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9화 (9/356)

< 낭만필드 - 009 >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시끄럽네...”

성배는 다시 폐인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클럽으로부터 은퇴를 종용 당했을 때, 어렵사리 떨치고 일어나 힘들지만 그래도 의욕적으로 코치 생활을 준비하려던 순간, 두 번째로 당한 배신은 성배의 모든 의욕을 꺾어버렸다.

며칠 전, 클럽으로부터 코치 계약을 무기한 미루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부터는 걸려오는 전화들도 전혀 받지 않고 그저 폐인처럼 침대에 누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자스민이구나. 헤르만 아저씨가 또 연락하셨나보네.”

자스민의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지난 통화에서 둘 사이가 이제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배였다.

자스민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하게 매달릴 것만 같았다.

헤르만과 그레고리에게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성배는 그 전화마저도 피하고 있었다.

분명, 지금의 성배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성배는 누구의 위로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무너져 추한 꼴을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헤르만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잘 따라주는 그레고리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 하하하... 내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바닥을 보여주어도 괜찮을 사람이...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을까. 내 나이가 서른여섯인데... 정말, 인생 헛살았구나...’

스무 살에 한국에 있던 연고를 모두 버리고 벨기에로 날아온 성배였다.

어릴 적 만들었던 인간관계는 모두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친구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벨기에로 와서부터는 살아남기 위해 축구에만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친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동료 선수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공과 시간을 보냈고, 선수가 아닌 코치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나마 두 명 있는 자신의 사람, 헤르만과 자스민 중 한 사람은 자신의 곁을 떠났다.

헤르만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힘든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헤르만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한국에 있었고, 또 부모님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삶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클럽은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자신을 비참하게 버렸다.

인간관계를 포기했던 성배는 클럽에게까지 배신당하면서 인생을 바친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동력들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 엄마?”

하지만 부모님의 전화까지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인 헤르만이 연락했을 것이었다.

며칠 째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이 전화마저 받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의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경찰이 출동하거나, 부모님이 출동하거나.

어느 쪽이든 부모님이 크게 걱정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여보세요?”

[성배야!! 성배야... 오, 감사합니다. 아무 일 없는 거지?]

“네,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지쳐서 조금 쉬었어요.”

성배가 전화를 받자, 어머니는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건넸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음을 모두 바친 클럽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데, 며칠 째 전화도 받지 않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으셨으니 혹시나 잘못되었을까, 걱정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별 일 없는 거지? 나쁜 생각을 한다거나, 한 거 아니지?]

“네. 나쁜 생각을 왜 해요... 그 쪽으로 가도 누가 반겨준다고... 엘라한테 혼나기나 할 텐데,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뤄야죠.”

[그래, 그래. 잘 했어. 이럴 때일수록 마음 굳게 먹어야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었다.

엘라를 먼저 보냈다.

그 이후로 죽음이란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사고도 아니고 자신의 선택으로 목숨을 끊었을 때 부모님의 아픔을 생각하면 절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딸에 이어 전(前) 남편이라고는 해도 딸의 아버지까지 잃을 자스민을 생각해서라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성배야... 이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어떻겠니? 이제... 그 곳에서 더 할 일도 없지 않니?]

“한국...이요? 제가 지금 가서 뭘 해요. 연고도 없고, 이름도 없는데... 그리고 유소년 팀 코치나 일반 축구 클럽 코치를 하려고 해도 유럽이 훨씬 편해요. 팀이 많으니까요. 평생 이것밖에 한 게 없는데, 결국 축구로 먹고 살아야죠.”

[에휴... 그러니? 그러면 할 수 없지...]

이번 일을 겪고 나서 불안해지신 것 같았다.

하긴, 큰일을 겪은 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연락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당장 찾아가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불안하셨을 것이었다.

이렇게 불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은 자신이 선수생활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상을 당했을 때 처음, 엘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던 몇 년 전에 두 번째,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전 괜찮아요. 아버지도 잘 계시죠?”

[그럼. 정년퇴임하신 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다니신단다. 아주 즐거워보이셔. 워낙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지 않니? 그래도... 헤르만 씨의 전화를 받으신 뒤부터는 영 저기압이셔...]

“에휴... 죄송해요. 걱정 끼쳐드려서. 그래도, 별 일 없었고, 없을 테니까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외교관으로 오래 일하셨던 아버지는 얼마 전 정년퇴임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셨다.

아들인 성배도, 딸인 유빈이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이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계셨을 텐데, 괜히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죄송해졌다.

[... 만나는 사람은... 있니?]

“하아... 없어요. 쉽지 않네요. 이래저래 생각도 많아지고, 무섭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겠지... 그... 미니...는?]

“...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몇 년 만에 통화했어요. 잘 사는 것 같더라고요.”

정식으로 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진짜 며느리처럼 자스민을 대해주셨던 부모님이었다.

엘라가 태어났을 때는 모든 일을 다 뒤로 하고 벨기에로 날아와 입꼬리를 차마 귀에서 내리지 못하시기도 했었다.

엘라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 자신 못지않게 힘들어하셨고, 자스민이 떠날 때도 차마 성배와 자스민을 말리지 못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더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었다.

[엄마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주책일 수도 있지만... 다시... 그, 만나는 건...]

“어머니. 죄송해요. 저도, 자스민도 다시 만나면 서로를 보면서 엘라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그런 시간이 행복하기는... 어렵겠죠.”

[휴우... 미안하다. 괜히 엄마가 주책을 떨어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

건너편에서 애써 울음을 삼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성배도 울컥하고 차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엘라가 태어난 뒤, 그리고 엘라를 먼저 보내고 난 뒤, 성배는 부모님의 마음을 최소한 절반 이상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얼마나 속을 썩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었다.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결혼에도 실패했고, 일에서도 실패했고, 자식까지도 잃은 아들. 그리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모든 것을 잃은 아들.

