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37 >
“뒤!!”
성배가 사이드라인을 따라 빠르게 올라가면서 오버래핑을 시도하고 있었다.
상대 수비수와 대치하고 있던 음펜자는 성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측면의 비어있는 공간으로 볼을 밀어주었고, 볼을 먼저 따내기 위해 성배와 상대 윙어가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내 거다.’
스피드는 두 선수가 비슷했지만, 뒤쪽으로 빠져있다가 먼저 출발해 파고든 성배가 더 빨랐다.
성배의 움직임을 보고 뒤늦게 출발한 상대 선수는 당연히 뒤로 처졌고, 곧 성배에게 따라잡혔다.
먼저 최고 속도에 도달해 신체 접촉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피하면서 파고든 성배는 골라인을 나가기 직전, 볼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음펜자가 밀어준 볼은 공간으로 향했다. 때문에 볼을 따라붙는 사이에 골라인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조금만 더 플레이를 지체하면 그대로 라인을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좋은 크로스 기회를 잡아놓고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기에, 성배는 볼을 잡지 않고 달리던 자세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제대로 맞았다!!’
편하지 않은 자세였지만, 임팩트 순간에 이미 멋지게 올렸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를 느낀 성배는 바로 고개를 들어 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상대편에서 볼을 클리어해 역습으로 전개하는 것에 대한 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이스!! 그 키로 헤딩은 잘도 하네.”
“이 자식이!! 어시스트 잘해놓고 맞고 싶냐?”
크로스 이후 바로 수비태세로 전환하며 또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어필한 성배의 플레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플레이가 되었다.
오른쪽 측면에서 침투하며 잘라 들어간 빌헬름슨이 머리를 이용해 골대 안에 쑤셔넣으며 득점을 기록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선취 골을 먼저 허용하고 끌려가다가 1-1 동점을 만들었던 안더레흐트는 성배의 어시스트와 빌헬름슨의 득점으로 2-1 역전을 이루어냈다.
“뛰어!! 마지막까지 뛰라고!!”
“어차피 의미 없는 경기야!! 팬들한테 재미있는 경기라도 보여주자고!!”
경기 종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안더레흐트는 마지막까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어차피 클럽 브뤼헤가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고, 안더레흐트도 동시에 2위 자리를 확정 지었기 때문에 마지막 홈 경기에서 재미없는 축구를 보여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역전 골이 터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격의 고삐를 바짝 당긴 안더레흐트의 선봉에는 교체로 출전해 체력이 쌩쌩하게 남아있는 성배가 서 있었다.
-삑!! 삐--익!!
‘끝났구나...’
2005년 5월 21일,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는 리그 34라운드 경기가 펼쳐졌다.
RAEC 몽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른 안더레흐트는 역전 골을 터뜨린 빌헬름슨과 그 골을 어시스트한 성배의 활약에 힘입어 2-1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안더레흐트의 입장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시즌이었음은 분명했다.
세 명의 골키퍼가 고만고만한 활약을 보이며 열 경기 정도씩 나누어 출전한 골키퍼 포지션, 그리고 중원장악력에 드러난 문제에도 불구하고 준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작지 않은 약점을 극복하고 준우승을 차지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으며, 어찌 되었든 챔피언스리그 2차 예선 티켓을 따냈다는 것은 최소한의 성공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턱밑까지 쫓아온 스탕다르 리에쥬와 KRC 헹크의 추격을 뿌리친 것도 만족스러운 점이었다.
그리고 안더레흐트의 성공에는 성배도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힘을 보탰다.
20라운드에 데뷔한 이후 열다섯 경기에서 네 번의 선발 출장을 포함해 열두 경기에 출전했고,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었다.
출전한 경기마다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여주었고, 왼쪽 측면 공격에서의 약점을 보완해주었다.
성배의 활약이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역시 안더레흐트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어 팀의 페이스가 떨어지던 것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았다는 부분에 있었다.
백업 풀백 자원의 부재와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노쇠화로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난관에 부딪혔던 안더레흐트는 양쪽 풀백과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가리지 않고 출전한 성배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열여덟 데뷔 시즌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
리그 마지막 경기까지 마치며 시즌을 마무리한 안더레흐트는 선수들에게 5주간의 휴가를 주었다.
일단 2주 정도 한국으로 들어가 어머니, 유빈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성배는 그 전에 먼저 이번 시즌의 활약에 대해 자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계획을 확실히 짜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필수였다.
