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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36화 (267/356)

< 낭만필드 - 036 >

“이제 겨우 열여덟에 불과한 어린 선수인데도 벌써부터 벨기에 최강의 팀 안더레흐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와 3년 계약을 하겠다는 건 계약을 진행할 의사가 없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계약 기간을 3년으로 잡은 것은 리그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축구에 집중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계약 기간이 긴 대신에 후원 규모가 동급의 선수들에 비해 훨씬 큽니다.”

슬슬 성배가 리그에서 중용되기 시작하면서 스포츠용품 회사들의 스폰서 제의가 줄을 잇고 있었다.

십 대의 어린 나이에 주필러 리그에서 주전급으로 성장한 선수들은 최소한 빅 리그 무대를 밟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선수들을 일찌감치 선점해 후원하면서 광고 효과를 얻기 위한 회사들의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성배의 잠재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스폰서 계약은 현재의 광고 효과와 계약 기간 내의 예상 광고 효과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번에 들어온 계약 제의들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성배의 잠재력과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많지 않은 한국에서의 광고 효과를 노려 업계 1, 2위 기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포츠용품 회사들이 성배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동급의 선수들에 비해서 후원 규모가 크다고요? 주성배 선수는 현재 팀 내에서 안토니 반덴 보레 선수와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2년 계약을 체결한 반덴 보레 선수보다 3년 계약이 제시된 이 계약서상의 금액이 더 적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광고 효과를 위한 계약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두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이 비등하다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지만, 이미 벨기에 국가대표로 활약 중인 반덴 보레 선수와 아직 청소년 대표 출전 기록조차 없는 주성배 선수의 후원 금액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백인이 아니고 유럽 국적이 아니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겠지.

성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이 회사들이 피부색과 출신지로 자신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냉정하게 광고 효과가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계약서를 내민 것뿐이었으니까.

이런 계약서를 받아들게 된 이유는 팬들이 백인 스타에게, 유럽인 스타에게 더 환호하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은 그 차이가 크지 않아. 하지만 최고 중에서도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선수는 언제나 백인이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인권 운동가도 아닌데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날 수도 없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인종차별도 아니었다.

그저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피부색과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에게 호감을 느낄 뿐이었으니까.

차별이 아닌 호감과 선호의 영역인데 뭐라 불만을 제기할 것인가.

그저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진행된 협상에서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끝까지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 계약서의 내용이 조금씩 수정되었다.

성배 측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 계약 기간은 3년에서 2년으로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연간 후원 금액 규모도 대폭 삭감되었다.

어차피 회사 측에서도 계약 기간 3년을 성배가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3년을 질러본 것은 그저 계약 전에 간을 보기 위했던 것뿐이었고, 십중팔구는 2년 정도에서 계약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어린 나이의 유망주는 대부분 2년 계약을 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족스러운 계약을 맺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쪽에게도 만족스러운 계약입니다. 주성배 선수나 저희나 이 계약을 통해 많은 힘을 얻었으면 좋겠군요.”

최종적으로 합의된 계약에 따라 성배는 앞으로 2년 동안 업계 2위 기업으로부터 연간 4천만 원의 용품 및 금액 후원을 받게 되었다.

2년간 계약금을 포함해 총액 1억 원을 지원받게 된 것이었다.

스타 선수들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성규한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18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이 정도도 놀라웠다.

연봉 및 보너스, 그리고 스폰서까지. 성배의 수익은 전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

20라운드에서 펼쳐진 주필러 리그 데뷔전에서 교체로 출전해 첫 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성배는 꾸준한 출전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24라운드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장해 탄탄한 수비력과 쏠쏠한 공격력을 선보인 다음에는 선발 출장도 늘어났다.

데샤흐트, 반덴 보레와 함께 돌아가면서 선발로 그라운드에 나서고 있었고, 스폰서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크게 놓고 보면 거칠 것 없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기량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배에게도 분명히 약점이 존재했고, 신체적인 능력과 재능도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이 있더라도 16년 동안 쌓은 전생의 기량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2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때문에, 정상급과는 거리가 있는 주필러 리그의 선수들이라지만, 한 경기에 몇 번 정도는 성배를 완전히 제압했다.

“으악!!”

성배가 가지고 있는 그런 불안요소들은 성배의 세 번째 선발 출전 경기인 KVC 베스테롤로와의 31라운드 경기에서 확연하게 나타났다.

주필러 리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피지컬의 윙어를 상대로 성배는 꽤나 고전하는 중이었다.

