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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32화 (263/356)

< 낭만필드 - 032 >

‘이게 정말 내 계약서란 말이지...? 나랑 계약하는 게 확실한 거지?’

그날 밤, 성배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생에서 그토록 꿈꾸던 안더레흐트와의 계약.

벨기에 진출 중반에 잠시 꿈꾸다가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포기했던, 그저 어느 팀에서든 1부리그에서만이라도 뛸 수 있기를 바랐던 성배에게 안더레흐트의 계약서가 주어진 것이었다.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일 뿐인데, 겨우 열여덟의 어린 나이인데 전생에서는 서른여섯 살까지 해내지 못했던 것을 해내다니... 나의 전생이 쓸모없는 시간은 아니었구나.’

과거로 돌아오면서 얻은 것은 분명히 많았다.

완전히 망가졌던 무릎이 쌩쌩했고, 조금 더 일찍 벨기에로 건너와 어린 나이부터 유럽의 선진 축구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혜택은 전생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안더레흐트 관계자들이 성배와 프로계약을 맺자고 결심하게 만든 것은 성배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 덕분이었고, 성배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현재의 기량은 모두 전생에서 직접 쌓아온 것이었다.

즉, 쌩쌩한 몸 상태에 과거의 기량이 더해지니 벨기에 1부 리그, 그것도 그 중 최강의 팀인 안더레흐트가 탐낼 정도의 선수가 된 것이었다.

처절하고 비참하게 실패했다고 생각한 전생의 삶이었지만, 완전히 쓰레기였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몸 상태만 조금 더 따라주었어도 충분히 좋은 선수로 활약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쌓았던 것이었다.

전생에서 자신은 스물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풀백으로 전환해 정말 미친 듯이 훈련에 임했다.

자신은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미니... 보고 있어? 나, 이번에는 성공했어. 당신이 응원해주었던 꿈, 잠시나마 당신과 내가 함께 꾸었던 꿈, 그 꿈을 이룬 거야.’

‘벨기에 1부 리그에서 활약하고 싶다.'

그 꿈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주었던 자스민, 그녀와 함께 꾸었던 꿈이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꿈을 응원해주는 것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같은 꿈을 꾸어주었던 고마운 사람인 자스민도 이 꿈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의견 차이가 생기고 여러 문제가 겹쳐 갈라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성배의 꿈을 응원해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미니, 조금만 기다려. 내 마음이 정리되면, 한 번은 만나러 갈게.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꼭 한 번은 만나자.’

사실 성배는 아직 자스민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여전히 자스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전생과는 확연히 달라진 커리어를 쌓아나가며 점차 자신감이 쌓이고 있었지만, 한 번 실패했던 사랑에서도 전생과 다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스민이 지금 있는 곳을 대충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일단 성배는 자스민이 성인이 되는 2007년 중순에 그녀를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자스민에 대한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그저 그리움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엘리... 엘리도 보고 있지? 아빠, 이번엔 다를 거야. 엘리는 좋은 곳에서 쉬면서 아빠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봐 줘.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빠한테 너무 힘든 일이니까, 꼭 이번 생에서도 아빠의 딸로 태어나주렴. 아빠는 엘리가 다른 모습이어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자신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서 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자스민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아예 모든 것이 사라져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스민과 다시 결혼해 다시 딸을 낳아도 그것이 엘리자베스는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를 잊을 수는 없었다.

‘엘리... 조금만 기다려줘. 아빠가 이번에는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된 다음, 나중에 만나러 갈게.’

***

'이대로라면 나갈 수 있겠어.'

아직 데뷔전을 치르지 못한 성배는 벤치에 앉아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 이런 흐름이라면 이제 곧 교체로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출전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데샤흐트의 빈약한 공격력으로 인해 왼쪽 측면에서의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주, 교체다. 나갈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프로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안더레흐트 1군에 합류한 성배는 바로 다음 날부터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팀의 전술을 익히는 것이나 다른 선수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것에 우선해서 윌리스 감독은 지난 며칠간 성배의 현재 기량이 1군에서 확실히 통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안더레흐트 팀 동료들을 상대로 왼쪽 풀백 외에도 오른쪽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의 기량을 점검하며 주성배라는 선수의 활용도를 구상하는데 치중했고, 어느 정도 만족한 이후 데뷔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드디어 데뷔인가...'

드디어 데뷔전을 갖게 된 성배였다.

두 번째 데뷔전.

지난 생에서의 데뷔전은 어떻게 치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고, 마땅히 인상적인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데뷔전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준 선수는 그렇지 못한 선수에 비해 팬들에게 받는 관심과 기대의 수준이 달랐다.

오늘 단 한 경기로 팬들이 자신에게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자신의 출전을 기다리게 만들 것이었다.

