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20 >
“으아아... 또 죽었어. 오빠 진짜 못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사이에 왜 이렇게 못해졌어?”
“으, 으으... 또 졌네. 너, 밥 먹고 이거만 하는 거 아냐? 공부해야지!! 왜 이렇게 잘해!!”
“나 잘 하는 거 아닌데... 친구들이랑 하면 엄청 져. 오빠랑 하니까 이겨서 좋다. 우리 매일 할까?”
떡볶이를 배부르게 먹은 성배와 유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즐겼다.
이 당시 컴퓨터를 사면 이미 깔려 있던 경우가 많았던 뿌요뿌요라는 고전게임이었는데, 성배는 유빈이에게 거의 8할 이상의 확률로 패배하고 있었다.
예전에 자주 했던 기억도 있고, 나이 차가 있었던 덕분에 옛날에 더 많이 이겼었다는 기억도 있었지만, 거의 20년 만에 하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어제까지도 이 게임을 즐겼던 유빈이를 이길 수 없었다.
“엄마 왔다!! 뭐하고 있니?”
“어, 엄마다!!”
그렇게 게임을 하면서 함께 놀던 와중에 어머니가 퇴근해 집에 돌아오셨다.
성배와 함께 놀고 있던 유빈이는 어머니가 돌아 오시자마자 바로 방에서 튀어나가 어머니를 맞이했다.
혼자 있는 유빈이가 안쓰러워서 자신이 원해서 함께 놀아주고 있었던 성배였지만, 이제 슬슬 힘에 부치고 있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다행이었다.
“으이구, 우리 유빈이. 잘 있었어요?”
“응!! 학원 갔다가 와서 TV 보다가 오빠랑 같이 게임했어. 오빠 게임 엄청 못해!! 한 달 전에만 해도 잘 했었는데 완전 못 해!! 바보인가 봐. 한 달 만에 다 까먹었어.”
"유빈아, 그래도 오빠한테 바보가 뭐니?"
“야... 그래도 내가 두 시간이나 같이 놀아줬는데 너무한 거 아냐?”
어머니가 오시자마자 유빈이는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렸다.
게임을 하면서 유빈이에게 계속 졌던 성배를 무시하는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내 할 일 까지 미루고 같이 놀아줬는데 저게 오빠를 무시하네,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걸로 삐질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모습도 그냥 귀여웠다.
“배 안 고파? 저녁 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음... 나 배 안 고파!! 오빠가 떡볶이 해줘서 그거 먹었어.”
“음? 오빠가 떡볶이를 해줬어?”
“응. 게임은 못하는데 떡볶이는 잘 해!! 맛있었어. 그거 먹어서 지금 배불러어... 이거 봐, 헤헤...”
유빈이는 자신의 볼록 나온 배를 어머니께 내보이면서 성배가 해준 떡볶이가 맛이었다고 자랑했다.
자신이 해준 음식이 맛있었다고 자랑하는 유빈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쨌든 자신이 해준 음식을 좋아하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한 성배였다.
“넌 또 떡볶이는 언제 배웠어? 요리도 할 줄 알아?”
“에이, 떡볶이가 뭐 요리인가요? 간단한 분식이지... 가만히 있어도 한창 배고플 나이에 죽어라 운동하니까 간식이라도 해 먹으라고 부실에 요리 기구들 있어요. 부원들끼리 돌아가면서 가끔 해 먹어서 간단한 건 할 줄 알아요.”
학교에서 아무리 급식을 준다고는 하지만 보통 훈련은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에 부실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들이 전부 갖춰져 있었다.
저녁 식사는 보통 집에서 집안일을 하시는 부원들의 어머니들께서 돌아가면서 해주시지만,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 수십 명이 모여 죽어라 운동을 하는데 세 끼 식사만으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훈련 중간에 간식을 먹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이 때 빵이나 김밥처럼 간단한 것을 사와서 먹을 때가 많지만 라면이나 떡볶이처럼 간단한 것들을 직접 해서 먹을 때도 있었다. 보통은 후배들이 담당했고, 덕분에 성배도 어느 쉬운 음식들은 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들 진짜 다 컸네? 벨기에에 내보내도 걱정은 없겠어.”
“음... 아버지랑 같이 가는 건데요?”
“아버지보다 네가 더 믿음직스러운 걸 어떡해. 히히.”
어느새 마흔 줄을 훌쩍 넘으신 어머니지만 여전히 농담도 잘 하시고 잘 웃으시는 소녀 같은 면모가 남아있었다.
전생에도 성배가 그렇게 속을 썩였음에도 해맑은 미소와 소녀 같은 면모를 잃지 않으셨으니 이 시점에서의 어머니는 훨씬 더 발랄한 느낌인 것이 당연했다.
“오빠랑 슈퍼 가서 재료 산 다음에 떡볶이도 해먹구... 아!! 튀김이랑 김밥도 먹었어.”
“... 튀김이랑 김밥? 그것도 오빠가 해준 거야?”
“아니!!”
