 것이었지만, 빅 리그로 나가면 나갈수록 자자보다도 더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다.

‘미리부터 준비해놔야지. 그때 가서 준비하려고 하면 늦어.’

안더레흐트의 훈련장이 위치한 도시, 안더레흐트는 브뤼셀 주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성배가 살고 있는 브뤼셀 시와 굉장히 가까웠다.

잠시 앞으로 어떤 식으로 훈련할지를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훈련장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섰다.

선수들이 휴가를 즐기는 동안에도 훈련장에 나와 있는 직원들이 성배를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이 워낙 긴 데다가 시즌 중에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선수들이 많아서 휴가 기간에는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그렇게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윗분들 귀에도 들어갈 수 있게.’

자신이 필요해서 훈련하기 위해 찾은 것이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이 윗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것을 노리는 의미도 있었다.

이 바닥이 넓어 보이지만 결국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보들이 다 공유되었다.

어느 선수가 그렇게 열심이라더라, 훈련을 그렇게 열심히 한다더라, 하는 것들은 관계자들을 넘어 팬들에게까지 대부분 알려졌다.

이렇게 쌓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나중에는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훈련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 휴가 기간에도 가끔 출근하는 코치들, 그리고 클럽 사무직 직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잠시 훈련장 내를 돌아다닌 성배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이후에 이동했다.

근력 운동을 위한 훈련장에 도착한 성배는 지난 시즌 막판에 피지컬 코치에게 건네받은 계획표를 보면서 몸을 만들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다음 시즌 준비에 남들보다 일찍 돌입했다.

'아직은... 아직은 근육을 키우기 부담스럽지만, 단단하게 만드는 정도는 부담없으니까.'

벌크업은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더 단단하고 큰힘을 낼 수 있는 몸으로 바꾸는 것이 지금의 목표였다.

***

“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뭐, 나쁘지는 않았지. 오랜만에 집에도 갔다가 왔고.”

일찌감치 시즌 준비에 돌입한 성배가 열심히 비지땀을 흘리는 사이에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씩 휴가를 마치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다들 9개월 만에 생긴 여유를 즐겁게 만끽한 것인지 피부들이 깨끗해지고 살이 올라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대고 있었다.

“소식 들었어. 벌써 몇 주 전부터 훈련 시작했다며?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었나 보네. 한 시즌 제대로 버틸 수 있겠어?”

“나야 어차피 전 경기에 나서는 것도 아닐 텐데, 뭘. 20경기에서 30경기 정도 나설 체력은 충분해.”

성배의 의도대로 5주간의 휴가 중 2주를 반납하고 일찌감치 훈련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퍼진 것인지 콤파니가 웃으며 그것을 언급했다.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콤파니가 이 소식을 들었을 정도라면 코칭스태프들과 감독, 어쩌면 단장까지도 자신의 훈련 소식을 들었을 거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휴가 기간은 선수들에게 훈련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무려 10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빡빡한 일정으로 치러지는 시즌이 끝나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쉴 수 있는 5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다음 시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되는 빡빡한 시즌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퍼져서 체력적인 문제로 고전하게 될지는 휴가 기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어느 나라이든 1부 리그보다는 2부 리그의 스케줄이 빡빡한 경우가 많았고, 벨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보다도 훨씬 더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서른네 살까지도 주전으로 활약한 경험이 성배에게는 있었다.

게다가 스쿼드가 두터운 안더레흐트와는 달리 빈약한 스쿼드의 로얄 앤트워프에서도 문제없이 선수생활을 했던 성배가 시즌 중 문제가 생길 정도로 몸을 굴릴 리는 없었다.

‘지금 내 나이의 선수가 의욕적으로 시즌을 준비하다가 중간에 퍼지는 건 흠이 아니지. 오히려 그 의욕, 젊은 패기에 가산점을 받으면 받았지, 흠이 될 건 없어. 어린 선수가 어설픈 건 당연한 거지만, 향상심과 욕심이 없는 건 흠이 되니까.’