“지금은 득점이 필요한 상황이야.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고, 올리비에보다는 주, 네가 적임자다. 수비에서 뚫리면 안 되겠지만, 오늘의 역할은 음펜자를 도와서 왼쪽 측면을 부숴버리는 거야. 할 수 있지?”

“맡겨만 주시죠.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우승을 위해 갈 길이 바쁜 안더레흐트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고작 리그 15위에 불과한 신트-트라위던을 상대로 후반전 종반까지 1-2로 밀리고 있었다.

우승 트로피를 두고 경쟁하는 클럽 브뤼헤가 현재까지 고작 1패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1패를 추가해서 4패째를 기록하게 되면 우승은 거의 물 건너간다고 봐야 했다.

윌리스 감독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패배를 막아야했다.

“음펜자는 원래 스트라이커라서 측면에서의 움직임보다는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측면 공격에서 너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을 거야.”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윙어인 빌헬름슨과 수비력이 조금은 부족해도 폭발적인 공격력을 갖추고 있는 반덴 보레가 담당하는 오른쪽 측면은 강한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본래 스트라이커인 음펜자와 수비력에 장점이 있을 뿐, 공격력은 빈약한 데샤흐트가 담당하는 왼쪽 측면의 파괴력은 조금 부족했다.

득점을 위해서는 왼쪽 측면에서도 신트-트라위던의 수비를 흔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너라면 잘하겠지. 데브룩스는 수비력이 좋은 편이지만 허를 찌르려고 노력해봐.”

“예. 그게 전문입니다..”

데브룩스는 수비 스킬만 따지면 수준급의 능력을 자랑했고, 인정받는 선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스물두 살에 저 정도면 재능은 충분히 있다는 뜻이지.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2부 리그로 떨어졌지만...’

82년생인 데브룩스는 성배에게도 익숙했다.

결국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2부 리그 행, 그 이후에 2부 리그에서 성배와도 자주 맞부딪혔기 때문이었다.

'데뷔전 상대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이미 약점을 다 알고 있는 상대인데...'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던 윙어 시절의 성배에게도 신나게 털렸을 정도로 지능적인 플레이를 하는 성배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네나드는 헤딩이 좋아. 피지컬도 좋고 높이도 좋고 무엇보다 공에 머리를 가져다 맞추는 능력은 주필러 리그에서도 최고지. 네 크로스가 분명 빛을 발할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한 번 제대로 활용해볼게요.”

네나드 예스트로비치.

심각한 유리몸이라는 것이 약점이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는 선수였다.

'헤딩이 뛰어난 타겟터. 나랑 잘 맞겠어.'

타겟형 스트라이커 예스트로비치는 성배와 궁합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예스트로비치가 중앙에서 버텨주면 위협적인 크로스를 자주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제터베리의 역할은..."

오늘 데뷔전을 치르는 성배가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어야 하는 상황이 불안했는지 윌리스 감독은 주심의 교체 사인을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성배에게 조언을 건넸다.

성배도 비록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무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윌리스 감독의 조언을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집중해서 새겨들었다.

그러는 동안 볼이 사이드라인을 벗어났고, 주심의 사인이 떨어졌다.

[IN - 33. 주성배 / OUT - 5. 올리비에 데샤흐트]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제대로 한 번 보여주자.’

“루키, 열심히 하라고. 사고 한 번 쳐줘.”

교체되어 벤치로 돌아온 데샤흐트는 성배의 등을 ‘툭’하고 가볍게 치면서 격려해주었다.

아직은 자신을 포지션 경쟁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능성이 보이는 루키를 대하는 태도라고 표현하면 적절한 표현이었다.

'벤치에서 잘 지켜보라고. 조금만 더 지나면... 그게 우리들의 자리일 테니까.'

데샤흐트는 분명 만만치 않은 선수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제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시간은 충분해. 제대로 보여주지.'

남은 시간은 추가 시간을 더해 대략 25분.

살짝 짧은 감은 있었지만, 자신의 진짜 가치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베스!! 중앙으로 올라가고 제터베리한테 2선으로 올라가라고 전해요!!”

“알았다!!”

성배는 윌리스 감독의 지시를 선수들에게 전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4-3-3 포메이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인 반더헤그를 중앙으로 올리고 중앙 미드필더로 뛰던 제터베리를 2선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리는 4-2-3-1로 전환한 것이었다.

신트-트라위던이 수비에 집중하며 지키는 축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더레흐트는 그것을 뚫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화를 주었다.

“열심히 뛰어라. 제대로 한 번 보여주라고. 자잘한 실수는 내가 다 커버해줄 테니까.”

“고마워, 뱅상.”

열아홉 살이 되려면 아직도 두 달이나 남은 콤파니는 이미 안더레흐트 수비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센터백 파트너인 타이히넨도 훌륭한 수비수였지만, 열여덟의 콤파니에게 역전당한 지 오래였고, 콤파니는 그 어린 나이에도 수비진의 리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32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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