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8화 (269/356)

< 낭만필드 - 038 >

귀화(歸化) [명사]

1. 왕의 어진 정치에 감화되어 그 백성이 됨.

2. <법률>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됨.

3. ...

귀화 선수들의 존재는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흔했지만, 역시 ‘귀화 선수’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브라질이었다.

인재풀이 워낙 크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국가대표로 활약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았고, 이런 선수들을 확보해 국가대표팀의 전력을 상승시키길 원하는 나라들은 적극적으로 브라질 선수를 끌어들였다.

유명한 선수 중에서도 2년여 전에 포르투갈로 귀화해 오랫동안 대표로 뛰고 있는 데쿠나 1년 정도 뒤에 스페인으로 귀화할 마르코스 세나, 페페, 만단다 등.

굉장히 많은 숫자의 선수들이 귀화 선수들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대부분이 아프리카 이민자 가정 출신이거나 아프리카에서 귀화한 선수들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귀화 선수에 대한 이슈는 세계 축구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축구왕국’이라는 브라질의 최대 수출품은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천연자원이 아닌 축구 선수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많은 선수들을 다른 국가에 넘겨주었다.

어차피 좋은 선수가 넘쳐나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에서는 국가대표로 뛰기 힘들지만 충분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심지어 아시아까지 넘어와 국가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옆 나라 일본도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후이 라모스를 시작으로 와그너 로페즈, 알레한드로 도스 산토스 등 브라질 출신 귀화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나라 카타르는 국가대표팀에 열 명이 넘는 귀화 선수가 포함될 정도로 선수를 키우기보다 구매하는, 마치 클럽팀을 운영하는 것처럼 국가대표팀을 운영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FIFA는 2004년, 귀화 선수에 대한 규정을 강화했다.

귀화 선수는 해당 국가와 명확한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며, 그저 국가대표팀 발탁을 목적으로 한 귀화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조부모가 귀화할 국가에서 태어난 선수, 그것이 아니면 최소 해당 국가에서 2년 이상을 거주해야만 귀화 선수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새로운 규정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위와 같이 규정을 바꾸는 대신, U-17 대표팀보다 높은 레벨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선수는 귀화하더라도 새로운 나라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던 기존의 규정을 U-21 대표팀 이하로 대폭 완화한 것이었다.

폐단은 몇 달 뒤에 있었던 2004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아프리카 각국이 특혜를 통해 유럽 각국에서 청소년 대표로 활약한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과 브라질 선수들을 마구잡이로 귀화시켜 활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자 새로운 규정도 너무 헐겁다고 생각한 FIFA는 2008년 5월에 다시 귀화 선수 규정을 보완했고, 새로운 규정에 따라 2년 거주 기준은 만 18세 이후 최소 5년의 연속적 거주로 변경되었다.

벨기에에서 오래 활약할 생각이 없는 성배로서는 무조건 그 전에 벨기에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다.

***

“하아... 귀화하겠다고?”

“예.”

벨기에로 귀화하겠다는 성배의 말에 놀라 한 번 되물은 이후, 장석은 한참 동안 말없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자신에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정도로 즐겨 시청하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은 이미 장석의 뇌리에서 사라져있었다.

그만큼 성배의 귀화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음... 내년 1월이면 우리가 벨기에에 온 지도 3년이 되는구나.”

“네, 아버지. 그리고 조건이 충족되죠.”

성배는 외교관 자녀이지만, 외교관 가족 자격으로 벨기에에 거주했던 것이 아니라 취업비자를 받고 벨기에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귀화 자격에 문제는 없었다.

벨기에는 외국인이 3년 이상 자국에 거주할 경우, 귀화 자격을 주었다.

EU의 설립으로 인해 국적의 개념이 많이 옅어졌고, 이중국적에 관대한 유럽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국적 취득 자격을 획득하기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유명 축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영입한 비 EU 국가의 선수들을 EU 국적의 선수로 만들기 위해 임대를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성배 역시 어차피 유럽으로 올 것이었다면 더 좋은 클럽의 유스를 노려볼 수 있었지만, 굳이 벨기에로 행선지를 정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일단... 왜 귀화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들어볼까?”

‘역시, 아버지. 이 상황에서도 내 의견을 가장 먼저 물어봐 주시는구나.’

장석의 말은 또 한 번 성배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부모님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경우가 굉장히 늘어났다는 것을 성배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는 몰랐다.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주고 믿어주시는지.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나 지금이나 부모님은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신 적이 없었다.

성배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고 그 결정으로 인해 어떤 힘든 일이 생길지에 대해 이야기는 해주셨지만, 성배가 결정을 내리면 가타부타 말씀하시지 않고 성배를 지지해주었었다.

“일단, 귀화를 하게 되면 EU 국적을 얻게 돼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국적으로 생활하는 것과 EU 소속 국가 국적으로 생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편한지는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겠죠.”

“그래. 맞다. 확실히 유럽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EU 국적이 있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편해지지.”

유럽은 EU를 통해 하나로 묶여있었다.

EU 소속 국가의 국적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아니더라도 유럽에서 생활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어떻게든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으려 하는 것처럼, 유럽에서 생활할 생각이라면 EU 국적을 따는 것이 좋았다.