‘안 불었어. 이 정도는 넘어간다는 건가.’

지금도 깊숙이 투입된 볼을 따라가면서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펼치다가 상대의 힘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중심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성배의 시선은 주심을 향했지만, 주심은 이 정도의 몸싸움을 파울로 선언하지 않는 성향이었고, 역시나 휘슬은 불리지 않았다.

'이런 유형이 별로 없어서 벨기에를 선택했는데...'

누워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배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자의 뒤를 쫓았다.

플레이가 거칠었든, 정당했든 상관없었다.

파울이 선언되지 않았고, 자신이 넘어졌으면 100% 자신의 잘못이었다.

'잡혀라, 좀.'

주필러 리그는 애초에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없었다.

그리고 몸싸움을 선호하지 않고, 거친 몸싸움이 벌어지는 경우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들보다는 빠르거나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을 선호했다.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일 뿐, 그중에는 리그의 경향과 반대되는 선수가 분명히 있었고, 오늘 베스테롤로의 선발로 나온 레프트 윙어 자자가 바로 그런 선수였다.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서 페예노르트로부터 임대로 이적한 자자는 스피드가 부족하지만 피지컬과 기술이 뛰어난 유형의 윙어였다.

윙어로서 스피드가 부족하다는 것은 꽤 큰 단점이었지만 몸싸움을 꺼리는 선수가 많은 주필러 리그에서 이를 역이용, 거친 몸싸움을 유도하면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성배에게도 통했다.

‘막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데... 몸싸움이 가능한 거리를 줘버리면 역시 까다로워.’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명문 클럽인 페예노르트 소속 유망주답게 어린 나이임에도 훌륭한 기술과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지만 어쨌든 임대되었다는 것은 페예노르트의 수준과 비교하면 아직 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뛰어난 기술과 피지컬에 비해 스피드가 조금 부족했지만 가장 큰 단점은 경험이 적다는 것.

덕분에 전체적으로 자자를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붙으면 일단 튕겨 나가는 상황이다 보니 수비력과는 별개로 종종 뚫리고 있었다.

붙어서 수비 좀 해보려고 하면 계속 밀려나다 보니 짜증까지 치솟았다.

물론 성배의 약점도 약점이지만 자자의 피지컬이 무지막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도,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흐음... 지금 주의 신장이 얼마나 되지?”

“제가 알기로는 181cm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181cm라...”

성배의 부족한 피지컬은 윌리스 감독의 고민거리였다.

181cm의 신장은 나쁘지 않았으나 타고난 뼈대와 신체조건이 빈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몸싸움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의 경기력도 충분히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빅 리그 클럽들의 지갑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피지컬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힘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이상하게 몸싸움에 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이지.”

“맞습니다. 리포트를 보면 평균 이하이기는 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닌데, 몸싸움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래도...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몸을 사린다기보다는 몸싸움을 피하는 것 같아. 과거에 큰 부상을 당했던 선수들한테 가끔 보이는 그런 거 말이지. 아무리 알아봐도 부상전력은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런 모습이 나오는 지 모르겠단 말이야. 역시 특이해...”

성배가 상대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이상할 정도로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윌리스 감독을 비롯해 코칭스태프들과 동료 선수들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각한 부상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 중에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심각할 정도로 몸싸움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성배가 가지고 있는 피지컬은 분명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성배의 전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흠,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181cm에 열여덟 살이면 키는 클 만큼 컸다고 봐도 되겠네. 다행히 이제 시즌도 거의 다 끝나가니까 슬슬 피지컬 코치랑 집중 훈련 계획 잡으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성배가 몸싸움을 극히 꺼리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코치가 아닌 심리상담가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클럽 쪽과 연결되어있는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한 윌리스 감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만 취하기로 했다.

성배도 이제 만 18세로 공식적인 성인이 되었고, 신장도 180cm를 넘었기 때문에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해도 문제는 없었다.

시즌도 이제 마지막 세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는 막바지였기 때문에 시기상으로도 딱 좋았다.

“아이고... 확실히 피지컬을 키우는 게 급하겠어.”

윌리스 감독이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을 때, 성배는 자신을 등진 채 두 팔을 넓게 벌린 자세로 볼을 지키는 자자의 뒤에서 볼을 빼앗기 위해 버둥거리며 발을 흔들고 있었다.

뒤에서 밀면서 볼썽사나운 자세로 발을 뻗어도 자자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고, 굳건히 버티며 볼을 지키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3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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