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7화 (258/356)

< 낭만필드 - 027 >

‘후우... 이제 이곳도 마지막이구나. 앞으로 이곳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테니까...’

관중석을 빠져나온 성배는 보사윌슈타디온의 출입구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눈에 담았다.

성배에게 보사윌슈타디온은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8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런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나중에는 이 경기장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것을 꿈꿨다.

이 경기장에서 1부 리그 일정을 소화하는 꿈은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전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 이 장소를 대하는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로얄 앤트워프와 경기를 가질 때 외에는 이 경기장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로얄 앤트워프가 2부 리그로 떨어진 데다가 벨기에는 리그컵을 폐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어라!?’

보사윌슈타디온의 출입구 벽을 천천히 쓰다듬던 성배는 손을 떼고 경기장을 나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성배의 눈에 어느 한 여성이 들어왔다.

사실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웠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니...”

자스민이 분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으니 그때로부터 4년 전의 자스민이었다.

열여섯의 자스민은 분명 그 때보다도 훨씬 더 앳되고 어린 모습이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10년을 만났고 사랑했던 그녀가 네 살이 어려졌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너무 놀라서 미동도 없이 굳어있던 성배는 곧 자스민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런 것을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자스민을 가까이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스민의 시간을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자스민!! 어디야,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자스민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을 본 것이고, 성배가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거리는 더 벌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보사윌슈타디온과 그 주변이 코너가 많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자스민을 찾는 성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한 성배를 방해하는 것이 또 있었다.

경기가 끝나서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팬들이 굉장히 많았고, 그들로 인해 넓지 않은 길들이 대부분 막혀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급한 경우에는 그들을 밀어 공간을 만들면서까지 간절하게 자스민의 모습을 찾은 성배였지만 아무리 달려도 자스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성배는 자스민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미 멀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처음 자스민을 발견하고 달리기 시작해서 짧지 않은 시간을 달렸는데, 그 사이 갈림길이 나온 횟수만 한 손의 손가락 개수를 넘어갔다.

한 번도 빠짐없이 같은 방향을 선택했다면 속도를 감안했을 때, 이미 따라잡았어야 했다.

‘분명, 분명히 미니였어. 멀리서 스치듯 발견했고 거리도 멀었지만, 분명히 미니야. 내가 미니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어...’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쉽지 않은, 먼 거리였지만 성배는 자신이 제대로 보았다는 것을, 그녀가 자스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스민의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었다.

‘울고 있었지. 미니...’

순식간에 지나간 얼굴이었지만, 그 사이 성배는 자스민의 얼굴과 표정까지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간 자스민의 얼굴은 눈과 코가 붉어져 있었고, 볼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긴... 자스민은 로얄 앤트워프의 열렬한 팬이었으니까.’

자스민은 안트베르펀에서 태어나 안트베르펀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로얄 앤트워프를 응원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종종 앤트워프를 응원하기 위해 보사윌슈타디온을 찾았고, 그녀가 개설한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채널이 인기를 얻은 뒤에는 최소한 1년에 한 번 로얄 앤트워프를 취재하러 찾아오기도 했었다.

성배와 만나게 된 것도 그때였다.

16세의 그녀는 그렇게 좋아하는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부 리그로 떨어진 로얄 앤트워프를 매년 최소 한 번씩 취재했을 정도로 열렬한 팬인 자스민이었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생에는 내가 로얄 앤트워프와 관계를 지우기로 결정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거지?’

Secondary School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독립해 프랑스로 떠난 자스민이 18세부터 어디에 살았는지는 성배도 알고 있었다.

굉장히 자세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정도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사라졌다는 것, 전생에서 그녀와의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꽤 서글픈 일이었다.

무엇보다 성배는 자스민을 다시 만나는 것이 기대되는 만큼 꽤 두려웠다.

전생에서 자스민과 성배의 마지막은 좋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큰 상처를 안고 헤어진 것이었다.

그런 헤어짐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아무 탈 없이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자스민에게 첫인상부터 마지막 인상까지 좋은 모습으로만 남고 싶었다.

그렇기에 자스민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

자스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주변 상황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진 채로 걷던 성배였지만 강제로 그 생각에서 깨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한 식당에서 자스민과 그 가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6세의 어린 소녀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에서 너무나도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 미니...”

성배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식당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절대 자스민에게서 떼지 않았다.

자스민의 환한 미소, 몇 년 동안 매일 밤마다 그리워했던 그 미소가 성배를 홀린 것이었다.

성배는 천천히 식당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자스민을 만날 수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몇 년을, 천 일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을 그리워한 자스민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미래를 위해 처절하게 단련한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감정을 조절하고 긴장감을 덜어내는 데 있어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성배의 호흡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

그리고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던 자스민과 성배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성배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었고, 자스민도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자스민과 성배의 눈이 마주친 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지만, 성배에게는 굉장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짧은 몇 초 동안 마치 주마등처럼 자스민과의 시간이 성배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처음 만난 순간, 그리고 행복했던 연애 시절, 동거와 엘리자베스의 탄생까지.

두 사람 사이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해준 주마등은 이제 행복한 시간을 지나 불행했던 시간들을 재생하고 있었다.

계약 과정에서의 갈등과 엘리자베스의 사고, 자스민과의 이별을 다시 떠올린 성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우리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 행복했던 시간들만 생각난다고? 당신... 매일 내 얼굴을 보면서, 엘라...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 있어?]

[나는... 못해. 주. 주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사랑한 사람이고, 내 20대를 빛나게 해준 사람이야. 하지만... 이제 우린 너무 늦었어. 우린... 큰 슬픔 앞에서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없었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주도, 나도... 각자의 아픔을 견디기도 버거워서... 서로를 만져주지 못했어. 다시 만난다고... 달라질까?]

자스민의 걱정스러운 표정.

그 표정은 다시 한 번 전생의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분명히 달랐고, 지금의 그녀에게 이전 생의 기억은 당연히 없을 것이지만 성배는 그 표정을 보고 두 사람의 슬픈 마지막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 발, 한 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식당 입구에서 물러난 성배는 마지막으로 자스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서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성배에게 향하는 자스민의 시선은 걱정과 염려가 담겨있었다.

그 표정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자스민의 얼굴을 발견한 성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더... 조금 더 고민을 해보자. 이번 생에서 자스민도, 나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자스민과 마주할 시간이 아니었다.

전생에서의 이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충동적으로 다시 자스민을 마주하게 된다면 결국 또 같은 이유로 큰 상처를 줄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고민이 필요해. 자스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자스민은 꼭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자스민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삶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흔쾌히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었다.

그것이 전생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성배의 방법이었다.

‘다음에... 내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나서 우리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내린 결론이 우리 둘의 행복한 미래이기를 빌어줘.’

식당에서 볼 수 없는 곳까지 걸음을 옮긴 성배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빌었다.

아직 그 미래에 남겨져 있을 서른네 살의 자스민에게 건네는 마음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신에게 건네는 마음일 수도 있었다.

그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배가 진심으로 자스민과 자신이 모두 행복한 미래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 낭만필드 - 02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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