제대로 쉬어주지 못하고 일찍부터 몸을 혹사시켜서 다음 시즌 막판 즈음에 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겨우 열여덟의 어린 선수에게 한 시즌을 풀로 다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여덟의 어린 선수에게 바라는 것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잠재력, 그리고 그 잠재력을 기량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잠재력은 이미 충분히 증명했다.

중요한 것은 잠재력이 기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는데, 보통 클럽들은 ‘멘탈’, 혹은 ‘Work Ethic’이라고 표현하는 요소들로 그것을 파악했다.

쉽게 말하면 얼마나 운동에 열중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휴가를 반납하고 일찌감치 훈련을 시작한 성배의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휴가를 반납할 정도로 진지하게 축구를 대하고 있고, 향상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배에게 관심을 가지고 영입을 문의하는 클럽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성배를 더욱 높게 평가할 것이었고, 영입 목록에 있는 대체자 중 성배의 이름을 조금 더 위로 올려놓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바뀐 감독... 처음부터 감독에게 점수를 땄을 것이 분명해. 다른 선수들이 없을 때 유일하게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주전급 선수였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성배는 이번 행동을 통해 안더레흐트의 신임 감독에게 긍정적인 첫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지난 시즌까지 팀을 맡았던 휴고 윌리스 감독이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질되고, 수석 코치로 일하다가 잠시 일신상의 이유로 떠나있었던 프랑크 베우스만테른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성배가 주전급 선수로 도약하기 전에 팀을 떠났던 베우스만테른이었기 때문에 성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팀 내 탑클래스 유망주라는 것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휴가를 반납한 성배의 행동으로 인해 아마도 감독의 다음 시즌 구상에 성배의 역할은 조금이라도 더 커졌을 것이었다.

“어때? 이번 시즌에는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것 같아?”

“나야 모르지. 그게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감독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대는 하고 있지? 이번에는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 20경기 정도 선발로 뛰고 싶네. 더 많이 뛰는 건 별로.”

“응? 20경기? 그 애매한 숫자는 뭐야?”

“올리비에와 안토니랑 같이 양쪽 풀백을 번갈아 나설 때, 출전할 수 있는 숫자. 챔피언스리그도 있으니까 둘이 합쳐서 그 정도는 쉬겠지.”

진심이었다.

성배는 일단 선발로 20경기 정도, 교체로 10경기 정도 출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생각했다.

한 시즌 내내 주전으로 출장하는 것은 아직 이 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경기 내내 상대 진영과 우리 진영을 오가며 뛰어다닐 수 있는 체력은 충분했지만, 한 시즌 동안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경험이 필요했다.

성배의 경우에 경험은 충분했지만, 신체가 아직 그런 사이클에 익숙해지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하필이면 20경기야? 그 정도면 거의 주전이나 다름없는데 그냥 30경기 정도 뛰고 싶다고 하지.”

“20경기. 내가 컨디션 조절을 하면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일 것 같은데. 열여덟에 스무 경기 정도 선발로 나서는 것도 대단한 거고, 그 정도면 나도 출전할 때마다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러모로 그게 베스트지.”

대답을 듣고 나서 콤파니는 묘한 시선으로 성배를 바라보았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3/04시즌, 처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던 자신이 바로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도 진짜 대단하다. 보통 그때는 최대한 많은 경기에 나가고 싶지 않나?"

"나도 많은 경기에 나가고 싶긴 해. 그리고 내 예상보다 빨리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서 많은 경기에 나가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훌륭한 일이지."

콤파니 자신이 데뷔 시즌부터 29경기를 소화하는 동안 중간중간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 몸이 무거웠던 경기가 있었고, 지난 시즌까지 2년 동안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겨우 깨달은 것.

그것을 벌써 알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전 자리에 대한 욕심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때? 귀화 생각은 아직도 없어? 넌 분명 벨기에 대표로 성공할 수 있을 텐데.”

“9월에 한 번 기대해봐. 그럼 난 아직 훈련이 남아서 먼저 간다.”

성배의 대답에 콤파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9월.

9월에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산 마리노와의 2006 FIFA 독일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 벨기에 국가대표로 뽑힐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성배를 열심히 설득해왔던 콤파니였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04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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