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4화 (265/356)

< 낭만필드 - 034 >

“여기!! 여기!!”

윌리스 감독이 지시한 대로, 성배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데뷔전.

그리고 자신은 체력 소모가 없고, 상대는 체력이 떨어진 상황.

성배가 활약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위치 좋은데?’

안더레흐트도 체력이 많이 남아있는 성배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반더헤그에게 볼을 받은 성배는 전방을 훑었다.

터치라인을 밟고 음펜자가, 그보다 조금 안쪽에 제터베리가 자리를 잡고 상대 선수를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바로 리턴해!!’

제터베리에게 볼을 밀어준 뒤, 성배는 대각선 방향 아래로 전력 질주했다.

원래 제터베리를 마크하던 선수와 음펜자, 성배를 막던 선수가 순간적으로 세 방향에서 제터베리를 압박,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다만, 덕분에 성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나이스 리턴!!’

제터베리가 세 명의 선수에게 둘러싸이기 직전, 성배가 빈공간으로 파고들었다.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 볼이 넘어왔다.

‘너도 다시 돌려줘.’

두 번의 패스로 세 명을 바보로 만들자, 페널티박스 앞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위험지역이었고, 다른 선수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성배를 향해 두 명의 선수가 달려왔다. 예스트로비치에게로 향하는 패스 루트는 그렇게 열렸다.

‘빨리 다시 내놔!!’

예스트로비치에게 볼이 이어진 순간, 당연히 상대 수비수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성배는 그 틈에 상대 수비수들 사이로 파고들었고, 예스트로비치도 원터치로 볼을 찔러주었다.

‘이건 됐다!!’

골이다.

성배는 그렇게 확신했다.

잠시 예스트로비치에게 시선을 주느라 발이 멈췄던 상대 선수는 이미 오래 전 가속한 성배를 따라올 수 없었다.

한 발 먼저 볼에 도달한 성배는 잡지 않고 바로 왼발 슈팅을 시도했다.

“아악!!”

“아이고!!”

다음 순간, 여러 선수의 탄식이 터졌다.

대부분 안더레흐트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골 결정력.”

전생에서 성배를 수비수로 쫓아냈던 골 결정력이 또 한 번 괴롭혔다.

슈팅을 만드는 과정까지는 완벽하게 흘렀지만, 결국 마지막 마무리의 벽을 넘지 못했고, 골키퍼 정면에 슈팅을 때리고 말았다.

코너킥은 얻어냈지만, 만족하기는 힘든 마무리였다.

“괜찮아, 괜찮아. 운이 나빴어.”

“맞아, 운이 나빴던 거야. 플레이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고.”

베테랑 제터베리와 왼쪽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음펜자가 위로를 건넸다.

‘아, 데뷔전에서 10분 만에 공격 포인트 두 개 올렸으면 완전 대박 나는 건데...’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 꼭 잡아야만 하는 경기.

다만, 성배는 우승 경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의 성적에 자신의 지분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팀 성적보다 자신의 성적이 훨씬 더 중요했다.

***

[주성배의 맹활약, 또 하나의 유럽 진출 성공 사례 되나?]

채범진, 하대욱, 신윤기, 성규한, 박인진, 윤기표, 채인호.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들 가운데 유럽에 진출해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선수들의 명단이다.

신체적인 차이가 뚜렷하고 역사가 길지 않아 분명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한국인의 몸으로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에서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선수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명단에 한 명의 선수를 추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상은 지난 시즌까지 성규한이 활약했던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주성배로, 한 달여 전부터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은 주필러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너무 거창하게 소개한다 싶겠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필자가 주성배에 대한 이야기를 이리 거창하게 늘어놓는 이유, 그것은 바로 이 선수의 나이 때문이다.

