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21 >
“읏차, 드디어 내 시간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훈련을 마친 그 순간부터 바로 오늘 훈련의 성과와 훈련을 통해 느낀 앞으로의 발전 방향,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정리하려고 했는데, 유빈이와 함께 놀아주다가 생각보다 늦어지고 말았다.
[RSC 안더레흐트 입단!!]
“안더레흐트... 우선 제일목표는 이걸로 한다. 안더레흐트!!”
성배는 새 노트를 펴서 첫 장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목표를 적었다.
벨기에 최고의 클럽을 꼽을 때 무조건 첫 번째로 꼽히는 안더레흐트에 입단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잡은 것이었다.
RSC 안더레흐트. 명실 공히 벨기에 주필러리그의 최강자로 꼽히는 클럽이었다.
벨기에 최강의 클럽이자 유럽의 빅 리그에서 매년 주목하는 유망주들의 화수분. 안더레흐트는 성배가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몸담을 곳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게 될 해외공관이 브뤼셀에 있었고, 안더레흐트 역시 브뤼셀 주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오가는데에 있어서의 불편함도 없었다.
‘전생에서는 이 곳이 나의 꿈의 구단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의 구단이 그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애초에 꿈에서조차 그런 클럽들을 노리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배도 마찬가지로 그런 클럽들에 대한 꿈은 20대가 되기도 전에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설정한 꿈의 구단이 바로 이 안더레흐트였다.
벨기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벨기에 리그를 떠나기 힘들 것이라 스스로 판단한 선수들의 꿈의 구단은 거의 다 안더레흐트였다.
클럽 브뤼헤, 스탕다르 리에주 등 명문 클럽들이 있었고, 벨기에 선수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꿈의 구단이 다른 선수들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안더레흐트 이상 가는 클럽이 없었다.
‘안더레흐트에 입단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 10대에 프로 무대에 데뷔하고 2년 안에 이적한다. 이게 두 번째 스텝.’
성배는 계속 이어서 노트에 자신의 다짐을 적기 시작했다.
목표라는 것을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어딘가에 확실히 적어서 남겨놓으면 이루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꿈을 이루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회가 왔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만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벨기에 유스 클럽 출신 선수 중에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해외로 나가지 못하면 병신이라고 그랬지. 무슨 일이 있어도 스무 살 전에 해외로 나가야 해. 빅 클럽들은 벨기에에서 유망주를 원하지, 완성된 선수를 원하지 않으니까.’
벨기에 리그는 분명 셀링 리그였다.
유망주를 데려와서 그들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실력과 잠재력이 증명되면 바로 비싼 이적료를 받고 유망주를 공급하는 개념이었다.
유스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클럽과 그렇지 못한 클럽의 차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더레흐트는 포르투나 세비야 같은 클럽처럼 거상은 아니었다.
빅 리그는 아니지만 바로 그 아래 급으로 평가되는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의 절대 강자인 포르투나 라 리가에서도 강팀에 속하는 세비야에서 증명된 선수들과 안더레흐트에서 증명된 선수는 평가 자체가 달랐다.
때문에 아무리 유망주라고 하더라도 비싼 값에 팔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망주들은 더 많은 빅 리그 진출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클럽들 역시 그런 선수 한 명의 이적료로 세 명 정도는 영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유망주를 키워서 해외로 이적 시켜 벨기에 리그의 강자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안더레흐트에 들어가서 스무 살 즈음에 선발로 활약할 수 있으면 빅 클럽까지는 몰라도 빅 리그 진출 정도는 쉬운 일이지. 벨기에 리그는 또 내가 활약하기 좋은 리그이기도 하니까...’
그런 이유로 벨기에 리그가 성배에게 안성맞춤이 되는 것이었다.
위에 설명했던 것처럼 벨기에 리그는 유망주 시장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
벨기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선 빅 리그 클럽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수준 높은 유망주가 많이 등장하고 유망주의 능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수준을 갖춘 리그이면서 유망주들의 몸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는 것은 빅 리그 클럽들이 벨기에 리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덕분에 벨기에 리그는 유럽 리그 중에서도 가장 몸싸움을 기피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었다.
위에도 말했지만 벨기에 리그는 유망주들에게 잠깐 거쳐 가는 곳이라고 인식되었다.
당연히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리그이고, 모든 유망주들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당장의 성적보다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리그인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공격수들, 나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돌파 유형의 공격수들이 몸싸움을 꺼린다는 것은 딱 나를 위한 리그라는 뜻이지.’
수비수에게는 피지컬도 기량이었기 때문에 수비수 유망주들은 몸싸움을 눈에 띄게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리그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공격수들이 몸싸움을 훨씬 더 기피했기 때문에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반면 공격수들은 굳이 몸싸움을 통해 터프함을 보여주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스피드, 테크닉, 슈팅, 골 결정력, 위치 선정 능력, 연계 능력 등등 보여줄 것들이 많은데 부상 위험이 있는 몸싸움까지 거칠게 해가면서 피지컬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빅 클럽들도 벨기에에서 완벽한 선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두 가지 정도의 단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벨기에 리그가 성배를 위한 리그인 이유였다.
