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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6화 (6/356)

< 낭만필드 - 006 >

‘담배라도 배워볼까... 그거 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던데...’

사무실을 나와 밖으로 나온 성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항상 자신이 친근함과 함께 소속감을 느꼈던, 그런 포근한 공간에 있다가 나온 것인데,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포근했던 단장 사무실은 자신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해 구매를 결정하는 상품 진열대 같았고, 단장은 말 한 마디로 자신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주!!”

“응? 아, 그레고리냐.”

이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었다.

왜 사람들이 담배를 시작하는지. 하지만 서른여섯이 되어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왜 담배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고 쓸 데 없는 이해를 시작한 성배를 다시 쓸 데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그레고리였다.

자신과 같은 레프트 백 포지션에서 같은 세대 중에는 그래도 손에 꼽히는 뛰어난 유망주라고 평가받지만, 1부 리그로 떠나지 않은 친구였다.

“주!!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그거 진짜예요?”

“그래, 뭐... 그렇게 됐다. 나이도 있고, 팀도 이제 1부 리그로 올라갔으니 내 역할은 이제 끝이지.”

“아...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아직 저한테 가르쳐줄 게 많은데 이렇게 은퇴하시면 어떡해요! 다 가르쳐준다면서요.”

“하하하, 당장 몇 달 뒤에는 올림픽 무대에서 뛰고 있을 놈이 만년 2부 리거한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올림픽 대표면 그 급에 맞는 선수들한테 배워야지.”

두 시즌 전부터 자신을 백업으로 밀어낸 선수였지만, 그레고리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뿐이었다.

나름 유명한 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잘 따라주었고, 만년 2부 리거에 불과했던 자신에게도 내려다보지 않고 항상 뭔가를 배우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여러 벨기에 내 빅 클럽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팀에 남아 승격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래서 기특했지만, 지금은 그래서 안타까웠다.

“주가 2부 리그에서만 뛴 건 우리 팀을 위해서 주가 직접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주는 여전히 제가 아는 선수 중에는 제일 영리하다고요. 그 부분은 저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에요.”

“너는 경험이 적을 뿐이지, 영리하지 못한 게 아니라고 항상 말했잖아. 뭐, 그래도 아예 팀을 떠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마. 감사하게도 팀에서 코치 자리를 내줘서 이제는 코치로 있을 테니까.”

“아... 역시!! 역시 주가 이렇게 팀을 떠날 리 없었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팀을 떠나지 않고 코치로 남는다는 이야기에 표정이 확 밝아지는 그레고리였다.

자신을 왜 이렇게까지 따르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레고리는 그 자신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거의 멘토처럼 성배를 따르고 있었다.

이 정도 재능이 있는 유망주라면 당연히 이 나이 즈음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롤 모델로 놓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할 텐데, 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기분이 좋았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나에게 너 같은 재능이 있었으면, 나는 절대 너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옛날에 안더레흐트나 브뤼헤로 떠나고, 지금쯤 빅 리그로 나가있겠지...’

자신이 클럽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16년을 헌신해왔다는 점이 그레고리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지만, 성배가 그레고리의 나이일 때는 그런 생각도 다 사치였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은 밀리지 않기 위한 투쟁이었고, 지금 그레고리처럼 팀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레고리.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 좋은 제안들이 많이 들어올 거야. 그러면...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추진해봐라. 여기는 너에게 너무 좁아.”

그래서일까, 성배는 그레고리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조언을 건넸다.

사실, 그레고리는 그냥 두어도 크게 성장할 선수였고, 자신이 몇 년 만 데리고 있으면 그레고리를 키우는데 자신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면서 실적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자신처럼 클럽에 의해 거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거취를 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 주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조금 낯선데요?”

“나는 이적하는 것과 팀에 남는 것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남았던 거야. 내 수준과 팀의 수준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이 팀을 나갈 마음만 먹으면 당장 2-3년 뒤에 빅 리그에서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이런 이야기를 굳이 그레고리에게 해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실적은 차치하고라도 코치직을 맡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면, 이럴 때, ‘팀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네가 대견하다.’는 한 마디를 던졌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선택을 한 자신, 그리고 그 자신의 마지막을 겪은 뒤라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하하, 코치하신다면서요? 그런 이야기 막 하고 다니셔도 되는 거예요?”

“아, 그런가? 아아, 나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그냥 이럴 때는 좋은 선택을 했구나, 라고 넘겨야 되는데 말이지.”

그레고리의 농담에 성배도 농담으로 대답했지만, 아차, 싶기는 했다.

크지 않은 클럽이었기 때문에 아마 며칠 안에 자신이 그레고리에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이 퍼질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두 명 정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기도 했다.

“아오... 코치되자마자 이거 잘리는 거 아냐?”

“하하, 그럴 리가 있나요. 주가 이 팀에 어떤 존재인데요. 그리고 코치가 선수 걱정해주는 건 당연한 거죠.”

‘순진하구나. 낭만주이자이기도 하고... 나랑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그레고리의 순진한 말에 성배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 친구는 제발 자신과 같은 마지막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결과적으로 기량이 부족하고 모든 클럽들이 원하는 선수가 되지 못해서 이렇게 끝냈지만, 그레고리만큼은 클럽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갑이 되어 자신의 낭만을 지키면서도 얻어낼 것들을 모두 얻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일단 이 친구를 한 번 지켜보자. 이 친구와 로얄 앤트워프가 어떻게 헤어지는지를 보고, 코치로서 나의 방향도 한 번 생각해보자.’

선수생활의 마지막이 꼬인 이유가 자신의 기량 부족인지, 아니면 클럽 경영에 있어서 의리가 들어갈 자리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 확인하기에는 그레고리만큼 적당한 대상이 없을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삶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는 기량이 부족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를 바랐다.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삶의 방향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너무 불쌍해지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진지하게 생각해 봐. 네가 이 팀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꼭 여기서 활약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네 이적료라면 1부 리그로 올라가는 팀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적당한 이적료로 1부 리그 수준의 선수들 여러 명을 데려올 수 있을 테니까.”

“... 참, 현실적인 이야기네요. 저에게도 물론 그 쪽이 좋겠지만. 그래도, 주랑 조금은 더 함께 하고 싶어요. 주의 경험도 조금 더 흡수하고 싶고요.”

“그래. 그것도 좋겠지. 내가 얼마나 가르쳐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16년을 이해해주는,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비록, 자신의 거취에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하는 한 명의 유망주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도 기뻤다.

단장, 감독,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기쁜 것이리라.

< 낭만필드 - 00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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