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18 >
“그래서 벨기에로 가면... 안더레흐트나 클럽 브뤼헤, 로얄 앤트워프 같은 팀 유스로 들어가려고?”
“로얄... 앤트워프...”
이 시기의 로얄 앤트워프는 벨기에 내부에서 밀리는 입지를 활발한 해외 교류를 통한 해외 시장 개척으로 돌파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기에 리그 내에서의 위상에 비해 해외에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한국의 성규한 선수가 잠깐 뛰기도 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었다.
“왜 그래? 로얄 앤트워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니요. 그냥 어감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과거의 일은 확실히 잊기로 결정했지만, 아직은 당연히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돌아온 이 현실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점점 과거의 일이 떠올랐을 때 흔들리는 빈도와 흔들리는 수준은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훈련이 뭔데?”
“결국 기본기죠. 아무래도 유럽 친구들에 비하면 기본기가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차피 기본기에서 밀리는데, 그것보다는 차라리 네 장점을 갈고 닦는 게 낫지 않아?”
“제 장점이라고 해봤자 팀 게임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잖아요. 어차피 지금 못 하는 거면 약점 보완이라도 해야죠.”
항상 한국 선수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기본기였다.
선수 개인의 기량을 향상시켜야 할 어린 시절부터 이기기 위해서 기본기는 무시하고 이기는 축구를 가르치다보니 결국 나중에는 최소한의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해 세계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배는 재능이 부족한 대신에 축구 지능만큼은 세계 수준으로 봐도 밀리지 않았다.
이런 선수들은 보통 개인 기량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만 끌어 올리면 적어도 자신의 역할, 1인분만큼은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비록, 경기를 지배하는 능력에서 약간 부족하기는 하겠지만, 모든 선수가 경기를 지배할 필요도 없고, 수비수에게는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만큼이나 안정감이 중요했고, 성배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그걸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가... 너무 크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것이 만약 전생의 불행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이 대가를 준 사람이 신이든 악마이든 간에 상관없이 바로 멱살을 잡고 어떻게든 죽여 버릴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마지막 꿈을 이루려기 위해 발악을 시작하려는 상황이지만, 전생의 자신은 축구 선수로서의 꿈이 큰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대가로 받은 기회, 거기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왕 받은 기회... 최대한으로 살려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인생도 놓치지 않을 거다.’
자신의 불행의 대가로 이번 기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성배의 마음도 편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것, 어차피 받은 기회 제대로 살릴 생각이었다.
벨기에와 벨기에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어린 시절부터 벨기에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자, 일단 그러면 워밍업부터 빨리 시작해볼까요?”
“그래, 몸 제대로 풀어라. 아무리 몸 많이 안 쓰는 기본기 훈련이라고 해도 우습게보다가는 부상당하니까.”
이번 생에서 이뤄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성배의 기량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에 달려있었다.
결국 지금 해야 할 것은 훈련, 그리고 또 훈련이라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애써 뒤로 밀어놓은 성배는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자, 잠깐 쉬자!!”
“허억... 허억... 허억...”
기본기 훈련도 정말 제대로 하게 되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훈련이었다.
코치가 볼을 던져주면 그것을 발등, 인사이드, 발바닥 등으로 트래핑하는 간단한 훈련부터 양발을 번갈아서 빠르게 볼 위에 올리다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그 동작 그대로 이동하는 훈련까지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빠르게 반복해야 하는 훈련들이 많아 보이는 것에 비해 상당히 힘들었다.
“뭐야? 뭐 이렇게 빨리 늘지? 너 무슨 한 1년 쉬다 왔냐? 원래 이런 기량을 가지고 있다가 적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빨리 늘 수가 있나?”
“하아... 제가... 맘먹으면 못 하는 건 없다니까요? 저 지금 제대로 맘먹었어요.”
지금 성배는 모든 요령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몸에 익지는 않은, 그런 상태였다.
몸에 익지는 않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요령이라는 것,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빠르게 숙달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학생다운 어설픔이 남아있었던 성배의 동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프로페셔널한 수준으로 가다듬어져갔다.
“이 정도면 걱정할 것도 없겠는데? 이거 레알 마드리드라도 가는 거 아냐?”
“에이... 한참 부족해요. 한참...”
아쉽게도 전생의 모든 요령과 테크닉들을 몸에 익힌다고 해도 성배가 원하는 수준에는 한참을 못 미쳤다.
전생에는 잃어버렸던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고, 부상으로 놓쳤던 성장 시기에 피지컬을 보완한다고 해도 잘 해야 1부 리그 중하위권 클럽에서 활약할 수 있을 정도의 기량이었다.
성배가 모든 것을 잃고도 프로 무대에서 16년을 버틴 힘은 결국 축구 지능이었다.
기술이 투박해도, 피지컬이 형편없어도, 탑 클래스 수비수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영리함으로 버틴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그렇게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어도 1부 리그에 올라가지 못할 만큼 다른 부분들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자, 다시 시작할까요? 기본기는 이쯤 하고 킥 연습하고 싶네요.”
“킥? 하긴... 풀백이면 킥도 중요하지. 그러면 내가 움직이면서 받아줄 테니까 내가 소리 지르는 타이밍에 맞춰서 보내줘.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빨리 움직일 거야.”
영리한 플레이 외에도 성배의 또 다른 장점을 하나 더 꼽으라면 킥 정확도를 꼽을 수 있었다.
부상 이후에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킥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훈련으로 크게 성장시키지 못한 기본기에 비해 킥의 정확도는 크게 성장했었다.
덕분에 2부 리그에서는 찾기 힘든 후방 빌드 업이 가능한 풀백이 될 수 있었다.
후방에서 볼을 뿌려줄 수 있는 수비수의 가치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훨씬 더 높아질 것이었다.
그것이 예정된 미래였고, 성배가 킥 연습에 집중하는 이유였다.
“예. 까다롭게 움직여주세요. 하드코어하게 갈 거니까요.”
“... 아니, 네가 하드코어하게 가면 내가 볼 주우러 다녀야 하잖아...”
정확한 킥을 보내기 어려워질수록 볼을 받아주는 유영민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런 것을 배려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영민도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배를 도와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줄 것이었다.
사실 유영민 정도의 코치가 겨우 열여섯 살짜리 학생의 훈련을 무상으로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성배가 절을 해도 부족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성배는 유영민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유영민에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유영민을 최대한 이용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 부탁하는 거구나.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그랬겠구나...’
바보 같기까지 했던 자신에 비해 유영민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무리 좋고 능력이 있어도 착하기만 했다면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코치직을 맡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다만, 학창 시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영민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성향이 있었고, 성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남들에게 미움은 받으면 안 되겠지만, 미움을 받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도움을 받아야 돼.’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성배였다.
조금 다르게 생각하니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새로운 삶에서는 자신만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36년간 형성된 바보 같이 착한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두 성격이 섞이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1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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