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3화 (264/356)

< 낭만필드 - 033 >

꽤 급한 상황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된 성배에게 격려를 보내주는 것도 콤파니의 역할이었다.

선수생활 18년 만에 1부 리그 무대를 밟게 되어 흥분했던 성배도 믿음직한 콤파니의 한 마디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역시 나중에 벨기에 황금세대와 스타군단 맨체스터 시티에서 주장으로 활약하는 선수의 말이라고 뭔가 다르긴 달랐다.

‘아무리 전생의 오랜 경험이 있어도 1부 리그 무대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처음이니까. 차근차근, 천천히 가자.’

프로 경력으로만 따지면 지금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성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필러 리그의 무대는 성배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2부 리그에서의 경험이 많다고 무시하기에는 주필러 리그도 만만하지 않았다.

‘분명 내 실력은 여기서 통해. 하지만 그렇다고 자만하면 순식간에 먹힌다. 명심해라, 주성배. 이 무대는 전생의 꿈이었을 뿐, 이번 생에서는 그저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성배는 오랜 꿈, 드디어 그것을 이루게 되어 잠시 흥분했지만, 순식간에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콤파니도, 베테랑 타이히넨도 그런 성배의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흠... 저 친구 꽤 하겠네.”

“그럴 것 같죠? 아, 아쉽네요. 벨기에 선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붉은 악마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타이히넨도, 콤파니도 성배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훈련장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분명 안더레흐트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기량을 실전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빡빡한 상황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음에도 바로 냉정을 되찾는 성배의 모습에 두 선수는 큰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최전방 공격수까지도 전부 하프라인 밑으로 내려가 있어. 공격 의지도 없고, 해봤자 역습이다.’

두 선수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정신을 차린 성배는 경기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서 자신이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할지 파악할 뿐이었다.

현재 상황은 안더레흐트가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먹고 지키는 신트-트라위던의 골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안정적으로 플레이하기보다 윌리스 감독의 지시대로 공격적인 오버래핑을 통해 팀의 공격에 힘을 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고, 성배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베스!! 이베스!!”

생각을 마친 성배는 바로 반더헤그를 불러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반더헤그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성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뒤 신트-트라위던의 진영을 다시 가리켰다.

오버래핑을 나갈 테니 백업을 봐달라는 뜻이었다.

반덴 보레도 성배와 함께 신트-트라위던의 진영으로 올라가면서 두 명의 수비 숫자가 줄어들자, 반더헤그가 중앙으로 내려오고 콤파니와 타이히넨이 살짝 측면으로 벌리는 쓰리백 형태로 수비진영이 변했다.

성배가 하프라인을 넘을 즈음, 오랜만에 중앙이 아닌 왼쪽 측면 돌파를 시도하던 음펜자의 드리블을 데브룩스가 걷어내 안더레흐트가 스로인을 얻어냈다.

왼쪽 측면에서 스로인을 얻어냈기 때문에 성배도 수비수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올라갔다.

바스쥬가 바로 제터베리에게 볼을 던져주었고, 제터베리는 수비수의 압박을 이겨내며 음펜자에게 볼을 넘겼다.

음펜자는 페널티박스 모서리에서 상대 미드필더 딜로쉬를 등진 채 볼을 지켜내 좋은 위치의 동료를 찾았다.

‘여기!! 빨리 여기로!!’

그 순간, 성배가 뛰어들었다.

살짝 뒤쪽으로 빠져서 수비수들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게 숨어있던 성배는 타이밍을 포착해 바로 뛰쳐나왔고, 아직까지는 아무도 성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펜자가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경로로 뛰어들어왔기 때문에 음펜자는 마치 조종을 당한 것처럼 성배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한 번 와봐!!’

패스를 받은 성배는 오른발로 볼을 잡아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중앙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체적으로 신트-트라위던의 수비진은 볼이 위치한 안더레흐트의 왼쪽, 자신들의 오른쪽 측면으로 치우쳐 있었고, 중앙은 상대적으로 헐거웠기 때문에 급하게 데브룩스가 성배의 중앙 돌파를 저지하려 몸을 날렸다.

‘그래야 데브룩스지. 어림도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중앙으로 내려갈 것처럼 행동한 이유는 데브룩스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성배의 움직임과 예상치 못한 중앙으로의 돌파는 데브룩스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성배의 노림수대로 섣부른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몸을 날린 데브룩스를 뒤로 하고 오른발을 이용해 왼발 뒤꿈치 쪽으로 볼을 굴린 성배는 한 번의 오른발 스텝으로 자세만 잡은 뒤 곧바로 날카로운 왼발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좋아, 제대로 감겼어. 예스트로비치도 잘 파고들었고, 충분히 승산은 있다.’

신트-트라위던의 수비수들은 그다지 제공권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바라또는 184cm, 클라우데 칼리사는 183cm로 센터백치고는 단신이었고, 두 선수 모두 피지컬은 괜찮은데 균형감각이나 몸싸움 스킬에 문제가 있어 자리싸움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안더레흐트의 최전방 스트라이커는 헤딩 머신이었다.

“으랏차차차!! 또 넣었다고!! 이걸로 열세 골!!”

“네나드!! 역시, 이번 시즌은 되는 시즌이었어!!”

