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8화 (259/356)

< 낭만필드 - 028 >

“다녀왔습니다, 라고 했지만 안 계시네.”

성배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열한 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밤이 다 되어서야 브뤼셀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도 집은 비어있었다.

“어머니 안 계신다고 너무 신나셨어. 주말만 되면 도대체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시니...”

성배의 아버지인 주장석은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안하고 화도 잘 안내는데다가 유쾌한 성격의 장석이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장석과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쉬는 날에는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언제 한 번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보고해야겠다.’

도대체 휴일에 아버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평일에는 서로 바빠서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 없었는데, 휴일까지 이런 상황이라 진득하게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에 고작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

어머니께 보고하면 한두 달 정도는 얌전히 계시겠지, 하는 것이 성배의 생각이었다.

“응? 웬 전화가...”

아버지는 어차피 알아서 들어오실 테니 먼저 숙면에 들어가기 위해 씻으려 준비하던 성배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실 벨기에에서 성배의 휴대폰은 그냥 시계일 뿐이었다.

아버지와의 통화를 제외하면 거의 통화할 일이 없었고,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훈련장으로 가는 통에 따로 전화할 만큼 친한 친구도 없었다.

팀 동료들 중에서도 마땅히 친분이 깊은 선수는 없었고 어차피 훈련장에서 몇 시간 씩 만나기 때문에 전화를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가 조금 반갑기까지 했다.

“여보세요?”

[어, 그래. 성배야. 아빠야.]

“역시...”

역시 아버지였다.

사실 밤 열한 시가 넘은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이 늦은 시간의 전화는 민폐일 수밖에 없는데 친한 사람이 아예 없는 성배에게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고, 성배도 사실은 그럴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고작 전화 때문에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네, 아버지. 어디세요?”

[아, 델리리움 카페!! 일하다가 알게 된 분이랑 한 잔 하고 있어.]

기네스북에 등록된 델리리움 카페는 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였다.

오늘 같은 토요일 밤에는 도저히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여 서 있어야 할 텐데, 나이도 적지 않으신 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예, 그러면 저 먼저 잡니다. 천천히 놀다 들어오세요.”

[응? 안 돼!! 너도 나와라, 성배야.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네? 지금이요?”

[그래!! 나나 이 분이나 너나 다 바쁜 사람이잖아? 언제 또 시간 맞춰서 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성배는 살짝 난감했다.

전생에서 선수생활 내내 피지컬에 발목을 잡혔던 기억 때문에 돌아온 성배는 피지컬에 상당히 집착하는 편이었다.

모든 피지컬의 기본은 신장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성배는 최소한 열한 시 이전에 항상 잠을 청했다.

그 결과 만 17세에 전생에서의 키를 거의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으음... 지금은 좀 그런데...”

[괜찮아, 괜찮아. 하루 정도는 괜찮아. 무엇보다 꼭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어차피 시간도 늦었으니까 너도 잠깐 나와서 맥주 한 잔 하고 가.]

“아이고... 어머니한테 들키면 어쩌시려고.”

[뭘 어째!! 배 째라고 해야지. 이 나라 법이 그렇다는데...]

벨기에에서는 도수가 낮은 술의 음주 허용 연령을 만 16세로 정해놓고 있었다.

맥주나 와인과 같이 도수가 낮은 술은 만 16세가 넘으면 마실 수 있었고, 위스키, 진, 브랜디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만 18세가 넘어야 마실 수 있었다.

지금 장석이 있는 델리리움 카페는 맥주를 파는 펍이었기 때문에 성배도 문제없이 합석할 수 있었다.

“에휴...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금방 나갈게요.”

[그래, 빨리 나와라. 뭐 마실래? 미리 한 잔 시켜놓고 있을게.]

토요일 밤, 한창 놀기 좋은 이 시간의 델리리움 카페는 발을 디딜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집에서 카페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감안했을 때, 미리 한 잔을 시켜 놓아야 도착할 때 쯤 나올 것이었다.

“델리리움 카페니까 첫 잔은 델리리움 레드로 해주세요.”

