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08 >
[우리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 행복했던 시간들만 생각난다고? 당신... 매일 내 얼굴을 보면서, 엘라...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 있어?]
성배는 자스민에게 더 이상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자스민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스민과 함께하면서 엘리자베스를 떠올리지 않고, 떠올리면서도 가슴아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전화를 끊고도 담담하게,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자스민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나는... 못해. 주. 주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사랑한 사람이고, 내 20대를 빛나게 해준 사람이야. 하지만... 이제 우린 너무 늦었어. 우린... 큰 슬픔 앞에서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없었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주도, 나도... 각자의 아픔을 견디기도 버거워서... 서로를 만져주지 못했어. 다시 만난다고... 달라질까?]
결국 성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사고로 엘라를 잃은 뒤, 성배와 자스민의 사이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얼어붙었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핀치에 몰려버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서로 돌보아주면서 함께 헤쳐 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졌다.
각자의 슬픔을 각자, 자신의 힘으로 혼자 버텨냈던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엄청난 감정 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마모되고 잘려나갔고, 서로를 이어주던 여러 가지 유대감들 역시 마모되어버렸다.
이후 3년을 더 버텼지만,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젠장... 오늘 전화가 많이 오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구나.’
자스민과의 통화가 끝난 이후, 성배는 자스민과의 나날들을 떠올리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자스민과 헤어진 이후, 6개월 동안은 매일 흘리다가 최근 몇 년 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았는지, 휴대폰 벨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여보세요?”
[아, 주. 나야. 비안키 감독.]
“아,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이번에는 로얄 앤트워프의 비안키 감독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신임 코치로 선임된 성배의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생활이었다.
감독에게 잘못 보이면 새로운 인생의 첫 번째 장이 시작부터 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전화를 받는 자세마저도 반듯해졌다.
[음... 코치로 부임하자마자 사고를 한 건 쳤더군? 자네... 그레고리에게 팀을 떠나라고 했다면서?]
“아... 그... 떠나라고 한 건 아니고... 그게 말입니다...”
이런, 결국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레고리에게 괜한 조언을 건넨 것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가. 자신이 아끼는 후배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결국 자신처럼 후회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곧바로 후회했다.
로얄 앤트워프는 작은 클럽이고,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역시 결국 감독에게 이야기가 들어가고 말았다.
[정확히 자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건넸는지, 대충은 알고 있어. 나도, 나도 선수들을 아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 코치라는 자리는 선수들을 아끼는 마음만으로 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 죄송합니다.”
확실히 성배의 조언은 팀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팀에서 그레고리를 팔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레고리나 뱅상이나 성배의 자리를 꿰찬 선수들은 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높은 상품이었다.
하지만, 선수가 떠나고 싶어 해서 떠나는 것과 팀에서 높은 가격을 받게 되어 떠나보내는 것.
어느 쪽이 팀에 이득이 되는 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우리는... 자네가 은퇴와 관련된 모종의 일들로 클럽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 그럴 리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16년 동안 이 팀에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그리고 이 팀을 사랑하는지 말입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지금도 그럴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누가? 죽고 못 살던 연인도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버리는 세상인데 말이야. 자네를 1군에서 쓰지 않겠다고 하던 날, 구단 사무실에서 소리치던 자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 감독은 외부 인사 출신이었다.
로얄 앤트워프에서 이제 겨우 세 시즌 째를 맞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성배가 그 동안 팀을 위해 어떻게 뛰었는지 몰랐다.
성배가 겪은 지난 감독들은 전부 다 코치에서 승격하거나, 클럽에서 뛰었던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배에게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었지만, 지금 감독은 그런 것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팀을 향한 제 마음은 전부 다 진심입니다. 그레고리에게 큰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레고리가 저를 잘 따랐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레고리가 조금 더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맞아. 그레고리는 자네를 잘 따르지. 다른 선수들도 일부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자네를 끌고 가려 했던 건데... 지금 와서 보니까 과연 그것이 잘 한 결정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어.]
“감독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코치 선임이 잘 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결국 코치 선임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구두로 합의가 되었을 뿐, 아직 확실히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클럽이 계약을 다시 고려한다고 하면, 성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안 그래도 현 감독은 이미 기량이 많이 떨어지고도 클럽 구성원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어 건드리기 힘든 성배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실수라고도 하기 애매한 성배의 말실수를 꼬투리잡아 내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즌이야. 하나가 되어 모든 힘을 모아야 1부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또 선수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어. 그렇게 되면... 팀이 나뉘어 버릴 지도 몰라.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 누구의 뜻입니까?”
[누구의 뜻이라니... 굳이 이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말하자면 자네가 그레고리에게 건넨 이야기의 내용을 들은 내가 단장님께 상담을 요청했고, 상담 결과 단장님께서도 심각성을 느끼셨는지, 허가를 해주셨지.]
“허, 허허허...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까? 팀과 16년을 함께 한 제가... 1부 리그 승격과 함께 이렇게 버려지는 겁니까? 저는 그저 돈이 안 되는 2부 리그 생활을 견디기 위한 부품에 불과했던 거군요.”
[나는 이 클럽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그리고,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클럽이 1부 리그에서 살아남고 안정을 찾는다면, 그 때 좋은 소식이 있겠지.]
성배는 더 이상 항의할 기력조차 없었다.
클럽에서 은퇴를 종용했을 때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량이 떨어진 것은 분명했고, 이제 기량이 떨어질 일만 남은 자신보다는 조금 기량이 떨어지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이 나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포지션의 백업 선수까지 영입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굳이 자신이 있음에도 자신의 포지션의 백업을 보강하겠다는 클럽의 계획이 섭섭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은퇴를 선택하게 만들고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던져주었던 코치직까지 거두어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16년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보다도 더 심한 짓이었다.
짧은 기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클럽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이었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은퇴하라고만 하지 그랬습니까... 아니면, 그냥 방출을 해버리지 그랬습니까... 내가 바친 16년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제가 뭐가 됩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안타깝게 생각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겠지만,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생각해봐. 자네의 문제가 없었나? 은퇴? 그건 자네가 들었고,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번 코치 선임 건이 엎어진 건... 자네가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이지. 너무 클럽에게 서운해 하지는 말게. 어쨌든, 결론이 확실히 나면 다시 연락해주지.]
“......”
성배는 감독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에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분석하고 있었던 로얄 앤트워프의 지난 경기가 일시정지 되어 있었다.
성배는 그 화면을 더 이상 쳐다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퍼어-억!! 콰앙!!
분노를 이기지 못한 성배는 그대로 모니터를 들어 바닥에다가 내리 꽂아버렸다.
당연히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모니터는 산산조각이 나면서 여기저기로 파편을 튕겨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들어 올렸던 성배는 또 한 번 습관적으로 발을 멈추었다가 자신을 비웃었다.
이제 발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먹여 살렸던 고마운 발이지만, 이제 아껴줄 필요가 없어졌다.
-퍼억! 퍼억!! 퍼억!!!
“이런, 썅!! 아파!! 아프다고!! 너무 아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성배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깨진 모니터의 조각들, 그리고 단단한 모니터의 프레임들을 맨발로 걷어차고 있었으니 발이 성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성배의 왼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있었고, 부서진 모니터의 파편들은 물론이고 방바닥도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버렸지만, 성배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파!! 아프다고!!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다아아아!!!!!”
계속해서 단단한 모니터의 조각들을 걷어차고 있었기 때문에 발에서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지만, 아무리 발이 아파도 마음의 통증에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의 미미한 고통일 뿐이었다.
아프다고 절규를 내뱉는 성배는 모니터를 발로 후려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쥐어뜯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0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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