“어라? 유빈아? 저기... 그거 비밀...”
“사와서 먹었어!!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엄청 맛있다아!!”
불안하다 했더니 결국 저질러버렸다.
어머니한테 자신이 해준 떡볶이를 먹어서 배부르다고 할 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떡볶이가 맛있었다고 자랑할 때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던 성배였다.
결국 기세를 탄 유빈이가 끝까지 가고 말았고, 분명히 두 시간 전에 말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한 비밀을 누설하고 말았다.
“오빠가 튀김이랑 김밥을 사.서 줬어? 맛있었니?”
“응!!”
최소한 20분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사건이었다.
결국 순응한 성배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어머니를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으으... 고 녀석. 일부러 한 거 아냐? 게임하는 거 보니까 말괄량이도 그런 말괄량이가 없던데... 분명히 결국 내가 혼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악마네, 악마야...’
“어릴 때부터 그런 음식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라거나 “너도 그래. 운동하려면 몸에 좋은 것만 먹어도 모자란데, 그런 기름 덩어리에 위생적이지 못한 걸 먹으면 어떡하니?”라던가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성배의 예상대로 정확히 21분 동안 이어졌다.
정작 튀김이 먹고 싶다며 사달라고 했던 유빈이는 귀신같이 빠져나갔고, 성배가 거실로 나왔을 때는 TV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어서 성배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화를 내신 것도 아니고 혼내신 것도 아니고 그저 걱정을 좀 길게 하신 것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혼자 낄낄대고 있는 유빈이가 얄밉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콩!
“아코!!”
“요 녀석이... 고작 두 시간도 못 가서 우리끼리의 비밀을 이른단 말이더냐!!”
“치...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뭐. 어쩌다보니 말이 나온 거지.”
성배는 가볍게 유빈이의 머리에 땅콩을 먹여주었다.
장난치자고 살짝 어루만져 준 것이었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는 않은지 유빈이도 놀라서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곧 배시시 웃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등바등 대들었을 유빈이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자기도 미안하긴 미안한 것 같았다.
사실 열두 살의 어린 아이가, 그것도 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유빈이가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뭐, 어차피 네가 어머니한테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생각보다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뭐야!! 무슨 뜻이야!! 나 입 무거워!! 비밀 잘 지킨다고. 친구들이 비밀 얘기는 다 나한테 한다니까?”
“그래서 우리 비밀 얘기는 두 시간 만에 다 잊어버리고 어머니한테 말한 거야?”
어린 시절로 돌아와 여동생과 함께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유치해질 수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는 동안 당한 일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귀여워서 놀려주고 싶어졌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더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모두가 다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성배도 그랬고, 오랜만에 본 어린 시절의 여동생은 그야말로 놀리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으으... 그건 할 말 없지만... 그냥 엄마니까 긴장이 풀린 것 뿐이야!!”
“응. 나도 어머니니까 네가 말할 것 같았어. 설마 유빈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런 비밀을 말하진 않았겠지.”
“그럼!! 나는 입이 무거운 여자니깐!!”
여자...라고 하기에는 아직 많이 빈약한 아이지만, 한창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할 때였기 때문에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고, 굳이 태클을 걸 필요는 없었지만 탄력을 받아버려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여동생을 놀려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수십 년 만에 다시 이 맛을 보고 나니까 견딜 수가 없었다.
“에이, 우리 꼬맹이가 무슨 여자야. 아직 애기지. 이렇게 귀여운데...”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으으... 그래도 여자야!! 나 이제 다 컸다구!!”
귀엽다 - 그러면 아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유빈이는 바로 그런 반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어쨌든 초등학교 고학년이니까 그 정도 반박은 가능하겠지만 자신이 귀엽다는 말에 꽂혀서 뒤의 말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에이...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어디 있어. 보통 다 큰 여자라고 하면 키도 크고, 그리고 그...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서 몸매에 굴곡이...”
‘내가 지금 애를 데리고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유빈이를 놀리겠다는 마음에 불타서 괜히 하지 않아야 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성배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혼자 외롭게 살다가 갑자기 가족들과 만나게 되니까 컨트롤이 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결국 전생의 외로움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자신의 전생이 불쌍해졌다.
“뭐? 굴곡이 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변태!!”
“음? 알아들었구나...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너는 아직 애기다!! 땅땅땅!!”
요즘 초등학생들은 이런 은유적인 비유도 알아듣는구나, 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어릴 때도 초등학교 고학년정도 되면 일찌감치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얼리 어답터들이 있었다.
고작 4년의 차이였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빨리 변하기 때문에 4년 정도면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납득이 되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간다. 너도 TV 너무 많이 보지 말고 들어가서 책이라도 좀 보고 그래.”
“배애!! 도망 가냐? 변태 오빠야!!”
혹시나 어머니라도 나오셔서 들으셨다가는 또 잡혀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배는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대략 40분 정도로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진이 다 빠질 수도 있었다.
이제는 물러설 때라고 생각한 성배는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 낭만필드 - 02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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