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15 >
“허, 허허... 눈빛을 봤을 때, 예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게 해냈네. 정말 간절한가 보구나.”
“여보, 합격이에요?”
“응. 완벽해. 일주일동안 한 것치고는 엄청나네. 성배, 너... 생각보다 머리가 훨씬 좋았던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의대나 법대 같은 것 노려보지 그래?”
약속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 때 말했던 대로 아버지의 앞에서 프랑스어 시험을 본 성배는 당연히 아무 문제없이 완벽하게 시험을 통과해냈다.
어느 정도 틀려도 열심히 한 티가 나면 허락해주려고 했던 장석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저 그러면... 내일 바로 학교에 나가서 이야기할게요. 어차피 아직 정식으로 입학한 건 아니니까 별 문제 없겠죠.”
“그래. 아빠도 곧 시간 내서 학교 한 번 찾아갈게. 갑자기 같이 가게 되니까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
성배는 아직 정식으로 영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지금 성배가 영원고등학교에 합류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은 신입생 리쿠르팅, 즉, 교육부의 절차와는 별개로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성배를 스카우트했고, 성배도 동의했기 때문에 미리 적응을 한다는 의미였지, 공식적으로 성배는 여전히 영원중학교 학생일 뿐이었다.
중학교는 이미 졸업 요건을 모두 채운 상태였고, 고등학교는 배정도 나지 않은 상황.
성배의 유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벨기에로 유학을 갔을 때, 그곳에서 학업을 진행할 수 있는 학교만 구하면 끝이었다.
“그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 얼굴을 본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별로 인사하고 싶은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저렇게 말씀하시니 인사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장기 부상으로 1년이 넘게 쉬어야 했던 자신을 제대로 관리도 해주지 않은, 꼴도 보기 싫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냥 내일부터 축구부 안 나옵니다, 라고 한 마디 던져주고 나올 생각이었다.
“저, 내일부터 축구부 안 나옵니다.”
“뭐, 인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아마 내일부터는 훈련에 참가하지 않을 겁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한 마디로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문장 내로 끝낸 성배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돌아 나오려고 했다.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존경심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면, 이번에 유학을 간다, 아버지를 따라 벨기에로 가게 되었다, 는 등의 첨언을 했겠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좋은 기억이 없는 감독인데, 감독이라고 하니까 또 비안키 감독이 떠올라서 더욱 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감독이라고 괜히 미워하는 건 하지 말자.’
앞으로 계속 선수생활을 해야 하는데 감독이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면 좋을 것이 없었다.
굳이 감독이라는 이유가 아니어도 싫어할 이유는 많은 영원고등학교 석영균 감독이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이유에서 ‘감독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빼기로 했다.
“뭐야!? 다른 학교로 가려고 하는 거냐!! 이런 경우 없는 새끼가 있나!! 이미 우리랑 이야기 다 된 거잖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보성고냐? 매강고냐? 그 자식들이 뭘 어떻게 해준다고 한 거냐!!”
감독은 성배가 다른 학교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전학가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배는 아니라고 했지만, 흥분한 감독에게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보성고와 매강고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는 고등학교 축구부임과 동시에 올해를 기점으로 포백으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는 학교였다.
아무리 명문 고등학교라도 쓸 만한 레프트백 유망주를 데려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성배에게 손을 내민 것이라 넘겨짚은 모습이었다.
“젠장!!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 도의가 있지!! 네가 제일 문제야!! 이미 구두 합의까지 다 된 것 아니야? 구두 계약도 계약이야, 이 어린놈의 새끼야!! 그 따위로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다른 학교로 가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제가 이 곳에 더는 오지 않는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감독과 드잡이 질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전의 삶에서는 사람이 좋다 못해서 바보 같을 정도로 호인이었던 성배였다.
어느 한 명과도 척을 진 적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손해들도 많이 보았다.
여러 상처들이 쌓이는 중에도 이미 형성된 성격을 버릴 수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의리를 지켜왔던 로얄 앤트워프에게 강렬한 배신을 당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후, 과거로 돌아온 성배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과거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기로 했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어쨌든 자신이 살아온 20년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에서 오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 외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게 나눠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성배가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가족들 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 어차피 고등학교는 갈 텐데, 여기 안 오겠다면 다른 학교로 가는 거지!! 이 새끼가 계속 사기를 치려고 해?”
