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5화 (266/356)

< 낭만필드 - 035 >

[샤를루아의 라이트백인 듀페는 스피드가 아주 형편없는 선수야. 물론, 굉장히 터프하고 단단하지만 너의 스피드라면 충분히 벗겨낼 수 있어. 문제는 라이트윙인 브롱고야.]

‘크으... 볼이 발에서 떨어지질 않네. 생각보다 어렵겠어.’

윌리스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의 생각이 일치함에 따라 성배는 25라운드 스포르팅 샤를루아 전에 선발로 출전할 수 있었다.

오늘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는 성배를 불러세운 윌리스 감독은 성배에게 라이트윙 브롱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는데, 윌리스 감독의 걱정대로 성배는 브롱고를 상대로 고전하는 중이었다.

성배가 처음 보는 선수로, 꽤나 나이가 있는 선수였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된 게 국가대표 출신이 이리 많아...’

토니 브롱고.

벨기에 유니폼을 입고 A매치 일곱 경기에 나선 국가대표 출신으로 전성기에는 주필러 리그 32경기에서 30골을 넣었던 몬스터 시즌을 기록한, 한때 날렸던 선수가 바로 오늘 성배와 매치업된 상대였다.

심심찮게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득점력을 가지고 있었고, 패싱 센스와 드리블 스킬, 발밑 테크닉이 좋았다.

‘지금이다!!’

하지만 서른을 넘은 지금에는 공략할 방법이 확실히 존재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170cm의 작은 신장과 60kg 초반에 불과한 몸무게는 서른을 넘긴 지금 브롱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선수생활 동안 당한 부상들이 스피드까지 잡아먹은 지금에는 오로지 기술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가 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피지컬이 약해도... 아저씨보다는 낫네.’

성배도 피지컬이 약한 축에 속하는 선수였지만, 브롱고는 그런 성배보다도 훨씬 더 약했다.

몇 번 부딪히는 동안 고전하면서도 브롱고의 능력을 탐색한 성배는 그런 브롱고의 약점을 알아냈고, 타이밍을 잡아서 돌파를 시도하는 브롱고의 앞을 가로막았다.

볼을 먼저 굴려놓고 따라 들어가려할 때, 볼만 보내주고 돌파 루트를 선점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성배의 예상대로 브롱고는 진로가 막히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기회다!!’

브롱고에게서 볼을 빼앗아낸 뒤, 성배는 그라운드를 빠르게 훑었다.

막기 쉬운 선수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브롱고는 이번 시즌 리그 5위를 달리고 있는 샤를루아의 최다 득점자이자 에이스였다.

브롱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샤를루아 선수들은 평소보다 많이 올라와 버렸고, 당연히 뒷공간이 열려 있었다.

‘좋은 움직임.’

-뻐-엉!!

확실히 안더레흐트는 좋은 팀이었다.

성배가 샤를루아의 넓은 뒷공간을 발견한 것과 거의 동시에 안더레흐트의 두 윙어, 음펜자와 빌헬름슨이 그 공간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두 선수 중 아무에게나 볼을 넘겨도 좋은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샤를루아의 선수들도 현재 자신들의 뒷공간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볼이 자신들의 진영으로 빠르게 투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더레흐트의 패스 공급을 담당하는 바슈주와 제터베리가 볼을 잡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성배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적절한 대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뒷공간을 헤집는 스피드만 따지자면 빌헬름슨의 스피드가 훨씬 빨랐다.

음펜자도 나쁘지 않은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빌헬름슨은 스피드 스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배의 선택은 빌헬름슨이 아닌 음펜자였다.

‘케레는... 미친 황소야. 차라리 발이 느린 시퀘 쪽으로 붙이는 게 훨씬 나아.’

샤를루아의 두 센터백, 케레와 시퀘는 그 스타일이 정반대에 위치하는 선수들로 각자 피지컬과 경험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어마어마한 피지컬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24세의 젊은 선수가 케레, 신체 능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노련하고 지능적인 수비를 보여주는 36세의 선수가 시퀘였다.

케레는 빌헬름슨을, 시퀘는 음펜자를 막으러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성배는 음펜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이유가 더 있었다.

음펜자는 중앙 쪽으로 파고들면서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위치로 움직였고, 빌헬름슨은 측면으로 살짝 빠지면서 다른 선수의 득점을 만들어주는 위치로 움직였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빌헬름슨에게 따라붙는 선수는 케레 외에도 레프트백 레이나가 있었고, 이 선수 역시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자랑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볼을 트래핑하는 동안 따라잡힐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라이트백 듀페의 스피드로는 음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좋았어!! 역시!! 주를 투입하는 것이 정답이었군!!”

“수비수한테서 저런 패스가 나가도 되는 겁니까? 저 친구가 작품 하나 만들었는데요?”

성배의 패스는 정확하게 음펜자의 오른발에 닿았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볼을 나름대로 좋은 위치에 떨어뜨린 음펜자는 한 번의 스텝을 밟은 뒤 바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고, 그 슈팅은 샤를루아의 골망을 흔들었다.

음펜자의 이번 시즌 네 번째 골이자 성배의 시즌 두 번째 어시스트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주의 패스는 분명 활용도가 높을 거야. 남은 시즌 동안 쏠쏠하게 써먹을 무기가 생겼군.”

