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0화 (261/356)

< 낭만필드 - 030 >

“휴우,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클럽에게 연락을 받은 성배는 다음 날 바로 클럽 사무실을 찾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늘 안에 계약이 마무리될 것이었다.

이미 9개월 전에 벨기에 국가대표로 데뷔한 반덴 보레의 계약이라는 마지노선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직 뭔가 이뤄진 것은 아니죠. 드디어 스타팅블록을 밟게 되었을 뿐.”

이미 며칠 전에 U-19팀의 감독인 자비어 감독과 1군 감독인 윌리스 감독을 통해 프로계약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미리 에이전트와 스케줄을 맞춰놓고 있었다.

그리고 클럽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오늘, 성배는 에이전트인 버크만과 동행했다.

“뭐. 당신만 믿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에이전시로 유명한 AA의 슈퍼루키라고 들었는데요.”

“당연히 저만 믿고 계시면 됩니다. 하하하. 당신이나 저나 슈퍼루키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우리 둘이 같이 저 위를 노리는 거죠.”

성배와 함께 일하게 된 첫 번째 에이전트는 알랭 버크만.

프랑스와 벨기에에 기반을 두고, 양 국가의 선수들과 유망주들을 관리하는, 나름 벨기에 에이전시 중 TOP 3에 속하는 Avec Ascension이라는 에이전시 소속의 에이전트였다.

그 중 성배를 관리하게 된 버크만은 30대의 젊은 에이전트로 AA 에이전시에서 기대를 걸고 있는 신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유명 에이전트가 될 사람이었다.

‘후우, 그래. 잘한 거야. 확실히 계약 관련해서는 이 사람이 훨씬 믿음직하니까. ’

자신감에 차있는 버크만은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편안함은 느꼈지만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던 전생의 헤르만과는 달랐다.

함께 있을 때, 편안하다거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직 없었지만, 적어도 계약과 관련해서는 최상의 계약을 뽑아줄 것이라는 믿음은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버크만을 보면서 전생의 헤르만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배가 겪어본 에이전트는 헤르만과 말년에 함께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애송이 한 명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버크만과 헤르만은 가진바 능력과 성격이 정반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인물들이었고, 한쪽은 여기저기서 돈만 밝힌다며 욕을 먹지만 선수에게는 신뢰를 받아 슈퍼 에이전트로 성장할 사람, 한쪽은 클럽들과 선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만, 동네 아저씨로 늙어갈 사람이었다.

‘헤르만 아저씨야 굳이 내가 아니라도 알아서 잘 사시니까.’

헤르만은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헤르만과 굳이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서 그의 스타일을 바꿔볼 수도 있었겠지만, 서로 피곤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성배는 며칠 전, 헤르만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

“죄송해요, 아저씨. 아저씨와는 함께 일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음...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될까?”

아버지 장석의 소개로 헤르만을 만났을 때, 예상대로 에이전트 관련 이야기가 나왔다.

일과 관련된 만남을 갖다가 에이전트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헤르만을 만나게 된 장석이 아직 에이전트가 없는 성배에게 소개해 준 것이었다.

헤르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성배였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는 그의 스타일이 필요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번에 이야기를 듣고, 저도 나름대로 아저씨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클럽과 선수, 두 쪽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좋게 좋게 계약을 성사시키는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신의가 깊고 믿음이 가는 분이라고요.”

“하하, 아무리 돈이 얽히는 계약 관계라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애정을 기반으로 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돈만 오가면 너무 삭막하지 않니?”

“선수들에게 평판도 좋고, 구단 측과도 사이가 괜찮고. 좋은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부끄럽구나.”

혹시나 전생에서와는 다른 업무 스타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안고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헤르만은 헤르만이었다.

많은 선수들이 그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알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 헤르만의 인간성을 입을 모아 칭찬했다.

좋은 사람이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자신에게 필요한 에이전트가 헤르만이 아님을 확신했다.

“정말 인간적으로 아저씨가 존경스러워요. 하지만 저에게 필요한 에이전트는 아닌 것 같아요.”

“음...”

“저는 저를 대신해서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해줄 수 있는 에이전트가 필요해요. 가끔은 재계약을 요구하면서 깽판을 쳐줄 수 있는 에이전트, 언론에 슬쩍 정보를 흘리면서 클럽을 압박할 수 있는 에이전트, 몰래 다른 클럽들과 접촉할 수 있는 그런 에이전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아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죠.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그런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니까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헤르만을 에이전트로 삼은 뒤에, 그다음에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는 있었다.

마음에 내켜 하지는 않겠지만, 성배의 요구대로 해주기는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효율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미숙할 것이 분명했다.

헤르만과 함께하지 않기로 결정한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성배가 헤르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분명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 같구나.”

