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05 >
“은퇴...하겠습니다. 코치로, 앞으로는 코치로서 로얄 앤트워프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워낙 똑똑하고 경기를 보는 눈이 좋으니까 코치로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구단 사무실을 찾은 성배는 결국 클럽 측에 은퇴의사를 전달했다.
처음부터 성배에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지만, 1부 리그 진출에 대한 미련이었다.
1부 리그 진출로의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현실에서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없는 것을 넘어서 그나마 클럽에서 던져 준 코치직도 건지지 못하는,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모아놓은 돈은 앞으로 까먹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연봉은 대폭 깎이겠지만, 코치직이라도 손에 쥐지 못하면 그야말로 경제력이 시한부 판정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16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총동원해서 최대한 클럽의 전력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 특별한 재능도 없고 포지션도 세 번이나 전향했지만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이해도, 여러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 다 자신 있습니다. 꼭, 저에게 코치직을 맡겨주신 클럽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자네라면 잘 하겠지!! 알고 있다고.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친구는 선수보다 지도자로서 대성할 거라는 직감이 왔어. 한 번 다음 시즌부터 우리 잘 해보자고.”
다행히 감독의 반응은 좋았다.
진심으로 성배가 코치직을 맡는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럽에 고용되는 형태이기는 하지만 결국 직속상관은 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성배의 코치 선임을 만족한다는 것은 그래도 좋은 시작이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이 정도면 됐어. 좋은 시작이야.’
클럽에게 서운한 감정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클럽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16년을 이렇게 함께 달려왔으니 상징적인 존재로 한 시즌 정도는 1부 리그에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클럽에게 서운한 것은 당연했고, 고작 며칠 만에 사라질 수 있는 성격의 감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클럽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클럽도 그 16년의 시간을 생각해서 던져주다시피 한 것이지만 어쨌든 코치직을 준비해준 것이었다.
자신은 냉정하게 말해 클럽 입장에서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난 시간동안 클럽을 가족이라 여긴 것은 자신 하나였고, 클럽도, 팬도 자신을 가족이라 여기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족은 무슨... 싼 가격에 비해서 효율이 좋았을 뿐이지. 젊을 때 백업, 나이 들어서 주전으로 활약할 때도, 동급 선수들에 비해서 싸게 계약해줬으니까.’
선수생활 초기에는 선수생활 그 자체에 만족해서 그리 큰 연봉을 요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자기 혼자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생각에 빠져서 디스카운트를 자처했다.
팀에서는 선수가 알아서 디스카운트를 해주니까 효율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쓸 수 있는 선수를 내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레고리랑 뱅상이 나타나니까 바로 버려지잖아. 제길... 돈이 걸린 세계에 의리란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차피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였다.
자신과 클럽이 가족과 같은 관계라는 환상에서 깨어난 성배는 이제부터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어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었다.
방금 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어필할 필요성도 느꼈고, 그것뿐만 아니라 윗사람들과 친분도 쌓아보기로 했다.
선수야 기량만 갖추고 있다면 어디서든 뛸 수 있는 기술직이었다.
반면, 코치는 대충 보면 선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술직보다는 사무직에 가까웠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플레이로 실력에 순위가 매겨지는 선수와 달리, 코치의 역할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선수들에 대한 영향력, 선수 관리, 선수 성장 등 코치의 역할은 분명히 눈으로 확인하고 순서를 나누기 애매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선수에 비해 코치는 TO 자체가 적었다.
중소 규모의 클럽으로 내려오면 코치의 숫자가 5명을 겨우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한 팀에서 5년 이상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은 선수에 비해 코치는 10년을 넘기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한 팀에서 코치로 활약하다가 나가게 되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정치 싸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 단장님이 찾으십니다. 감독님이랑 이야기 끝나면 단장실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장님이요? 무슨 일이시지...”
감독과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성배에게 클럽 직원이 단장의 말을 전했다.