성배에게는 피지컬을 앞세운 공격수들이 천적이었다. 스피드는 돌아왔기 때문에 스피드 중심의 선수들은 별로 무섭지 않지만, 피지컬은 여전히 별로였고, 과거를 생각해보면 지금 수준에서 크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헐크처럼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선수들이 알아서 몸을 사려주는 벨기에였기 때문에 성배가 출발점으로 삼기에 완벽한 리그라고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해.’
누군가가 그랬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수명이 짧은 운동선수들은 노쇠화가 시작되는 30대 초반부터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했다.
지금은 열여섯 살이지만 그 속에는 서른여섯의,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이 숨 쉬고 있는 성배였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세일즈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쉽게 구할 수 없는 왼발잡이 레프트 백이라는 포지션, 영리한 플레이를 앞세운 안정적인 수비력, 후방 빌드업이 가능한 풀백이라는 희소성이야. 아무리 과거로 돌아와서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걸 잊어버리면 안 돼.’
노트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들을 적은 성배는 빨간 펜으로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사실 과거로 돌아와 그라운드에 서면서 훨씬 더 몸값이 비싸고 주급을 많이 받는 공격수 전향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몸은 공격수에 더 익숙했고, 전생에서도 스물한 살까지는 스트라이커로, 스물여덟 살까지는 윙어로 활약했었다.
그런 욕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냉정해지면서 공격수에 대한 미련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라는 것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수비수의 일반적인 플레이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어도 공격수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었다.
공격수라는 포지션은 계속 막히다가도 골만 넣으면 되는 포지션이었고, 매 경기 준수한 플레이를 해주지만 특별함이 없는 공격수보다는 한 경기에 몇 번 정도 박수갈채를 받는 공격수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소한 번뜩이는 플레이를 할 줄 알아야 했는데, 성배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술이 투박한 성배는 돌파나 문전 마무리 능력에 있어서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무리 기본기를 연습해도 발 밑 감각 역시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다.
성배가 지금 기본기를 최우선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서 성배는 자신에게 타고난 발밑 감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공격수라는 포지션은 애초에 재능이 기본적으로 바탕에 있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벨기에로 건너가서도 최소한 반년은 몸의 감각을 되살리는데 집중. 그리고 반년 이후부터 과거에 부족했던 부분들을 살리는 거야. 어쨌든 측면 공격을 담당해야 하니까 러닝 크로스는 무조건 연습해야 되고. 체력도 길러야 돼.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포지션이고 많이 뛸수록 팀에 도움이 되는 포지션이니까 체력도 한계까지 길러보자.’
성배가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훈련을 자신이 알아서 준비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코치가 있어도 결국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전생의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는 성배는 그 중 어느 것을 살려야 자신에게 가장 효율이 좋은지를 알고 있었다.
기본기, 킥 정확도, 경기의 흐름을 보는 능력 등 과거의 장점들을 반 년 정도는 집중적으로 살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몸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지금의 몸과 근력, 체력에 익숙해지는 것도 반 년 동안 할 일이었다.
원래는 오른발도 왼발 비슷한 수준으로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의 오른발은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반 년 안에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생에서도 오래 연습했지만 잘 되지 않았던 러닝 크로스 훈련과 좋은 편이었지만 뛰어나지는 않았던 체력 단련의 차례였다.
수비수이지만 윙어가 있다면 윙어와 함께, 윙어가 없다면 혼자서 측면 공격을 담당해야 하는 풀백이 달리면서 크로스를 정확히 올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고, 이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체력이 좋다면 틈이 날 때마다 줄기차게 상대의 측면을 공략하고 다시 빠르게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도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신체의 성장이 끝나면... 뛰어난 피지컬 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른 장점이 죽지 않는 선에서 벌크 업도 해야 돼. 이건 무조건이야.’
신체의 성장이 끝나는 스무 살 무렵에 꼭 좋은 클럽으로 이적해야 하는 이유였다.
나름 괜찮은 수준의 스피드나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민첩성 등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벌크 업을 시켜줄 수 있는 피지컬 코치가 꼭 필요했다.
아무리 풀백이라도 기본적으로 윙어들과는 경쟁할 수 있는 피지컬을 길러야만 했다.
‘좋아. 계획은 대충 끝났다. 계획대로만 움직이면 빅 클럽도 꿈은 아니야.’
16년의 경험을 총동원해서 세운 계획이었다.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을 가능성은 있어도 이 계획이 틀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계획한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비참했다.
세상사람 모두 부자가 되는 법은 알고 있지만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성배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자세하게 부자가 되는 법을 알고 있는 만큼 무조건 부자가 될 생각이었다.
< 낭만필드 - 02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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