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39 >
“그래, 알았다.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아버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의 말에 표정이 밝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장석도 어쩔 수 없이 미소 지었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승낙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이유는 성배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피해가 있을까 걱정하는 아들, 이미 자신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아들에게 자신으로 인해 또 다른 걱정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배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장석은 아이들의 일은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조언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성배라면 잘할 것 같으니까. 내 아들이지만 참 믿음직스러워졌어. 잘 컸구나.’
성배를 바라보는 장석의 눈빛은 매우 따뜻했다.
어느새 훌쩍 자라 한 명의 듬직한 어른이 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인데, 따뜻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에이, 조금만 더 쉬다가 가지.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니? 1년 만에 왔는데...”
“하하하, 아버지 심심해하세요. 안 그래도 어제 전화할 때 빨리 오라고 성화 시더라고요. 혼자 계시려니까 많이 심심하신가 봐요.”
“거짓말이야. 너희 아버지가 심심해하실 리 있니? 매일 일하다 만난 사람들이랑 술이나 드시겠지.”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유빈이와의 시간은 화살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성배에게는 쉬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 유빈이와 오랜만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몸 상태를 유지하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그리고 하체를 단련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달리기도 하는 등 운동을 쉬지는 않았지만 역시 공을 다루고 싶었다.
“쉬는 것도 쉬어본 사람들이나 하는 건가 봐요. 공을 못 만지니까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네요.”
“그래. 좋은 거야. 네 나이 때는 그렇게 뭔가에 확 빠져있는 모습이 좋아.”
그렇게 말하는 혜진도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일에 확 빠져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무섭게 몰두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성배 자신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인지 몰랐다.
“옙.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저기 있는 외국인 이미그레이션으로 들어오겠네요.”
“그러든지 말든지. 이번에도 그랬지만 다음에도 공항으로는 안 나올 거야.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건 너 알아서 하렴.”
“와... 냉정해... 알았어요, 들어가 보세요. 오늘은 일찍부터 일어나서 운전하셨으니까 회사 들어가서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누가 누굴 걱정하니? 엄마 이래 보여도 슈퍼 맘이야. 반차내고 오전에 고생하다가 오후부터 일해도 남들보다 더 잘한다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부터 해. 시차 적응 잘하고.”
장석이 그랬던 것처럼 혜진 역시 성배의 귀화 선언에 길지 않은 시간을 고민한 후 바로 승낙해주었다.
성배의 말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배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성배가 말을 꺼냈던 처음부터 별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귀화 계획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이었던 부모님의 허락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낸 성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여보세요?]
“아, 버크만? 저 지금 벨기에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대충 9시간 정도 뒤에 항상 만나던 카페에서 뵐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섯 시쯤 거기서 뵙죠.]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오전 8시.
한국에서 벨기에로 가는 직항편은 없고 경유해서 가야 하므로 대략적인 소요 시간은 15시간 정도였고, 여기에 한국과 벨기에의 시차 7시간을 고려하면 대략 네 시쯤 브뤼셀 공항에 도착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게 버크만과 약속을 잡은 성배는 노트북을 꺼내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버크만 씨. 저 벨기에로 귀화하기로 했습니다.”
“예? 귀화요? 정말입니까?”
“예. EU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유럽에서 축구선수로 생활하기 훨씬 편하니까요. 요즘 세상에 국적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성배의 말을 듣고 버크만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에이전트 입장에서도 EU 국적을 가지고 있는 선수의 서포트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수밖에 없었다.
영입에 제한이 없어서 많은 클럽들이 달라붙고, 그 과정에서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버크만 씨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니까? 뭐든지 다 이야기해보시죠.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테니까. 이런 업무를 처리하라고 에이전트가 있는 거죠.”
축구선수에게 자신을 관리해주는 에이전트의 역량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축구만 해온 선수들이 다른 부분들에서까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선수는 축구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광고나 사업을 비롯한 이런저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에이전트가 존재했다.
이런 이유로 선수의 기량이 비슷하더라도 에이전트의 역량에 따라 위상과 입지와 확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직 젊지만, 능력이 있으니 40대에 세계 최고 중 한 명이 된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버크만을 에이전트로 선택한 성배는 굉장히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버크만은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 최고가 되는 사람이었다.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40대 중후반.