바슈쥬나 제터베리가 정교한 롱패스를 장착하고 있지만, 압박을 덜 받는 수비수가 그런 패스를 뿌려줄 수 있다는 건 팀의 입장에서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팀의 최후방을 담당하는 수비라인에서 단 한 번의 패스로 전방을 향해 좋은 패스를 넣어줄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팀의 공격 옵션을 몇 가지나 더 늘려줄 수 있었다.

지금 성배가 활약하고 있는 2005년은 아직 후방 빌드업의 중요성이 그리 강조되지 않는 시기였다.

빌드업은 보통 공격형 미드필더가 담당하고 있었고, 공격형 미드필더가 고전하는 경우에는 공격적인 역할을 맡은 중앙 미드필더까지만 그 역할이 내려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플레이메이커들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수비형 미드필더의 전성시대가 시작하면서 강한 압박을 받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빌드업을 담당하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점점 빌드업 위치가 압박이 덜한 후방으로 내려오고 있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성배가 데뷔했다.

시기상으로 뛰어난 빌드업 능력을 갖춘 수비수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능력을 갖춘 선수는 많지 않은 상황.

이 상황은 성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다른 코치들과 함께 주의 저 패스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보도록 해. 저거 잘만 활용하면 큰 무기가 될 거야.”

“알겠습니다.”

윌리스 감독도 성배의 롱패스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단 한 번의 패스로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성배의 앞날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

성배의 어시스트에 이은 음펜자의 득점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한 안더레흐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기를 주도했다.

이번 시즌, 무서운 득점 행진을 벌이고 있는 예스트로비치가 한 골을 추가했고 코너킥 상황에서 콤파니도 한 골을 보태며 3-0.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하던 중,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지는 다득점 경기를 팬들에게 선사하는 중이었다.

‘완전히 압도했다. 이제 아무것도 못 해.’

그리고 그 안에서 성배 역시 훌륭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약점을 간파당해 성배에게 완전히 틀어막힌 브롱고는 에이스로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성배의 수비를 뚫어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체력만 허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브롱고와 교체되어 출전한 방구라 역시 성배를 뚫어내지 못했다.

브롱고와 비슷한 스타일로 브롱고보다 피지컬이 조금 더 낫고 축구 지능과 노련미에서는 훨씬 부족한 방구라가 성배를 뚫어내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었다.

‘그래. 아무것도 못 한다고 했잖아. 완전히 꺾였어.’

하지만 샤를루아의 다른 선수들은 큰 점수 차로 인해 체력이 평소보다 빠르게 방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교체로 출전해 체력이 많이 남아있는 방구라에게 볼이 자주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료들은 계속해서 일대일을 강요하는데 그때마다 성배에게 막히고 있는 방구라의 전의가 꺾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귀여운 짓을 하는군.'

이번에도 샤를루아의 미드필더가 방구라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일대일 돌파를 시도해보라는 의미의 패스였는데, 방구라는 원터치로 다시 동료에게 볼을 돌려주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일대일 승부로는 뚫어내기가 쉽지 않으니 2-1 패스를 이용해 돌파해보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냉정한 판단이 아니라 성배와의 대결을 피하려고 선택한 플레이로 성배를 따돌릴 수 있을 리 없었고, 이미 예상하고 대비한 성배는 미리 패스 코스로 발을 뻗었고, 패스는 샤를루아의 선수가 아닌 성배의 발에 와서 붙었다.

‘좋아. 내 패스를 경계하고 있어.’

방구라의 패스를 끊어낸 성배는 바로 몸을 돌리며 오른발을 들어 전방으로 패스할 것이라는 신호를 주었다.

성배의 자세를 보고 놀란 샤를루아의 미드필더가 급히 달려들었고, 성배는 그대로 발을 내려놓고 방향을 전환하며 가볍게 상대 미드필더를 따돌렸다.

잊을 만하면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 자신들을 괴롭힌 성배의 발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샤를루아의 선수들이었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아마 다른 클럽들도 자신의 롱패스를 경계할 것이고, 오늘보다는 적극적으로 방해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스피드도 있으니까...’

전생과 달리 지금의 자신은 후방 빌드업 능력과 크로스 같은 킥을 제외하더라도 스피드를 살린 돌파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패스에 신경이 쏠리게 되면 돌파 기회가 조금 더 많이 생길 것이었다.

패싱 능력에 먼저 집중하게 하고 그다음에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력을 보여주어서 반 시즌 동안에는 최대한 좋은 활약을 보여주자.

성배의 의도는 지금까지 정확히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무조건 처음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번 꺾였을 때 다시 한 번 기회를 잡기가 힘들어져.’

사실 지금의 성배는 아직 공략당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피지컬의 약점은 당연하고 팀의 전술에도 아직은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약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성배의 철저한 준비와 전략 덕분이었다.

'이 정도 스피드면 어디 가서도 절대 안 밀려.'

최대한 약점은 노출하지 않고 장점도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큰 명제를 두고 그에 따라 조금씩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성배의 플레이는 상대가 들고 있는 자신의 전력 분석 데이터를 불쏘시개로 만들면서 계속 좋은 모습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만, 이미 1군 무대에 데뷔해 경험을 쌓기 시작한 이상 그때쯤 되면 자신의 발전 속도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안 밀린다니까.'

앞을 가로막는 상대 수비수를 가벼운 상체 페인팅으로 또 한 명 제치고 돌파를 이어나갔다.

첫 선발 출전 경기.

성배는 마치 자신의 앞길을 예고하는 것처럼 시원한 돌파를 선보였다.

< 낭만필드 - 03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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