“고등학교는 가죠. 벨기에 학교 갑니다.”
“벨기에? 벨기에? 네까짓 게 유럽을 간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사실을 말했지만 감독은 믿어주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으로 진출하는 한국 선수가 많지 않아 유럽 무대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으로 나간 선수도 거의 없었고, 그 중 성공한 선수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신화의 주역인 박인진과 윤기표, 성규한, 그리고 대한민국의 절대적인 레전드 채범진, 하대욱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채범진을 제외하면 전부 중소리그에서의 활약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선수들이 유럽 진출에 대한 꿈을 표현하는 것마저도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네까짓 게라... 뭐,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외교관이셔서 따라가는 겁니다. 감독이라면, 최소한 선수의 신상에 대한 정보 정도는 아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런, 건방진!! 이 건방진 새끼야!! 그게 감독한테 할 소리냐!! 싸가지가 없어!! 그 상태로 벨기에 유학까지 가면 아주 싸가지가 볼만하겠구나!! 예의는 배우고 유학을 가도 가야지,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만하다, 알만해!!”
지금 성배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 가족을 건드린 감독으로 인해 성배도 살짝 뚜껑이 열려버렸다.
다행히, 16년 동안 그저 그런 선수로, 그것도 타지에서 살면서 더러운 대우를 받은 적도 많았기 때문에 이성을 놓을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았다.
“이제 제 감독 아니라고 지금 계속 말했던 것 같은데, 감독님은 언어를 배우셔야겠네요.”
“뭐, 뭐야!?”
“예의라는 건 말입니다, 예의를 지킬만한 상황과 지킬만한 사람에게 지키는 겁니다. 선생님이 예의를 지킬만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상황이 예의를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아셔야죠. 저랑 같이 다시 배우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흥분한 감독과 여전히 이성을 붙잡고 있는 성배.
이 말싸움의 승패는 시작부터 명확하게 정해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연달아 겪으면서 성격에도 큰 변화가 생긴 성배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참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건장한 성인의 분노를 마주하면 겁에 질리는 열여섯의 중학생이 아니라 서른여섯, 사회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이었다.
흥분해서 두뇌 회전이 둔해진 성인 한 명 정도는 말로 가볍게 상대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저는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네요. 어쨌든 지난 한 달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지내시길.”
“이... 이 새끼!! 너!! 부모님 모셔 와라!! 내가 한 마디 해야겠다. 아들 새끼를 어떻게 키운 거냐고!!”
“이상하네요. 저는 애초에 선생님의 제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이죠. 저는 지금도 영원중학교 학생이고, 영원고등학교에는 아직 배정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은 제게 선생님도 아닙니다. 아저씨죠. 동네 아저씨가 저희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말할 권리가 있었던가요?”
성배는 마지막까지 감독의 속을 긁어놓았다.
속이 시원했다.
지난 삶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한 행동들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 꾹 눌러만 놓고 숨겼던 것인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과거로 돌아온 뒤, 가족을 다시 만났을 때, 그라운드에 다시 섰을 때, 그리고 지금. 세 번째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너... 너!! 다시 이 바닥으로 돌아올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네 놈이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다!! 유럽에서 성공해라!! 너, 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선수생활은 그 때 끝이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라!! 어차피 아무 것도 못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유럽에서 꼭 성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네요. 굳이 이런 것은 필요 없었는데... 어쨌든 꼭 명심하고 성공하겠습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인터뷰에서 한 번쯤은 언급해드리죠. 어떤 방향일지는... 뭐, 그럼.”
마지막까지 감독의 속을 긁어놓은 성배는 경쾌하게 문을 닫고 부실을 나왔다.
또 한 번, 현실이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뭔가 자신을 짓누르던 것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자신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었다.
지난 20년의 기억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 종국에는 완전히 다른 위상을 가진 선수가 될 것이다.
그런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 낭만필드 - 0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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