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16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겼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걸고 가는 유학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옛말, 정확하구나.”
한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성공한 축구 선수. 자신의 기억 속에는 상당히 많았지만, 지금의 이 시점에서는 전부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한국인도 충분히 유럽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수비수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는 자산이 있었다. 성공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이!! 모지리!! 일찍 왔네? 오늘은 집에서 나올 때 개념도 챙겼나봐? 혼자서 훈련한다고 꼴값 떨지 않는 거 보니까?”
“아... 기분 좋았는데...”
감독을 향해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걷고 있던 성배의 앞에 불청객이 또 다시 찾아왔다.
첫 번째 불청객인 석영균 감독의 입을 다물게 만들면서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나빠지려고 했다.
“뭐? 기분 좋았는데? 그건 나를 만나서 기분이 나쁘다는 이야기냐?”
“예.”
“거기다가 요? 요? 새삼 느끼지만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개념 챙겨왔다는 말은 취소한다. 와... 진짜 강적이다, 이 새끼.”
어차피 이제 다시 볼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귀찮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었지만, 오늘 이후 오랫동안 볼 일도 없는데다가 좋은 감정도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유치한 룰을 지키지 않았을 뿐, 그래도 조용히 살았던 성배가 갑자기 대들며 나서자 진현필은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 뭐냐? 우리가 하도 미쳤다, 미쳤다, 그랬더니 진짜 미치기로 한 거냐?”
“아니요.”
“또... 또, 요? 이건 이제 막 가자는 거지? 나한테 아주 제대로 개기는 거지?”
“그동안에도 계속 개기고 있었는데요.”
감독은 그래도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에는 가족을 제외하면 두 문장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감독에게는 거의 연설을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나이 좀 있다고 허세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 아이를 상대로는 손톱만큼의 감정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아... 아앍!! 너 나 울화통이라도 터뜨려서 복수하려고 하는 거냐? 씨발, 무슨 말이 안 통해?”
“그렇게 죽으면 저한테는 책임 없습니다, 아니. 없어요.”
“... 놀리냐? 놀려? 굳이 ‘다’로 잘 끝내놓고 다시 바꿔? 가지고 노냐? 맞먹자고?”
“하아... 나 이 학교 안 다니게 됐거든요? 이제 그냥 남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뭐, 뭐라고? 이 새끼, 진짜 미쳤어!! 와, 진짜 돌겠네...”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같은 학교 학생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과거,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전생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후회했던 오지랖 병이 또 도지고 말았다.
어차피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진현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전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아예 신경을 끄고 살기에는 수행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후배들 기합 줄 시간에 개인 훈련이라도 하시죠. 그 편이 훨씬 유익할겁니... 아, 유익할 테니까요. 다른 선배들이야 재능이 없다고 쳐도, 선배야 재능은 충분히 프로를 노릴 정도는 되잖아요?”
실제로 성배의 영원고등학교 선배인 진현필은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청주 FC까지 입단해 K리그에서 활약했다.
최고의 수비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A매치 출전 경험도 여덟 경기에 달할 정도로 K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을 정도로 재능은 확실히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젠장... 이딴 녀석도 한 팀의 레전드로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에 위치한 영원중-영원고를 다니다가 대학 때 서울로 올라갔지만, 다시 청주 FC로 돌아온 진현필은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로컬보이였다.
청주가 고향이고 청주에서 자라 선수생활도 청주에서 시작하고 끝낸, 성배와 비슷한 선수생활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대한 은퇴식과 함께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 바로 1군 코치로 합류했고, 전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청주 FC의 감독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다른 선배들도 진현필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을 괴롭혔지만, 대부분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비해 마지막까지 진현필에게 만큼은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의 뒤에는 이런 이유가 존재했다.
“뭐, 그럼 이만.”
진현필의 잘못도 있지만 진현필에 대한 자신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스민과 엘리자베스의 기억은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만, 기타 다른 기억들은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려 마음을 먹은 이상 진현필에 대한 분노도 이제는 그만 접어둬야 했다.
“아오, 저거 뭐야!!!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성배는 진현필을 뒤로하고 쿨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진현필의 사자후가 들렸는데, 그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화도 내지 못할 정도로 멘탈을 털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해서 아쉬웠는데,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진현필의 찌질한 모습도 보기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오빠!! 그러면 내일부터 아침에 안 나가는 거야?”
“응? 아, 응. 내일부터는 집에 있을 거야.”
회귀한 이후에도 동생과 시간을 보낼 여유가 마땅히 없었던 성배는 더 이상 학교 훈련을 나가지 않게 되어 드디어 여유가 생긴 김에 학원에 가는 유빈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성배와 네 살 터울인 유빈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나이였다.
나중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무서운 존재가 되지만, 아직까지는 그 나이에 맞는 순수함을 갖추고 있던 시기여서 유빈이도 한창 귀여웠던 때였다.
“에잉... 부럽다아... 집에서 매일 쉬고...”
“야, 누가 보면 너는 하루 종일 공부하는 줄 알겠다. 미술학원 하나밖에 안 다니는 주제에...”