감독과의 대화가 끝나면 바로 올라오라는 단장의 말에 왜 부르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서둘러 단장실로 올라가는 성배였다.
이렇게 부르면 바로바로 뛰어가는 것부터 사내 정치의 시작이었다.
“아, 왔군. 이야기는 들었네. 은퇴하고 코치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잘 생각했네.”
“네, 감사합니다.”
성배가 은퇴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장의 표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것이 성배를 불안하게 했다.
단장이 원하는 대로 은퇴를 선택했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기본적으로 미소는 짓고 있지만 원래 그 정도의 미소를 항상 짓고 있는 단장이었고, 단장을 오래 봐온 성배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클럽의 대우가 섭섭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20년 만에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것인데, 철저한 준비를 하고 싶다네.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네... 이해는 합니다. 클럽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철저한 준비... 클럽을 위해 16년을 바친 선수를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은퇴시켜버리는 게 철저한 준비구나.’
단장이 말하는 철저한 준비는 최대한 여기저기 지출 금액을 줄여서 최대한 좋은 전력의 선수단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성배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그래도 팀의 암흑기를 함께 버텨왔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마저도 주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이제 1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기 때문에, 로얄 앤트워프도 그에 어울리는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로얄 앤트워프를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선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애매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었다.
1부 리그로 무대를 옮기면서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었던 선수들. 그 선수들 중 상당한 숫자는 이번 이적 시장에서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로 인해 자리를 잃고 또 다른 2부 리그 클럽으로 무대를 옮기게 될 것은 자명했다.
기존의 선수들과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 사이가 꺼림칙해지는 그 때, 분명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디까지나 성배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고, 현재 선수단에서 성배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선수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이제는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발악과 같은 것이었다.
“자네의 역할은 다음 시즌, 1부 리그에서 경험이 없는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그런 역할을 맡게 될 것이네. 선수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부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네의 축구 지능이 자네 혼자의 플레이가 아닌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부분 등에서 코치직이 더 나을 것이라 결정한 것이니 섭섭함이 남아있다면 훌훌 털어버리게.”
“이제 괜찮습니다. 다 털어버렸고, 제 새로운 역할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단장이나 클럽 측에서 입에 발린 말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족인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걸러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위로가 되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머리에서 걸러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네.”
“예? 갑자기 무슨...”
“자네가 어제 술이 좀 과해서 클럽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순간, 성배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단장이 자신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어제 술집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단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선수생활의 연장을 포기하고 클럽에 남기를 선택한 상황에서 단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어제 자신도 모르게 술에 취해 쏟아냈던 푸념들이 제발 단장이나 구단주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서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습니다.”
“뭐, 이해는 할 수 있네. 아무래도 16년 동안 2부 리그에서만 뛰었으니 1부 리그에서 한 번은 뛰고 싶었겠지. 하지만, 클럽은 다른 많은 선수들의 꿈 또한 짊어지고 있다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성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성배도 클럽의 운영이라는 측면을 생각했을 때, 자신을 지금 방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성배가 섭섭한 부분은 16년이나 팀을 위해 공헌해온 자신에게 아름답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단 1년도 클럽에서 내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네만을 위해줄 수 없어. 자네가 팀을 위해 공헌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입장도 이해해주게.”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클럽의 입장은 저도 백분 이해합니다.”
그런 성배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클럽에게 점점 더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클럽을 생각하는 것처럼 클럽도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클럽 측에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팀만을 위해 달려온 지난 16년의 시간이 후회될 뿐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 일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나돌지 않았으면 좋겠네. 클럽 입장에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라서 말일세.”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팀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에게는 보여줄 필요가 없는 가식적인 태도를 자주 취하고, 마찬가지로 가족이라면 필요 없는 정치적인 접근도 앞으로 자주 취하게 될 것이었다.
아직은 이럴 때마다 씁쓸함이 찾아왔지만, 앞으로 익숙해지면 버텨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00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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