“죄송해요. 그래도... 아저씨에 대해 알아보면서, 아저씨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함께 일을 하지는 못해도... 좋은 관계로 남고 싶네요. 어차피 아버지 친구분이시잖아요?”

성배는 이번 생에서도 헤르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일에 관해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사람으로서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또 한 명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헤르만은 성배에게 꽤 큰 존재였다.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앞으로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거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보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언제든지 연락해.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들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에이전트 계약은 무산되었지만, 헤르만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갈 수 있음에 성배는 환호했다.

혹시나 헤르만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둘 사이의 인연도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전처럼 돈독한 사이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친분은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르만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성배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직업적인 부분에서 정이 개입할 여지를 봉쇄해버린 뒤, 과거의 좋았던 인연들에게는 전생보다도 더 무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단호한 대처를 보인 것이었다.

이는 향후 가족들이나 전생의 친구들, 그리고 자스민을 대하는 성배의 행동에 변화가 생길 것임을 암시했다.

그렇게 헤르만과의 사이를 정리한 성배는 자신에게 날아온 몇 건의 제의를 검토하다가 10년에서 15년 안에 슈퍼 에이전트로 성장하는 알랭 버크만의 이름을 발견했다.

지금은 Avec Ascension이라는 프랑스계 에이전시에 속해있었지만, 그가 분명했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버크만과 계약을 진행했다.

***

[계약 조건]

급료      : 주급 2,400유로 (약 325만 원)

계약 기간 : 이적이 성사된 날 - 2008년 6월 30일

계약금    : 7만 유로 (약 9,450만 원)

부가 옵션

출전 수당 : 1,100유로 (약 150만 원)

이적 허용 조항 : 500만 유로 (약 68억)

연간 20% 급료 인상 보장

“잘 부탁합니다, 주성배 선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계약 조건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2,500유로를 받고 있는 반덴 보레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고, 계약 기간도 3년 반으로 유망주에게 제시하는 조건치고는 길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연간 20%의 급료 인상 조건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이 조건대로라면 계약 마지막 시즌에는 주급이 5,000유로까지 오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이적이 늦어져서 2년 반 정도 뒤에 재계약을 하더라도 최소한 5,000유로 이상의 주급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계약금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출전 수당도 챙기게 되면서 상당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번 계약에 따른 성배의 수입을 연봉으로 따지면 대략 1억7천만 원 정도.

첫 계약부터 억대 연봉을 돌파하며 전생에서 받았던 최고 연봉의 두 배가량을 첫 계약으로 받게 되었다.

‘허, 허허... 전생에서는 8,000만 원이 최고로 많이 받은 연봉이었는데... 열여덟에 1억7천이라니... 역시 실력에 따라 차별이 심한 세계구나.’

2,400유로의 주급은 팀 내에서 열여덟 번째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15,000유로의 주급을 받고 있는 뱅상 콤파니가 가장 많은 주급을 받고 있었고, 그 외에도 무려 열여섯 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성배보다 많은 주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생에 2부 리그 소속 로얄 앤트워프에서 최고 연봉자 중 한 명이 되었을 때보다 연봉이 두 배가 뛴 것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2부 리그로 안 간다. 이번에는 은퇴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1부 리그에서, 어떻게든 버티자.’

한 번 1부 리그의 힘과 매력, 재력을 알게 된 이상 2부 리그에서는 절대로 생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고작 2,400유로의 주급으로 계약을 체결하면서 깜짝 놀라고 있지만, 앞으로는 이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주급을 받고 싶었다.

아니, 받을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개리 네빌, 호베르투 까를로스, 크리스티안 키부, 파올로 말디니, 카푸 등 정상급 풀백들은 최소 35,000유로, 평균 45,000유로 정도의 주급을 받고 있었다.

성배와 비교하면 20배에 가까운 주급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후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본이 흘러들어올 것이었기 때문에 2,400유로에 놀랄 정도의 소인배스러운 마인드로는 심장마비에나 걸리기 딱 좋았다.

“아쉽네요.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반덴 보레 정도의 계약은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지금 당장은 빠르게 프로계약을 맺고 1군 무대에 데뷔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성배의 계약 조건은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는 반덴 보레에 비해 조금 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버크만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는 반덴 보레는 스타성과 관련 상품 판매, 클럽 광고효과 등에서 성배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고, 클럽 측에서도 벨기에 국가대표인 반덴 보레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성배는 아시아 선수이기는 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을 가진 중국 국적도 아니었고, 가장 경제력이 뛰어난 일본 국적도 아니었다.

인구도 적고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쌓은 인지도가 거의 다 사라진, 세계 축구의 변방이나 마찬가지인 대한민국 국적의 선수였다.

계약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낭만필드 - 030 > 끝

ⓒ 미에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