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5화 (256/356)

< 낭만필드 - 025 >

RSC 안더레흐트.

벨기에의 안더레흐트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축구 클럽.

안더레흐트라는 도시는 브뤼셀 수도권에 포함되는 지역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브뤼셀 수도권에 있는 브뤼셀 시가 벨기에의 수도였지만, 실질적으로 따지면 브뤼셀 수도권 전체가 사실상 단일 도시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안더레흐트는 벨기에의 수도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나 마찬가지였다.

1909년에 창단된 RSC 안더레흐트는 벨기에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자 이미지와는 다르게 창단 당시 벨기에 내에서 가장 낮은 리그에 참가했다.

일반적으로 최강 팀들이 리그 창설 직후부터 강자로 군림했던 것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1895년에 시작된 벨기에 프로리그에서 안더레흐트가 첫 우승을 경험한 시기는 무려 1946/47시즌.

리그 창설 이후 50년이 훌쩍 지난 이후였고, 초기 안더레흐트의 행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안더레흐트의 행보는 놀라웠다.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57년이 지난 현재 안더레흐트의 우승 횟수는 리그에서만 26회.

우승 횟수로 2위, 3위에 해당하는 클럽 브뤼헤와 스탕다르 리에주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횟수였다.

그야말로 벨기에 리그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는 클럽이었고, 그 클럽이 바로 지금 성배가 뛰고 있는 클럽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유소년 입단테스트에서 성배는 가볍게 합격해 안더레흐트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기본기, 피지컬, 스피드 등 다방면에 걸친 테스트에서 피지컬을 제외하고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은 성배는 마지막 연습경기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좋은 조건의 유소년 계약을 맺었다.

테스트 당시 자신을 보던 코치들의 눈빛을 감안하면 프로 계약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거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유니폼을 입다니... 하하, 전생의 꿈은 거의 이룬 거나 다름없나...’

보라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교대로 그려져 있는 안더레흐트의 유니폼은 전생에서 성배가 그토록 선망하던 그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유니폼을 입는 것마저도 너무 높은 꿈이라 생각해 포기하고 그저 1부 리그의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는 것을 꿈으로 삼았었는데, 시작부터 이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좋아. 아직 유스 통합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더레흐트 유스 정도면 유럽 전체에서도 그리 밀리지 않는 수준이지. 여기서 한 번 미친 듯이 해보자.’

뱅상 콤파니, 로멜루 루카쿠, 안토니 반덴 보레 등 벨기에 황금세대의 주축 선수들을 다수 배출한 안더레흐트가 본격적으로 유망주들의 천국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유스 통합 정책 시행 이후였다.

벨기에에서 가장 좋은 유소년 시설을 갖춘 안더레흐트, 브뤼헤, 겡크, 그리고 로얄 앤트워프가 유스 훈련을 위한 모든 시설을 공유한다는 이 정책의 최고 수혜자는 최강자 자리를 오래 유지해 자본이 빵빵한 안더레흐트였다.

정책 시행 이후 입단한 유망주들은 이 네 개의 클럽 중에 선택해서 입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고 전력이 강한 안더레흐트가 좋은 유망주들을 쓸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1군에서도 강팀에 속하는 브뤼헤와 겡크도 나름대로 수확을 얻었고, 당시 2부 리그에 있었던 앤트워프는 준수한 유망주들을 모두 빼앗겨 20년의 암흑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참... 그렇게 원망했던 정책이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말이지.’

로얄 앤트워프 몰락의 결정타와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생에서 그렇게 원망했던 정책인데, 지금은 시행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로얄 앤트워프를 위한 애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변화가 성배에게 헛웃음을 짓도록 만들었다.

‘그래. 그 정책 같은 것 없어도 충분히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얻었어.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프로 무대에서 16년을 버틴 기억이 있는데, 고작 유스 무대 따위는 순식간에 정리하고 1군으로 가야지.’

안더레흐트의 U-17 유스 팀의 일원이 된 성배였다.

이제 막 16세 생일이 지난 성배는 U-17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이번 시즌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15세인 선수는 U-15팀에서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성배와 동갑인 선수들이나 1년 위인 86년 말에 태어난 선수들까지도 아직 U-15에 속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덴 보레... 저 녀석도 요주의 인물이지.’

벨기에를 대표하는 오른쪽 수비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반덴 보레이지만, 성배의 기억에 의하면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황금세대를 이끄는 베테랑 역할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2010년 즈음부터 이미 대표팀과는 멀어진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성배의 전생과 비교하면 화려하게 빛나는 커리어였고, 절대 성배가 만만히 볼 수 없는 선수면서 현재의 입지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코치!! 팀 훈련 끝난 거면 개인 훈련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래, 뭐가 하고 싶은 건데?”

“기본기요. 아무래도 제가 기본기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개인 훈련으로 따라잡아야죠.”

현재 시점에서 기존의 벨기에 유망주들에 비해 성배가 가장 떨어지는 부분은 역시 기본기였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성배의 경쟁자들은 그런 선수들이 아니었다.

정말 뛰어난 선수들과 비교하면 기본기에서 분명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벨기에는 나이에 따라 유소년 선수들에게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내용이 달랐다.

6세부터 8세까지는 공과 친해지도록 해주고, 8세부터 12세까지 기본기와 전술 기술을 배운다.

12세부터 18세까지 팀 내에서 자신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어떤 역할을 맡아주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 이후에 진짜 프로 선수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12세부터 18세의 훈련 내용은 굳이 성배가 배울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성배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현재 안더레흐트의 1군 선수들 중에서도 성배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수는 드물 것이었다.

하지만 8세부터 12세 시기를 놓친 성배는 기본기에 있어서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이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훌륭하군!! 기본기 훈련은 아무래도 재미가 없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야. 확실히 주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참 대단한 거야. 앞으로도 계속 그런 훈련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좋아. 제대로 점수 땄구나. 보고서에 한 문장 정도는 좋은 의견이 추가되겠지.’

성배는 마음속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굳이 기본기 훈련을 코치에게 봐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실 기본기 훈련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고, 따로 훈련을 도와줄 사람도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배는 굳이 코치에게 부탁해 자신이 기본기 훈련을 할 것임을 넌지시 알렸다.

‘36년의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축구에 대한 것만이 아니야. 열여섯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없는, 서른여섯 어른의 방식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하나라고.’

과거의 경험을 굳이 그라운드 안에서만 활용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의롭게, 당당하게 살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어떻게 해야 아주 조금의 이득이라도 얻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코치들도 사람이었다. 코치뿐 아니라 선수, 감독, 스카우터, 팀 닥터 등 모두가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더욱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 당연했다.

코치들에게 잘 보이면 선수 평가 때 자신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해줄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가 감독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유스 팀 감독의 호의까지 얻어내면 또 그렇게 2군 감독의 호의를 얻어낼 수 있고, 결국 1군 감독의 호의, 단장의 호의, 구단주의 호의까지 모두 얻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악행을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영악한 행동까지도 하지 않을 필요는 없지.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남들이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순백의 하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 꿈을 이루고 행복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성인(聖人)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옳은 길만을 고집하며 살아왔지만, 마지막 밑바닥에서 느낀 것은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이었다.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생각이었다.

이는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였고, 무기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 낭만필드 - 02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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