‘이번 시즌은... 일단 나쁘지 않았어. 유스에서 활약하다가 후반기가 시작한 뒤에야 올라온 것치고는 좋았지. 자리도 확실히 잡았고. 출발이 좋아.’
데뷔 시즌인 2004/05시즌에 대한 성배의 개인적인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잘 쳐주면 좋았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선발 출전 기회를 네 번밖에 잡지 못했던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후반기 일정까지 시작한 상황에서 승격된 것치고는 만족할 수 있는 활약이라는 것이 성배의 생각이었다.
‘후반기 일정이 시작하기 전에 승격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지.’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를 준비하는 시기, 그러니까 1월 이적시장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이적시장이 닫히기 전, 그사이에 승격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약점을 보강하고 전술을 수정하는 시기가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그 시기가 지난 뒤에 승격한 성배는 팀의 전술에 녹아들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 때문에 승격 초반에 중용되지 못했다.
‘너무 조급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단 만족하자.’
하지만 어쨌든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 시즌은 나쁘지 않았다.
성배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를 떠나 조금 더 수준 높은 리그로 떠나는 것은 스무 살이 되기 전, 아직 1년 반이나 남아있었다.
이번 반년은 다른 클럽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안더레흐트에서 자리를 잡는 시간이었고, 결과적으로 안더레흐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보다... 이제 휴가 끝나고 시즌 치르다 보면 금방 2006년이네. 벨기에에 온 지... 3년이 곧 되는구나.’
그리고 성배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벨기에로 넘어온 지 3년이 되는 2006년 2월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계획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진행해왔던 성배인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과거의 경험과 서른여섯 살의 노련함을 기반으로 계획을 세우고 한 번 세운 계획은 의심하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다음 계획의 실행 시점이 곧 다가오는 상황에서 성배를 흔들고 있는 것은 계획 실행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자신이 어떤 의도로 이 계획을 세웠는지, 이 계획을 수행했을 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고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나오는 거부감이 성배를 망설이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배가 불법적인 일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인정되고 규정과 절차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합법적인 계획이었다.
또, 편법도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합법,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일을 진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쉬워진다는 것, 그리고 선택지가 넓어진다는 것... 역시,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이대로 수행하는 것이 최선인 것은 확실해.’
천천히 깊게 생각해볼수록 역시나 자신의 계획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계획을 절대로 엎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하게 되었다.
‘이 계획을 수행해서 내가 잃는 것은 뭐가 있을까? 인기? 계획대로 된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이미지? 이것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계획대로 밀고 나갔을 때 따라오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감정의 선이 무너지지 않아 성배를 고민하게 하였다.
그래도 생각하면 할수록 이 계획을 이대로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나마 계획을 따라갔을 때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만회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이 계획이 아니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무조건 원래의 계획을 따라가야만 했다.
‘하아... 나는 괜찮은데 아버지, 어머니도 괜찮으실까?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한데...’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 성배는 이제 부모님에 대한 걱정으로 또 고민이 되었다.
확실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실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부분이 이해되면 저 부분이 걸리고, 저 부분을 또 어떻게든 이해하면 다시 그 부분이 걸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겠다. 어쨌든 계획대로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해. 아버지,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두 분이라면 굳이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이겨내실 수 있을 거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성배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지금 고민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욕을 먹는 것은 싫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것은 전생의 나약한 마음이었고, 이번 생에서의 자신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부모님께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렸지만, 두 분이라면 분명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으실 것이라 믿었다. 누구보다 강하신 분들이니까.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어차피... 나만 걱정하면 돼. 내가... 제일 약하니까.'
어차피 이미 결론은 오래전에 나와 있었다.
정말 오래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고, 지금 고민해도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다고 확실할 수 있었다.
이번 결정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든지 이번 결정을 뒤집었을 때보다는 좋은 상황일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굳게 다진 성배가 방문을 열고 나가 언제나처럼 거실에서 스포츠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 아버지의 앞에 앉았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또 뭔데? 이제 네가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무섭다.”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 TV를 시청하던 장석은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는 성배를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편안하게 널브러져 있던 자세도 어느새 반쯤은 일으켜 세웠다.
어느 순간부터 진지한 상태의 아들을 대하기 힘들어졌다고 느끼는 장석이었다.
“저... 귀화하겠습니다. 벨기에 국적, 따겠습니다.”
< 낭만필드 - 03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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