‘하아... 이 얼마나 큰 불효냐... 한심하다, 주성배.’

결국 마지막까지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배는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께는 더 이상 드릴 말씀도 없었다.

매 번 자신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고 있으실 텐데, 걱정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이 공허한 울림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실 텐데, 매 번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면 성배는 너무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엘라야... 아빠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서 벌 받는 걸까? 엄마가 맞는 말을 해도 너무 아빠 고집만 부려서 벌 받는 걸까? 어떻게 생각하니... 엘라야...”

성배는 침대 옆에 놓여있던 가족사진, 자신과 자스민, 엘리자베스가 웃고 있는 사진을 가슴에 안으면서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처음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모니터를 박살내던 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너무 아픈데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었다.

[자기는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해? 자기, 기회가 있고, 실력이 있는데도 결국 2부 리그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만 할 거야? 자기 나이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 은퇴 후도 생각해야지!! 은퇴 후를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1부 리그 무대를 밟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팀을 버려. 이 팀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잖아? 나를 다시 살려 준 팀이나 다름없다고.]

[10년이나 뛰었으면 할 만큼 했어!!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연봉도 매일 후려치고 있잖아!! 당신, 축구 선수가 평생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그래!!]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할 때마다 화를 내던 자스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운동선수의 가치는 연봉이라며, 연봉은 돈 이상의 자존심이라면서 자신보다 더 안타까워했던 자스민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과 클럽의 사이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며 무시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과 엘라의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냐며 화를 냈던 자스민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 새끼!! 이 새끼야!! 너는 왜 살아있냐, 이 개새끼야!! 네가 왜 살아있어!! 너도 죽었어야지!! 너도 죽었으면, 너도 죽었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거 아냐, 이 개자식아!! 네가 무슨 낯으로 살아있냐고!! 엘라, 엘라 살려내, 이 씨발 새끼야!!!!!!!!!!!!!!]

[주... 주...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흐윽...]

[으아아아아악!!!!!!!! 으헝, 으허어엉!!! 어헝, 크아, 크아아악!!!!]

불의의 사고로 엘라를 먼저 보낸 날, 엘라가 타고 있던 통학 버스 운전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던 것도 떠올랐다.

마약에 취한 운전자가 몰던 트레일러가 중앙선을 넘어 엘라가 타고 있던 통학 버스를 덮쳤다.

그 과정에서 운전자는 본능적으로 마주 오는 차가 자신이 있는 운전석을 덮치지 않도록 핸들을 꺾었고, 트레일러는 정확히 엘리자베스가 앉아있는 좌석을 강하게 들이받고 말았다.

이 사고로 세 명의 아이가 사망했고, 운전자는 전치 4주의 부상에 그쳤다.

성배는 사고의 전말을 알고 난 이후, 이성을 잃고 운전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폭언을 쏟아냈고, 안트베르펜 지역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성배를 자스민이 힘들게 뜯어말려 다시 집으로 데려온 날, 그런 날도 있었다.

[주... 우리... 이제 그만하자. 주도, 그리고 나도... 너무 지쳤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을 바에야, 끝내는 게 맞는 것 같아.]

[미, 미니!!]

[엘라는 우리에게 내려온 선물이었고, 천사였어.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주고 위로해가면서 살았다면, 그래도 살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아픔에만 빠져서 서로에게 소홀했어.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나라도 주의 아픔을 안아주었어야 했던 건데...]

[미, 미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이제부터라도 함께 헤쳐 나가자. 우리가 함께라면 정말 힘들고 죽을 것같이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주... 이미 너무 늦었어. 엘라가 떠난 뒤 2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상처를 줬어.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서 상대가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몰랐던 거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최소한 나는 그러는 동안 주에 대한 감정들이 너무 무뎌졌어. 잘은 모르지만, 주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의 사이가, 서로를 생각하는 우리의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동안 애써 잊었다고 자신을 세뇌해놓았던 기억들이 성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끝없이 밀려들어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던 심각한 부상, 나름대로 유망한 선수에서 재기가 불투명한 선수로 추락했던 시절, 결국 아무 곳에서도 선택받지 못해 은퇴를 각오했을 때, 10년 가까이 스트라이커와 윙어, 미드필더까지 오가며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절.

결국... 이렇게 버림받게 된 상황.

전혀 순탄치 못했던 선수 생활과 그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가정사. 성배가 겪어왔던 수많은 아픔들이 한 번에 성배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평생 동안 겪은 모든 아픔들이 한 번에 밀려오는 통에 견딜 수 있는 한도를 훌쩍 넘어섰고, 결국 성배는 정신을 잃고 졸도하고 말았다.

가슴 속에 행복했던 짧은 시절의 사진은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였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그 때, 휴대폰의 벨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 성배의 휴대폰 벨소리는 그저 평범한 스마트폰의 음질이었는데, 지금 울리는 벨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웅장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공간 자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음악이 점점 더 고조되면서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되었다가 이제 겨우 딱지가 지기 시작한 성배의 왼발,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큰 부상을 당했던 오른쪽 무릎에서부터 은은하게 빛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곧 온 몸을 감쌌다.

은은하게 퍼져있던 빛 무리들은 점점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가슴 부근에서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눈이 멀어버렸을 강렬한 빛이 되어 반짝인 후에 성배의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TO... SAY ADIEU!! WORLD!!]

그리고, 빛이 사라진 순간, 방 안에서 성배의 모습이 사라졌다.

< 낭만필드 - 009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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