“유럽 생활에서 벨기에 국적을 가지게 될 경우 생기는 이득은 아버지가 저보다 더 잘 아실 테니, 저는 축구선수로서 생기는 이득을 중심으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나도 축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너처럼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우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유럽 무대에서 살아남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어요. 물론, 저는 시작이 좋았으니까 살아남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만,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의 숫자가 벨기에 국적을 가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지죠.”

성배는 유럽에서도 수준이 높다고 하는 리그들의 비 EU 국적 선수 영입 및 출전 제한을 장석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클럽 입장에서 선수는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생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성배였다.

언제까지나 한 팀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고, 현재 뛰고 있는 팀에서 자리를 잃었을 때, 옮길 수 있는 클럽, 자신을 원하는 클럽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도 어필했다.

“모든 클럽에서 원하는 최고 수준의 선수가 된다면 사실 이런 것들은 필요 없겠죠. 하지만 그런 선수가 되기 쉬운 것도 아니고, 결국 그 수준까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기량이 쇠하는 시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어쨌든 선택지를 넓히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던 필수적인 일이고, 축구선수인 제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벨기에로 귀화하는 거예요.”

“네 말은 잘 알아들었어. 네 말을 듣고 보니까 확실히 벨기에로 귀화함으로써 네가 얻는 것들이 많을 것이라는 건 알겠다. 이제 아빠가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되겠니?”

“네. 그러세요.”

성배가 할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주장한 것들이 성배가 귀화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였고, 귀화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자신이 귀화함으로써 생길 힘든 일들에 대해 말해주실 것이었다.

그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성배의 귀화가 결정될 것이었다.

“우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구나. 군대는 어떻게 할 거니?”

“하아... 역시,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긴 하죠.”

“그렇지. 우선, 네가 일단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병역의 의무와 떼놓을 수 없지. 귀화하게 된다면 한국 국적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군대는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마 한국 내에서 너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는 없을 거다.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문제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확실히 벨기에 국적을 획득하게 되면 병역의 의무는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알려졌을 때, 대다수가 남성인 한국의 축구 팬들은 성배를 비난할 것이었고, 당연히 한국에서의 활동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운동선수의 숫자가 적은 한국의 팬들은 미셸 위, 하인즈 워드 등 ‘한국계’ 선수들의 선전에도 환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충분히 성장한 뒤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한’, 그러면서 ‘군대에 가지 않은’ 선수에게도 환호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아마 상처는 받을 거예요.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벨기에 사람이 된다고 해도 한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요. 조국은 아니게 되겠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일 것이고, 한국 팬들의 비난을 받으면 아마 슬프겠죠.”

“그래. 아빠는 그게 걱정돼. 몸으로 하는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의 기본은 정신력이야. 한국 팬들의 비난에 네가 흔들리면 그라운드 위에서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아요. 절대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어요. 한국 팬들의 지지를 잃는다고 해도 제가 활약하는 클럽, 그리고 새롭게 제 나라가 될 벨기에 팬들 일부의 지지를 얻으면 돼요. 팬들이 저를 대신해 살아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애초에 국적을 벨기에로 바꾸고도 한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 팬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자신을 모델로 원하는 기업이나 단체가 있다면 당연히 한국에서 활동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굳이 한국에서 활동할 필요는 없었다.

벨기에 국적을 따게 된다면, EU에 가입된 모든 국가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굳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에서의 활동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클럽에서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려고 할 때도 일본과 중국이 우선이었고, 한국이 그다음이기는 하지만 사실 별로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안정환 선수가 페루자에 입단했을 때, 페루자 구단주가 파르마의 나카타 히데토시와 비교해 현저히 적은 재정적 이익 때문에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한국 시장의 규모는 작았다.

나중에는 나름 경쟁력을 갖추고 3순위로 올라서지만, 어쨌든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생각보다 효과도 별로인 작은 시장.

그것이 한국 시장의 현실이었다.

“군대 가기 싫어서 벨기에 국적을 따겠다는 건 아니겠지? 뭐, 요즘 네 모습을 보면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만.”

“당연하죠. 군대요? 그거 별거 아니에요. 아시안게임 금메달만 따면 면제되는데 그게 뭐 무섭다고 국적까지 바꿔요.”

아버지가 농담하시는 것을 봤을 때, 거의 설득에 성공한 것 같았다.

어차피 성배가 결정하면 그대로 지지해주셨을 테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시원하게 승낙을 받고 진행하는 것을 원했던 성배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버지. 아시잖아요. 국적? 그거 사실 별것 아니에요. 그냥 벨기에 국민으로 등록되고, 세금을 벨기에 정부에 낸다는 것? 그 정도를 제외하면 변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벨기에 국적을 따도 저는 변함없이 아버지 아들이고, 어머니 아들이고, 유빈이 오빠일 텐데요.”

어느 정도 설득이 된 것 같다고 판단한 성배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으로 다가갔다.

사실 장석도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귀화하는 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할 경우 매국노라고 욕할 정도로 귀화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한국이었기 때문에 귀화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공무원이신데,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리 가능성이 큰 건 아니지만, 저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저 진짜 성공하고 싶어요, 아버지. 유럽 무대에서 진짜 제대로 된 선수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

성배의 말에 장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 낭만필드 - 03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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