안더레흐트의 헤딩 머신은 성배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반대편 골포스트를 향해 제대로 감겨 올라간 성배의 크로스에 빨려 들어간 예스트로비치는 뒤로 뛰던 도중에 점프한 칼리사보다 훨씬 높게 뛰어올랐고, 골대를 향해 볼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성배의 크로스를 따라 움직이느라 역동작에 걸린 벨리치 골키퍼는 이 볼을 막아내지 못했고, 다음 순간에는 당연히 골대 안에서 볼이 구르고 있었다.

‘하아... 18년 만에 기록한 1부 리그 첫 공격 포인트...’

예스트로비치의 헤딩이 골망을 흔드는 그 순간, 성배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몸이 붕 떠버리는 기분과 함께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어졌다.

그저 18년 만에 처음으로 기록한 1부 리그에서의 공격 포인트, 그것이 완성된 예스트로비치의 득점 장면만이 성배의 머릿속에서 연달아 재생되었다.

“자식!! 잘했어!! 데뷔전부터 아주 제대로 하는데?”

“역시, 제대로 된 유망주는 다르다는 건가? 아주 대단한 선수가 되겠어!!”

“이거, 이거... 뱅상이랑 안토니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스타가 나온 것 같지 않아?!”

그런 성배를 다시 현실로 돌려 보내준 것은 멍하니 서 있는 성배의 곁으로 다가와 등, 다리, 머리 할 것 없이 두드려주는 동료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진행하면서도 동점 골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던 흐름에서 성배의 멋지고 날카로운 크로스와 헤딩 머신의 통쾌한 헤더로 인해 그 답답함을 해소해주었으니 동료 선수들이 이렇게 기뻐할 만도 했다.

‘시작이 좋아. 일단 계획의 첫 단추는 순조롭네.’

스무 살이 되기 전 벨기에를 떠나 조금 더 수준 높은 리그로 진출하겠다, 는 것이 성배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필러 리그에서의 맹활약이 필수적이었다.

이제 열여덟 살이 되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2년밖에 남지 않았고, 2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어필해서 더 수준 높은 리그로 가려면 최소한 주필러 리그에서는 헤매는 시간 없이 시작부터 달려야만 했다.

“좋은 플레이였어. 앞으로가 기대되는데?”

“과찬의 말씀.”

일찌감치 골 세리머니에서 빠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성배의 귀에 콤파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데뷔전이고 고작 5분 정도를 뛴 것에 불과했지만 콤파니는 성배의 경기력에 만족한 것 같았다.

애초에 기량은 훈련에서 모두 파악했고, 실전에서 그 기량을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는데, 5분 동안 지켜본 성배의 모습이라면 실전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콤파니였다.

“네 덕에 내 몸값도 더 올라가겠어. 우리 팀의 실점률이 낮아질 테니...”

“그런 거라면 나도 마찬가지지. 그런 의미에서 한 2년만 이 팀에 남아주는 건 어때? 이미 엄청난 관심들을 받고 있겠지만.”

선수 개인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수비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소속팀의 실점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지표는 아니었고, 슬슬 해외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콤파니에게 유능한 수비수 동료의 합류는 무조건 좋은 일일 것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성배도 콤파니와 함께 조금 더 오래 뛰고 싶었지만, 다음 시즌까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콤파니를 잔류시키기 힘들 것이었다.

“나와 함께 뛰고 싶다면 붉은 악마의 유니폼을 선택하라고. 그러면 은퇴할 때까지 같이 뛰어줄 테니.”

“한국 대표팀의 별명도 붉은 악마다.”

콤파니는 아무래도 성배와 함께 국제무대에서 호흡을 맞추고 싶은 것 같았다.

개인 기량은 아직 조금 부족해도 훈련을 통해 확인한 성배의 영리한 플레이가 자신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1년만 더 지나면 성배가 귀화 조건을 충족시키고, 아직 한국 국가대표는커녕 청소년 대표로도 나선 적이 없는 성배였기 때문에 콤파니의 생각도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그렇게 벽을 세워두지는 말고 한 번 고민이라도 해봐.”

“뭐, 고민은 해보지. 분명 이득이 되는 부분도 있을 테니까.”

‘고민은 무슨... 그게 고민할 필요가 있는 일인가? 나를 모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귀화에 대한 성배의 생각은 확고했다.

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왔고, 20년 가까이 고민하고 결론을 내린 것인데 이제 와 누가 설득하려고 해봤자 통할 리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나에게 기회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국가대표가 아니야. 내 커리어를 훌륭하게 시작하는 거지.’

국가대표.

분명 어떤 선수들에게는 축구 인생의 목표가 될 만큼 명예로운 성과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성배는 명예보다 성공이 더 중요했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국가대표가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겠지만,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실력만 보장된다면... 국가대표가 아니라는 것은 흠이 안 돼. 오히려 A매치 기간에 체력을 보충할 수 있고, 부상 위험도 적어지니 더 좋아하겠지.’

아무래도 인기를 끌고 클럽들의 관심을 받으려면 국가대표를 노려보기는 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어느 정도 경기에 나서게 되면, 그래서 자리를 잡게 되면 일찌감치 국가대표를 은퇴할 생각이었다.

월드컵 무대 한 번.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 낭만필드 - 033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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