현재 30대 중반인 버크만이 성장할 몇 년 뒤, 그때가 성배에게 에이전트의 역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일 것이었다.
“벨기에 축구협회 관계자들을 만나서 제가 귀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해주세요.”
“흠... 그리고요?”
“제가 귀화한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을 때, 저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다면 저를 찾아올 겁니다. 요즘 벨기에 대표팀 분위기가 별로 안 좋잖아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주필러 리그 최고 유망주 중 한 명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데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최근 벨기에 축구계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이후로는 공동 개최한 유로 2000에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했음에도 조별리그에서 탈락.
2002년 월드컵에서는 일본, 러시아, 튀니지라는 희대의 꿀조에 속해 16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추락하는 중이었다.
유로 2004에는 아예 예선에서 탈락하면서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있었던 2006 FIFA 독일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경기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0-0 무승부를 거둔 벨기에는 현재 2승 2무 2패, 승점 8점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스페인에 이어 3위였다.
경기력에서도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2006년 월드컵 참가도 쉽지 않아 보였고, 이로 인해 벨기에 축구 팬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성인 대표팀뿐 아니라 유소년 대표팀들까지도 전부 엉망이니 한 명이 아쉽겠죠.”
“맞습니다. 솔직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죠.”
또한, 특급 유망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중앙 수비수 포지션과 안토니 반덴 보레라는 특급 유망주가 버티고 있는 라이트백 포지션에 비해 레프트백의 라인업은 빈약했다.
이때, 성배의 귀화는 벨기에에게 큰 이득이 될 수밖에 없었다.
FIFA 랭킹에서 50위권까지 떨어진 벨기에 축구계 최악의 상황이 성배에게는 최고의 기회가 된 것이었다.
“아마 주가 귀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났으면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찾아왔을 겁니다. 청소년 대표팀으로도 뛴 적이 없는 특급 유망주가 국적 취득 조건을 거의 다 채웠는데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죠. 지금도 몸이 달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그러니까 그걸 노려서 이것저것 요구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건, 귀화 조건을 갖추자마자 바로 국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거죠. 최소한 제가 벨기에에서 거주한 지 3년째 되는 1월부터 바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어야 합니다. 협회 관계자들에게 이건 꼭 약속받아주세요. 전례도 많아서 아마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보통 귀화를 신청한 이후에 정식으로 국적이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중국적이 존재하고 EU 설립 이후 국적의 중요성이 매우 옅어진 유럽은 조건만 만족할 경우, 국적 취득이 쉬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심사 기간이 짧지만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가치를 세계에 알려야 하는 성배로서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그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특례 조항을 통해 타국의 선수에게 국적을 내주고 국가대표 자격을 주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
지금도 국가 정책상의 귀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도 해당 국가에서 2년만 거주하면 국적을 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선수가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배 역시 벨기에에서 2년 4개월이 넘게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화 의사를 밝히면 바로 벨기에 국적을 받을 수도 있었다.
“굳이 지금 당장 벨기에 국적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만약에 3년을 채우지 않아도 벨기에로 귀화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면 바로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차피 벨기에 국적을 딸 거라면 그게 좋겠죠. 운이 좋으면 당장 9월에 있을 월드컵 예선이나 10월에 있을 U-19 유럽 선수권대회 예선에서 활약할 수 있을 테니.”
내년 2월까지 기다리기에는 그때까지 있는 굵직한 국가대항전이 너무 많았다.
운이 좋다면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경기를 위한 대표팀에 소집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렵다고 봐도 최소한 10월에 있을 UEFA 유로피언 U-19 챔피언십 대표로는 분명히 활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 성배에게는 적격의 대회였고, 출전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었다.
“꾸준히 알아봐 주세요. 일단 귀화 신청 이후에 걸릴 시간을 없애는 것이 첫 번째, 지금 당장 벨기에 국적을 받아내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아, 그리고 한국에서의 부정적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해 벨기에 쪽에서 저를 귀화시키려 찾아왔다는 걸 어필해주세요.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는 건 상당한 방패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발바닥이 안 보이게 한 번 뛰어다녀보죠. 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쪽은 제 전문이니까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버크만의 능력은 계속 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다.
그래서 성배는 버크만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순간부터 이미 귀화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버크만이 벨기에 국적을 가져와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 낭만필드 - 039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