[알았다. 빨리 와.]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어차피 나가기로 한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성배는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도수가 센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맥주, 와인, 칵테일 등 도수가 세지 않은 술은 좋아했다.

특히 벨기에에서 오래 산 사람답게 시원한 맥주를 좋아했는데, 그리 자주 마시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술은 상당한 고칼로리 식품인데,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축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멀리했던 성배는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배는 오늘처럼 어쩔 수 없이 맥주를 마셔야 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

“후우... 후우...”

잠시 뒤, 성배는 아버지가 손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델리리움 카페의 입구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처음에 아버지가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곳까지 오면서 생각을 거듭한 결과, 성배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헤르만, 헤르만이다. 분명 이 안에 헤르만 아저씨가 있다...’

성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벨기에의 해외공관에서 근무할 때 만난 에이전트, 헤르만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벨기에에서 근무한지도 어느새 1년 반이 지났고, 근무 기간의 절반이 지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라고는 헤르만 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와 헤르만은 어쩌다보니 알게 된 사이였다.

아버지가 업무 차 만난 사람과 헤르만이 아는 사이였고, 몇 번 자리를 가지다가 친해진 것이었다.

벨기에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생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은 아마 헤르만이 맞을 것이었다.

‘에이전트 계약 때문에 소개시켜준다고 하신 건가?’

성배는 아직 에이전트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U-17팀과 U-19팀을 오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딱히 에이전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7세에 U-19팀을 오간다는 것은 팀에서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프로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슬슬 에이전트를 구할 필요는 있었다.

‘어떡하지? 헤르만은 지금의 내가 원하는 바와는 상당히 다른 타입의 에이전트인데... 클럽과의 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노력할 그런 에이전트가 필요한데...’

헤르만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혈혈단신으로 벨기에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성배가 프로 선수로 데뷔한 것과 16년이나 그 자리에서 버틴 것은 모두 헤르만의 공이었다.

마지막에 살짝 어긋나버린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성배가 어디 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프로 축구 선수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 헤르만이라는 것, 성배의 전생에서 가장 큰 은인이 헤르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헤르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 자신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헤르만의 업무 스타일은 성배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에 위치해있었다.

이번 생에서 성배는 선수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클럽과 척을 지는 것을 꺼리지 않는 그런 에이전트를 원했다.

다소 치사한 방법을 쓰더라도 성배가 이적을 원할 때 이적을 시켜줄 수 있는 그런 에이전트, 재계약을 원할 때 재계약을 따줄 수 있는 그런 에이전트.

그런 사람이 성배가 원하는 에이전트였다.

‘하지만... 헤르만 아저씨가 그런 걸 하실 수 있을 리 없지.’

장담컨대, 헤르만은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헤르만이라면 오히려 성배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리, 서로간의 신뢰와 같은 것들을 언급하며 설득하려고 할 것이었다.

물론, 직업이 에이전트인 이상 성배가 끝까지 고집하면 원하는 대로 다른 팀을 찾아보고 하겠지만 그런 쪽으로는 사실 노하우가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성과가 나올 리 없었다.

언론 플레이 쪽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헤르만이나 성배나 직업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성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별 볼 일 없는 2부 리거였고, 헤르만도 몇몇 미미한 1부 리거 외에는 2부 리거들을 관리하는 에이전트였다.

두 사람 모두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 직업적 능력에서는 그렇게 큰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까지 똑같았다.

성배의 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헤르만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집에 가버릴 수도 없으니...’

아버지에게 나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헤르만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은 핑계이고 헤르만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 외롭게 생활하던 성배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벨기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헤르만.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만나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그리웠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헤르만이 있다는 것에 벌써부터 목이 메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 하아... 헤르만과 아버지가 에이전트 계약을 하자고 하면 내가 거절할 수 있을까...?’

전생처럼 바보같이 살지 않겠다고,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전생에서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가족들과 유빈이를 대하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전생보다도 더 마음을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헤프게 퍼주었던 마음을 아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나누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과연 헤르만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성배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 낭만필드 - 02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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