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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26화 (257/356)

< 낭만필드 - 026 (1권) >

‘이곳도 많이 발전했구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성배가 안더레흐트에 입단한 지도 어느새 1년하고도 반이 넘었고 2002/03시즌을 지나 2003/04시즌도 마지막 경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성배는 안더레흐트가 아닌 다른 팀의 최종전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브뤼셀이 아닌 다른 도시에 와있었다.

‘전생에 처음 왔을 때보다도 전이니까... 확실히 기억 속의 모습이랑은 조금 다르네.’

성배가 현재 와있는 곳은 바로 전생의 16년 기억이 모두 남아있는 곳, 안트베르펀이었다.

브뤼셀에서 고작 4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아직 차가 없는 성배도 버스를 타고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이어 가장 큰 항구가 있는 곳이고, 항만 산업이 발전해 중세 영국의 양모 수출 루트였던 곳.

석유화학을 발전시켜 석유화학 클러스터 부분에서 세계 2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

다이아몬드 관련 산업이 발달했고, 패션 산업에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덕에 중세부터 부유한 도시로 이름을 날려 그 유명한 안트베르펀 대성당을 비롯한 볼거리와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거장을 배출한 도시, 안트베르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성배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성배에게 안트베르펀의 의미는 ‘청춘’이자 ‘모든 것’이었었다.

안트베르펀의 영어 발음은 앤트워프, 이 곳은 바로 로얄 앤트워프의 연고지였고, 지금 성배는 2003/04시즌 로얄 앤트워프의 주필러 리그 최종전이 펼쳐지게 될 보사윌슈타디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청춘을 모두 다 바쳤던 바로 그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1부 리그에서의 마지막 모습, 이번에는 내 두 눈에 담아준다.’

지금, 성배는 소속팀 안더레흐트의 리그 최종전이 아닌 로얄 앤트워프의 리그 최종전을 관람하러 가고 있는 것이었다.

안더레흐트는 이미 일찌감치 리그 우승을 확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모든 미움, 미련, 증오... 등을 모두 잊어버리겠어. 전생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들은 전부 오늘로 털어주지.’

성배는 오늘 전생의 모든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을 잊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잊기 위한 계기는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이 결정될, 바로 오늘 경기였다.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로얄 앤트워프의 홈구장인 보사윌슈타디온에서는 20년 동안 주필러 리그 경기가 펼쳐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성배는 그것이 로얄 앤트워프와 자신의 거리를 크게 벌려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전력의 차이가... 확실히 있네. 팀 자체의 분위기가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보사윌슈타디온에서 펼쳐지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와 KSK 베베런의 경기는 KSK 베베런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10승 5무 18패로 리그 13위에 올라있는 베베런도 그렇게 강한 팀은 아니었지만, 7승 6무 20패로 리그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의 경기력이 훨씬 더 아래였다.

‘피발레비치, 무사... 무기력해. 예전에는 넘어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현재의 성배는 이미 전생에서의 전성기와 비슷한 수준까지 기량을 끌어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생에서의 전성기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은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생과 비교하면 함께 훈련하고 플레이하는 동료들의 수준 자체가 달랐다.

아직 U-17 팀에 속해있었지만, U-19 팀에서 훈련하는 경우도 많았고, 1군 선수들과의 훈련 시간도 적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성규한과 데샤크트, 해리슨, 콤파디 등 벨기에 리그 최고의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한 성배였고, 그런 성배에게 로얄 앤트워프 선수들의 플레이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전생에서 성배의 앞을 가로막고 스트라이커에서 윙어로 밀려나게 만들었던, 벽이라고 느꼈던 전생의 동료들이 이번 생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내려가 틀어막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바슬리가 이때는 여기서 뛰었구나. 확실히... 재능이 보이기는 하네.’

로얄 앤트워프에서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오른쪽 풀백으로 뛰고 있는 필 바슬리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출신으로 이번 시즌 프로계약을 맺고 임대 생활을 시작한 필  바슬리는 이후 선덜랜드로 이적하는 2008년까지 네 시즌 동안 임대를 전전하게 될 선수였다.

선덜랜드나 스토크시티와 같은 프리미어리그 하위권 클럽에서 주로 활약한 선수로,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대표로 가끔 뽑히고 어쨌든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한 선수였기 때문에 성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리어를 쌓았었다.