“헤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원래 누가 학교 안 나가면 보통 다 이런 이야기하잖아.”
2000년대 초반이면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까지는 사교육의 열풍이 불어 닥치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서 이제 막 6학년이 되는 유빈이는 미술 학원 외에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미술 학원도 본인이 미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다니는 것이고 미술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욕심으로 다니게 하는 학원은 하나도 없었다.
“으음... 뭐...”
“그런데 그건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정신없어...”
“아아, 연습이지, 연습.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빈이와 함께 걷는 동안 성배는 공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트래핑하고 있었다.
발 밑 감각과 개인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는 성배였기 때문에 상황이 허락하는 한 볼을 몸에 항상 붙이고 있었다.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몸의 여러 부분들을 사용하며 볼을 다루는 중이었다.
“와아, 잘 하네? 축구 좀 한다더니, 잘난 척 하는 게 아니었나봐?”
“이 정도로, 뭘... 아직 멀었지. 이건 고등학생 정도 되면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뭐야, 그런 거야? 그 쉬운 걸 오빠는 근데 왜 연습하고 있어? 오빠는 못하는 구나? 에잉, 그러면 잘 하는 것도 아니었네, 칫.”
“야, 야. 못 한다고 안 했어.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에도 항상 유빈이와 대화를 하면 네 살이나 더 어린 꼬맹이에게 항상 끌려가고는 했었는데, 그것은 정신연령으로 서른여섯의 아저씨가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어른의 마음으로 아이와 대화하려고 하니 더욱 말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마냥 귀여우니 어릴 때처럼 마주 상대할 수 없어서 더 그랬다.
“공이랑 친해지려고 하는 거지. 친구랑도 계속 붙어있으면 친해지잖아? 앞으로 오빠는 이 공이랑 매일 같이 지내야 하니까 내 몸처럼 다룰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음... 공을 어떻게 몸처럼 다뤄?”
“아... 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네 살, 다섯 살 때 한창 입에 ‘왜’라는 질문을 달고 다니며 성배를 괴롭게 한 적이 있었다.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유빈이에게 다섯 살짜리 아이가 너랑 똑같은 질문을 한다고 말하면 화내겠지만, 사실 그 때의 엘리자베스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성배였다.
“아, 그래!! 너도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보면 가끔 막 선을 삐져나올 때가 있지?”
“응. 아무리 조심해서 칠하려고 해도 자꾸 삐져나와.”
“그건 붓이 네 손이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손으로 하면 막 섬세하게 끝을 먼저 칠하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선생님들은 같은 붓으로 칠해도 잘 안 삐져나오지?”
“맞아!! 진짜 잘 하셔. 절대로 색도 안 삐져나오고, 4B 연필로 그려도 스케치북에 안 번져. 진짜 대단하다니까?”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유빈이의 모습은 성배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눈빛에서 빛이 날 정도로 반짝거리며 좋아하는 유빈이의 지금 모습과 처음 축구를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던 자신의 모습은 아마 비슷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축구에 대해 말하면서 저렇게 좋아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현실을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입맛은 조금 썼다.
“붓을 엄청 오래 쓰셔서 익숙해지신 거야. 그러니까 붓으로 그려도 손으로 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하실 수 있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볼을 매일 가지고 놀다보면 익숙해져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내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되는 거지.”
“아아... 그런가? 그러면 나도 매일 붓을 들고 다녀야 되는 거야? 으음... 불편할 것 같은데에...”
“하하,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야 볼을 계속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축구선수니까 이러는 건데, 너는 연습하려면 계속 그림을 그려봐야겠지?”
“좋아!! 그러면 하루에 세 장씩 그려봐야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잘 때는 붓을 안고 자야겠어!!”
“음... 그러면 붓이 부러질 것 같은데...”
어차피 아이들이 다 그렇듯 며칠이나 갈지 모를 결심이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말았다.
자신이 볼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열심히 그림을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유빈이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유빈이의 모습에서 엘리자베스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엘리자베스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열 살이 되었을 것이었다.
나이 대가 비슷해서 더욱 유빈이에게서 엘리자베스가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너도 꼭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유빈아.’
전생에서 유빈이는 결국 미술에 대한 꿈을 접고 공부에 열중해서 부모님을 따라 공무원이 되었다.
예술중학교까지 진학하며 꿈을 키웠던 유빈이가 꿈을 접었던 시점은 성배 자신이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한참 예민했던 시기였다.
성배와 항상 장난 식으로 우리 집에는 자식 둘이 다 예체능으로 진로를 잡았다며 우리 집 어떡하냐는 대화를 나누었던 유빈이는 결국 좌절하는 성배의 모습을 보면서 진로를 바꾼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워낙 부정적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때였고, 그래서 혼자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유빈이에게 반면교사가 아니라 성공모델이 되어주고 싶었다.
유빈이와의 사이가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싸운 적도 거의 없고 서로에게 선물도 자주 사주었을 정도로 친한 편이었기 때문에 유빈이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 낭만필드 - 01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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