이 선수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고작 19세!! 만으로 따지면 겨우 18세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축구 유망주들은 같은 나이에 고등학교에서 볼을 차고 있을 때, 주성배는 프로 무대에서, 1군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

주필러 리그는 유럽 리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은 리그였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영웅인 성규한이 네 시즌이나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성규한이 로얄 앤트워프와 안더레흐트에서 활약하는 사이에 한일 월드컵의 결정적인 득점을 성공시키며 인지도를 끌어올렸지만, 그뿐.

골을 넣었을 때나 스포츠 뉴스에서 자투리로 다루어지는 것에 그쳤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열여덟의 나이에 당당히 유럽 리그의 1군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성배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이 많아질 것이고, 그들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알아내 한국에 전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겠지만, 아직은 조금 일렀다.

성배의 활약상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도 힘들었고, 찾아보고 싶어도 성배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흥흥~ 흥~ 어머!! 성배가 신문에 나왔네? 스크랩해야겠다.”

그래도 유럽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에 대한 기사가 아예 없을 리는 없었다.

성배에 대한 내용이 처음으로 다루어진 기사는 일간지 스포츠 파트에 아주 조그맣게 다루어진 토막 기사였다.

인터넷에서는 지면에 제한이 없어서 조금 더 자세히 성배를 다룬 글들이 있었지만, 조회 수가 그리 높지 않아 그 글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짧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대단할 수는 없지!!”

일간지에서는 지면 제한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기사를 우선적으로 크게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성배의 기사는 구석으로 몰렸다.

하지만 혜진의 눈에는 그 어떤 기사보다도 크게 보였다. 어머니가 자식과 관련된 것을 찾지 못할 리 없었다.

“음... 이 파일이 좋을까? 저게 나으려나? 그래!! 이걸로 하자!!”

성배의 기사들을 어느 파일에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던 혜진은 곧 가장 큰 클리어 파일을 집어 들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스크랩 기사이고 그것도 코딱지만 한 공간에 다른 두 개의 기사와 함께 작성되었을 뿐인 별 볼 일 없는 기사였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음... 분명 앞으로 이만한 파일 열 개 정도는 꽉 채울 정도의 양이 될 거야. 괜히 파일 늘리지 말고 처음부터 큰 거로 가자.”

“엄마!? 뭐해?”

“아, 유빈아!! 이리 와봐!! 오빠가 신문에 나왔어!!”

유빈과 혜진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 성배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았다.

오빠가 신문에 나왔다는 말에 기대하며 달려든 유빈이는 고작 몇 줄밖에 안 되고 사진도 나오지 않은 기사에 실망했지만, 혜진은 그저 행복해하기만 했다.

“앞으로는 이 파일보다 훨씬 더 큰 특집 기사들이 많이 나올 거야. 스포츠 신문 1면에 사진이랑 같이 대문짝만하게 나올지도 몰라!!”

***

“변화가 필요해... 시몬!! 이리 좀 와봐!!”

신트-트라위던과의 경기에서 아쉬운 무승부를 기록한 안더레흐트는 이후 이어진 다섯 경기에서 2승 2무 1패의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KSK 베베런에게 5-2로 승리를 거둔 20라운드 경기까지만 해도 좋았지만 이후 이어진 AA 겐트와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다음 경기인 KV 오스텐트와의 경기에서는 0-1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리에르스와의 경기에서 다시 한 번 무승부를 거두고 최하위에 그치고 있는 RAEC 몽스에게도 2-1로 겨우 승리하는 등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좋지 않았다.

다섯 경기에서 고작 승점 8점을 따내는 동안 4점밖에 나지 않았던 클럽 브뤼헤와의 승점 차이는 무려 11점으로 벌어졌다.

같은 기간, 브뤼헤가 5연승을 거둔 것이었다.

아직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열한 경기가 더 남아있었지만, 11점의 승점 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예, 감독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우리 팀 상황이 좋지 않아. 어떻게 변화를 줘야 할 것 같아? 분명히 변화는 필요한 상황이라고.”

