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07 >
‘그레고리가 일단 이번 시즌까지는 남는다고 생각하면... 왼쪽은 전혀 문제가 없고, 1부 리그에서 통할만한 센터백 한 명이랑 스트라이커 한 명 정도는 필수적으로 필요할 것 같은데.’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당장 다음 시즌이 끝난 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로얄 앤트워프는 사실상 다음 시즌 최약체였다.
이번 시즌의 승격도 벨기에 리그의 독특한 구조 덕분으로, 사실상의 전력은 2부 리그에서도 중상위권에 불과했다.
‘한 시즌 동안 코치로서 나의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야 된다... 다행히 나는 젊으니까 포지션도 확실해. 선수생활을 마무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나한테는 메리트다. 확실히 살려야 돼.’
감독과 코치들이 아무리 팀의 전반적인 부분을 관리한다고 해도, 직접 그라운드에서 몸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배는 달랐다.
다른 코치들과는 달리 그라운드 위에서 직접 팀의 장점과 단점을 몸으로 느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장 몇 년 정도는 이를 살릴 수 있었고, 잘만 이용하면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얀은 분명히 빨라. 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볼을 주려고 보면 이상하게 볼을 줄 기회가 별로 없어. 영상으로는 오프 더 볼 움직임이 좋은 것 같지만, 동료가 볼을 잡았을 때는 이상하게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해.’
얀은 신기한 선수였다.
영상으로 보면 항상 볼을 주기 좋은 위치로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라운드 위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은 얀에게 볼을 넘기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 몇 초 정도 패스를 줄 수 없는 위치에 위치하고 있었다.
킬 패스는 1초가 길 정도로 순간적인 타이밍이 중요했기 때문에 얀이 결정적인 패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료가 볼을 잡았을 때, 자신의 움직임 말고 상대 수비수들의 움직임도 잘 파악해줘야 돼.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 수비수들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얀의 문제야.’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응? 누구지?”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영상으로 보여지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다른 코치들이 보기 힘든 부분들을 찾기 위해 집중하던 성배는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놀라 휴대폰을 찾았다.
로얄 앤트워프, 그리고 축구에만 집중하던 성배는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 자스민?”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성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만과 만나 술을 마시고 10여 년 만에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했던 날, 자신이 자스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 자스민의 이름을 보고 마음이 복잡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보세요?”
[아, 주... 나야. 잘 지내지?]
“잘 지내지...”
멍하니 휴대폰에 적힌 자스민이라는 이름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성배는 이러다가 전화가 끊길 것만 같아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어색했다.
3년 만의 통화, 그것도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헤어진 사랑했던 사람과의 통화가 어색하지 않을 리 없었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당신... 은퇴했다며. 사실상 반 강제라고 들었어.]
“...응. 맞아. 그랬지. 1부 리그에서는 내 경쟁력이 없다더라.”
[그러게, 진작 환상에서 깨고 더 좋은 팀으로 가라고 했잖아!]
“그래. 네 말이 다 맞더라. 하하, 이제 이 바닥에 낭만, 의리, 신의. 이런 것들이 있을 자리는 없더라고. 내가 바보였지.”
자스민이 전화를 건 이유는 역시 성배의 은퇴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성배와 10년을 넘게 만난 자스민이었다.
성배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 중 몇몇과는 성배 못지않은 친분을 쌓아서 성배와 헤어지고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헤르만이 말해줬구나?”
[그래. 주가 취해서 나한테 전화한 다다음 날. 그 날 전화해서 말해줬어... 팀에게 배신당해서 힘들어한다고.]
“하아... 배신이라고 할 게 있나. 나 혼자 믿었고, 나 혼자 상처받은 것뿐인데. 애초에 팀에게 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더라고.”
[아휴...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그랬어...]
“하하하, 아쉬워해주는 거야? 기분 좋네. 옛날 생각도 나고...”
자스민은 분명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성배의 은퇴와 그것이 성배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그 부분에 대해 자스민은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분명한 성배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최근 기분 좋을 일이 없었던 성배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자스민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자스민은 현명한 여자였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고, 법적으로 사실혼 부부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성배와 사랑의 결실인 아이, 엘리자베스까지 낳았다.
자스민,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한 시간은 지금까지 성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엘리자베스가 성장하면서 성배도 성장해 전성기를 달렸고, 현명한 자스민의 내조는 성배가 오로지 그라운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행복했기 때문에 결국 불행해졌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코치로 계약하자고 하니까, 열심히 해 봐야지. 내가 이제 와서 뭐 다른 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버텨봐야지.”
[... 생활은 괜찮아? 돈은 좀 모아놨어?]
“그럼. 잘 알잖아. 내가 돈 쓸 데가 어디 있어. 연봉도 적지만, 씀씀이도 적었으니까... 아껴서 살면 그래도 문제는 없을 거야.”
완전히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이 파탄나기 전에 이별을 선택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를 응원해줄 수는 있을 정도였다.
20대를 전부 함께 보낸 상대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상황에서 헤어졌기 때문에 후회는 덜했지만, 성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련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하하, 그래? 잘 버티는 것처럼 보여? 그거 다행이네.”
잘 버티고 있다기 보다는 체념에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이미 스무 살에 포기하는 법을 배운 성배였다.
두 번에 걸친 포지션 전향, 빅 리그에 대한 꿈의 좌절, 15번에 걸친 1부 리그 승격 좌절 등, 성배는 스무 살 이후로도 수많은 경험을 거치며 포기하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포기하는 법을 완전히 깨우친 상황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달려드는 법.
그것은 16년의 선수생활과 36년의 인생 속에서도 성배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잘 버텨. 혹시 알아? 엄청난 지도자가 될지... 응원할게.]
“... 지금 이 통화가 끝나면, 앞으로는 또 몇 년 동안 안부도 전하지 않는 사이가 되겠지?”
[......]
자스민과의 통화가 끝을 향해 나아갈수록, 성배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지금 이 통화가 끝나면 앞으로 자스민과의 유대는 더욱 옅어질 것이었다.
자스민과 자신이 공유했던 선수로서의 시간은 끝이 났고, 성배의 앞에는 이제 자스민이 알지 못하는 지도자의 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자스민... 아니, 미니. 우리... 우리 사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제 와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미니, 이제는 네 웃는 얼굴 말고는 기억이 안 나. 우는 얼굴, 화난 얼굴은 이제 떠올릴 수가 없어. 그래서 너와 함께 하면서 힘들었던 시간, 화났던 시간도 함께 잊을 수 있었어. 너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지금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낭만필드 - 00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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