‘바슬리가 저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성배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바슬리의 플레이는 성배의 눈에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포지션이다 보니 풀백들의 활약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는데, 바슬리의 플레이는 성배에게 전혀 놀라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슬리가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은 4년 뒤이고, 지금의 바슬리는 아직 기량이 올라오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전생의 기량들을 거의 다 찾는다고 해도 빅 리그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겠지만, 전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수준 높은 리그에서의 플레이를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나이였다.

바슬리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것은 전혀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저 사람은 확실히... 여기 있을 선수는 아니야.’

KSK 베베런의 네 번째 득점과 로얄 앤트워프 팬들의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번 득점을 올린 선수는 이번 경기 내내 압도적인 플레이로 로얄 앤트워프를 유린하고 있었던 중앙 미드필더, 야야 투레였다.

성배가 경기를 지켜보면서 그 대단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플레이를 펼치더니 기어이 골까지 넣은 것이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선수였다.

코트디부아르의 ASEC 미모사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야야 투레는 성배의 전생에서 18살에 데뷔한 이후 KSK 베베런, 메탈루흐 도네츠크, 올림피아코스, AS 모나코를 거치며 차근차근 조금 더 큰 리그를 경험했는데, 그 간격이 겨우 한 시즌에 불과했다.

한 시즌 만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더 강한 리그, 더 강한 클럽으로 이적했을 정도로 리그 수준을 훌쩍 넘는 플레이를 보여준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시티를 거치며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야야 투레는 확실히 가진 바 재능 자체가 격이 달랐다.

두 팀 모두 벨기에 리그에서도 약팀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부 리그 선수들인데 야야 투레가 내뿜고 있는 포스에 근접하는 선수조차 없었다.

아직은 아스날의 무패 우승 도전의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인 콜로 투레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보다 훨씬 더 큰 주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후 야야 투레는 다섯 번째 골까지 집어넣으며 로얄 앤트워프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2-5. 보사윌슈타디온의 전광판에 기록된 스코어였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경기장의 분위기는 침통해졌고, 몇몇 팬들이 분노해 울부짖는 외침을 제외하면 16,000여 명의 관중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흑, 흐윽... 흑흑...”

“제길... 제기랄... 빌어먹을...”

성배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 팬들 몇몇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배의 주변만이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팬들 중 상당수가 이미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꼭 이겨야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라도 치를 수 있었지만, 이미 승리는 물 건너간 상황이었고, 최하위로 강등이 확정되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팬들이 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네 개의 벨기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는 안더레흐트, 브뤼헤, 생 지루아즈, 리에쥬, 비어쇼트, 브뤼셀 FC에 이어 우승 횟수 공동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문 클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을 막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지금 확실한 것은 로얄 앤트워프가 이번 시즌 주필러 리그의 최하위에 그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 그래서 강등당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는 것뿐이었다.

-삑!! 삐--익!!

[.........]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심이 분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마치 보사윌슈타디온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치는 듯했다.

16,000여 명이 넘게 모인 이곳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KSK 베베런의 원정 팬 2,000여 명과 30여 명의 KSK 베베런 관계자들 뿐이었다.

나머지 15,000여 명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끝이다. 로얄 앤트워프... 당신들의 마지막을 보러 와주었으니, 내 마지막 의리도 여기까지야. 앞으로... 당신들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거야.’

경기가 끝나자마자 성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얄 앤트워프에게는 애증에서도 증오의 감정이 더 크지만, 팬들에게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이 결정됨으로 인해 슬퍼하고 오열하는 팬들의 모습에서 20년 뒤, 승격이 결정된 날에 기뻐하며 날뛰었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 자리를 더 지키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것도 나 혼자 느끼는 감정이지. 어차피 지금 이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귀한 몸의 유망주일 뿐...’

안더레흐트나 스탕다르 리에쥬, 클럽 브뤼헤와 같은 클럽의 유망주들은 이런 중소클럽의 팬들에게는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는, 그림 위의 떡과 같은 존재였다.

아마 로얄 앤트워프의 팬들이 자신을 보는 눈도 지금은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오늘로...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내 감정은 모두 털어버리자. 저쪽에서는 아무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나 혼자 가지고 있는 이 쓸모없는 기억들. 다 치우고 진짜로 새롭게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성배는 보사윌슈타디온의 그라운드와 그곳을 가득 메운 로얄 앤트워프 팬들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다가 곧 관중석을 빠져나왔다.

한 번 뒤돌아 걷기 시작한 뒤로는 단 한 번도 뒤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로얄 앤트워프와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16년을 함께 한 애정도, 그것을 한 번에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게 만들었던 증오도, 이제는 없는 일이 되어야만 했다.

< 낭만필드 - 026 (1권)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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