윌리스 감독은 팀을 운영하면서 코칭스태프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 편이었다.

자신이 따로 생각해놓은 방안이 존재할 때도 우선 코칭스태프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좋은 방책이 제시되면 그것을 자신의 생각에 더하는 것이었고, 이번에도 역시 우선 코치진의 의견을 하나하나 듣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우리 팀의 문제가 공격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경기에서 2승밖에 거두지 못한 것도 큰 문제이지만 그 과정에서 다섯 골을 넣은 베베런 전을 제외하면 네 경기 네 골에 불과합니다. 이 성적은 안더레흐트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록입니다.”

지난 네 경기에서 보여준 안더레흐트 공격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오른쪽 측면와 왼쪽 측면의 불균형이었다.

빌헬름슨과 반덴 보레의 오른쪽 공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측면보다는 중앙을 선호하는 음펜자와 탄탄한 수비력에 비해 공격력이 빈약한 데샤흐트의 왼쪽 공격은 계속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그렇지. 그 덕에 브뤼헤와의 승점 차이도 너무 많이 벌어졌어. 그래, 그래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

왼쪽에서 상대에게 위협을 주지 못한 결과, 상대 수비수들은 오른쪽 측면 공격을 막는 것에 집중했고, 전체적으로 안더레흐트의 측면 공격이 막혀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분명 변화가 필요했다.

“오른쪽 측면에 비해 빈약한 왼쪽 측면의 공격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음펜자는 좋은 선수이지만 측면보다는 중앙으로 움직일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왼쪽 측면을 흔들어줄 풀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데샤흐트는 분명 탄탄한 수비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2년 전에 A매치에 데뷔해 어느새 8경기에 출전했고, 186cm의 신장에서 나오는 제공권과 굉장히 뛰어난 대인마크 능력에 태클 실력,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투쟁심과 엄청난 활동량까지.

수비력만 놓고 보면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 말은... 주를 활용해보자는 뜻이군. 올리비에와 비교하면 주의 공격력이 훨씬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데샤흐트의 공격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시즌까지는 왼쪽 윙어로 나섰던 성규한이 이런 데샤흐트의 몫까지 다 해주었지만, 음펜자는 중앙으로 침투하며 왼쪽 측면을 거의 버리고 있었다.

반면, 성배의 공격은 충분한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분명 좋은 선수이고, 뛰어난 수비수입니다. 하지만 공격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선수이죠. 지금은 수비보다 공격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전생의 도움을 받는 성배였다.

전생에 윙어로 뛰었던 경험에 더해서 무릎이 쌩쌩하고 스피드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성배는 윙어로도 활약할 수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피지컬과 테크닉이 부족해 좋은 활약을 보여주기는 힘들겠지만, 풀백으로서는 차고도 넘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내 생각도 같아. 주는 분명 올리비에와 비교했을 때 수비력은 떨어지지만, 공격력에서는 훨씬 더 뛰어나지. 사실 주필러 리그에서는 윙어로 뛰어도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는 선수니까.”

윙어로서 보자면 피지컬과 테크닉의 부족, 드리블 스킬, 슈팅 정확도, 골 결정력 등 많은 부분이 부족하지만, 풀백에게 중요한 스피드나 돌파력, 크로스는 절대 빠지지 않는 성배였다.

데샤흐트를 빼고 성배를 투입하면 분명 공격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좋아!! 시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다음 경기에서는 올리비에를 빼고 주를 투입해야겠어. 샤를루아가 만만한 팀은 아니지만, 주라면 잘 해주겠지.”

지난 네 경기에 모두 교체로 출전한 성배는 안정적인 활약으로 윌리스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눈도장을 받았다.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는 선수로 인정을 받자마자 찾아온 또 한 번의 기회.

이 기회를 잘 살려내면 지금보다도 더 중용될 수 있을 것이었다.

< 낭만필드 - 034 > 끝

ⓒ 미에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