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12 >
“이 새끼들... 존나 빠져가지고!! 여기가 중학교인 줄 아냐? 네들이 아직도 중3인 것 같아? 며칠 전까지 위가 없었다고, 지금도 그런 것 같냐?”
선배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 상 어제까지 최고 선배였던 학생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 막내가 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선배 티를 못 지웠다는 말은 선배들이 후배를 갈구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선배는 개뿔... 빨래도 제대로 못 하는 새끼들이... 선배대접 받다보니까, 빨래하는 법도 까먹었냐? 엉?”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였지만, 생각보다 오래 하기는 힘든 자세였다.
아무리 운동선수들이라고 하더라도 몇 분만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면 곧 팔이 후들거리고 땀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 모래바닥에 엎드렸기 때문에 손바닥이 아픈 것은 덤이었다.
‘앞으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성배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지금 성배에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고, 오늘 연습 시합을 계기로 완전히 진지하게 이 상황을 생각해보기로 한 만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계획을 짤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고,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겠지만, 지금 이 때부터 20년 동안 별로 행복한 일도 없었고, 슬픈 일만 가득했던 삶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이전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전생 같은 느낌인데... 전생은 아니고, 과거로 돌아온 건데... 평행 세계? 그러면 저 쪽에 있던 내 영혼이랑 여기 있던 내 영혼이 바뀐 건가? 그러면 저 쪽으로 건너 가버린 친구한테 너무 미안한데...’
지금 이 시점에서 20년이 더 지난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 인생도 존재하는 인생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백 투 더 퓨처]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처럼 과거로 거슬러 온 것인지, 아니면 가끔 인터넷에서 보이는 ‘평행 세계’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른여섯의 자신도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고, 그 경험들도 모두 진짜였을 것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고, 너무 생생했다.
-퍼--억!!
“야!! 이 새끼야!! 너는 왜 대답 안 하냐? 씨발, 네가 제일 문제야!!”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성배는 옆구리를 밀치는 힘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에 선배들이 뭔가 말을 했고, 자신만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차인 것은 아니고 밀린 것이기는 한데, 옆구리가 따끔한 것을 보니 축구화 바닥에 있는 스터드에 긁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해? 진짜 그렇게 생각 하냐? 진짜 죄송해? 씨발, 그러면 뭐가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냐?”
성배는 지금 선배들에게 완전히 찍혀있었다.
선배들에게 막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깍듯하지도 않았고, 욕을 해도, 체벌을 가해도,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도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맞을 때 아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니 오기가 생겨 더욱 더 성배를 괴롭히는 선배들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본의 아니게 군대로 따지면 고문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 너 때문에 네 동기들 다 혼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지금 이게 진짜로 니네가 다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넌 진짜 개새끼다.”
“죄송합니다.”
“맨날 말로만... 말은 잘 해요, 미친 새끼. 됐고, 새끼들아. 머리 박아라.”
모래와 자갈로 만들어진 학교 운동장에서 속칭 ‘원산폭격’이라고 불리는 자세로 기합을 받게 된 예비 입학생들이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엘리트 축구의 현실이 이랬고, 그것에 익숙해진 선수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러한 부조리에 순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합을 받으면서 선배들을 욕하고 있을 선수들도 나중에 선배가 되면 또 똑같은 짓을 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망주들이 사라지게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포항제철에 합류해 훈련을 받았을 정도로 그 어떤 선수와도 재능의 레벨이 달랐다는 김병수 선수가 대표적이었다.
야구계의 전설인 최동원 선수도 연세대학교 시절 2실점을 해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심한 구타를 당해 허리 아래 부분이 까맣게 죽어버려 100일 이상 누워있어야 했고, 고교 최고의 강타자였고, 한 대회에서 8개의 홈런을 날린 천재 타자 박동혁 선수도 구타로 인해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하며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대한민국 학원 축구의 병폐 아래에서 사라지는 선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천부적인 패싱 능력과 득점 감각, 정교한 스핀킥과 프리킥 능력, 공격 진영 모든 곳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어 그라운드 자체를 지배해버리는 축구 천재 김병수는 그 재능이 너무 빛났고 엄청났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게임의 분위기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부상을 당해도 선수 관리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던 학원 축구계는 그를 계속 그라운드로 몰았다.
찜질 한 번, 주사 한 대에 경기를 출전시켰고, “오른발이 다쳤어? 그럼 왼발로 차.”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경기에 또 나섰다.
결국 대학 진학 후에는 뛰는 날보다 서있지도 못해서 앉아있는 날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고려대학교 진학 후에 그가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중 세 경기가 연세대학교와의 정기전 경기였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던 그는 그 재능만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1년에 정기전 한 번 뛰는 선수가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 감독이 반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미 양 발목은 인대가 1인치씩 늘어났고, 국가대표에 선발된 후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무려 네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그 와중에 발목 부상의 여파로 무리가 가버린 무릎 수술까지 받아버렸다.
결국 국내에서 자리를 잃은 그는 막 창설된 JFL, 일본 실업리그로 진출했는데, 그 팀에서 특급 대우를 받아 재수술, 재활 비용 보장을 약속받았다.
실업리그라지만 100경기 정도 출장해 70골 정도를 넣은 김병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에도 나서지 못했고, 매 경기 진통제를 맞고 시합에만 뛰었다고 전해졌다.
지금에서는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엄청 바뀐 것도 없었다.
부상을 당해도 성적에 목을 매는 감독 때문에, 성적을 내서 선수들을 대학에 보내 자신의 경력을 쌓으려는 감독 때문에 쉬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성배 정도의 선수가 커리어를 위해 관리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었다.
부상을 당해도 동료를 위해서... 라는 말에 경기를 뛰어야 할 것이었다.
자신의 커리어와 선수 생활은 다 무시당할 것이고, 동료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감독의 경력을 위해 자신의 몸은 소모품처럼 쓰일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프로 무대에 진출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작지 않았다.
‘일단... 한국을 뜨자. 여기서는 아무 것도 못 한다.’
적극적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살아내겠다고 결심한 성배였다.
지난 생에서는 마지막에 꾸었던 꿈이 겨우 벨기에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는 것이었지만 다시 기회가 생겼고, 그런 초라한 꿈이 아닌 진짜로 멋진 꿈을 꿀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
유럽 무대에서 16년을 활약하면서 몸으로 익힌 경험들로 동년배의 다른 선수들보다 몇 걸음은 더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유스 시스템이 아직 형편없는 한국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또 다시 몸이 망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나라를 뜰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응? 뭔데? 뭔데 갑자기 그렇게 무게를 잡고 그래?”
“그러게요. 성배가 저렇게 나오니까 무서운데요?”
그 날, 성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주장석의 직업은 바로 외교관이었고, 이번에 발령 난 재외공관은 바로...
“저, 학교 그만두고 아버지 따라서 벨기에에 가겠습니다.”
성배가 16년의 삶을 보냈던 벨기에였다.
< 낭만필드 - 0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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